92화. 또 하나의 체스말 (1)
강철중은 당분간 멕시코에 머물게 되었다.
그동안 필요한 게 있으면 아끼지 말고 돈을 쓰라고 허락했다. 그리고 직접 가서 보니, 인력이 좀 더 필요한 거 같기에 증원을 해도 괜찮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나저나 멕시코에 있는 내내 권용일과 강철중이 공모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일부러 강철중에게 술도 먹여 봤지만, 도저히 입을 열지 않으니….
그냥 권용일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는 건가.
“큰 형님께 연락이 왔었다고요?”
“예, 사장님. 돌아오시는 대로 연락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내가 먼저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다.
이 능구렁이 영감이 또 무슨 짓을 벌이는지 알아봐야겠다.
미국과 한국을 이어 주는 해외 연락망이 그리 잘 되어 있지 않아 권용일과 연결을 하는 데 좀 시간이 걸렸다.
“태산이냐?”
오랜만에 이 양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 같다.
전화상으로 듣는 게 조금 색다르긴 했다.
“예, 큰 형님.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이놈아! 도대체 언제까지 거기 처박혀 있을 거야! 서양 여자들이 그렇게 좋더냐?”
“…딱히 여자를 만나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버럭 소리를 지르던 권용일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흠흠. 정말이냐?”
뭔가 내가 유도당한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아무튼, 뭘 하고 있기에 거기서 시간을 축내고 있는 거야? 벌써 몇 달이나 됐는지 알아?”
“죄송합니다. 이리저리 일이 좀 많았습니다.”
“허허. 내 주머니 채워 주려고 네가 고생하는구나.”
어련히 알아서 채워 줄 텐데, 영감님이 걱정도 많다.
“예. 열심히 일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돌아갈 것 같습니다. 빠르면 이틀 내로….”
“뭐? 아니. 갑자기 그렇게 돌아오면 안 되지!”
“…예?”
처음에는 오지 않는다고 난리를 치더니?
대체 무슨 꿍꿍이지?
“그럼, 가지 말까요?”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서둘러서 올 필요는 없다- 이거지.”
“그러면 여유를 좀 갖고 일주일 뒤에 가겠습니다.”
“일주일? 으음. 그래라. 혹시라도 더 있고 싶으면 있어도 돼.”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이 영감이 이럴 사람이 아닌데, 굳이 날 미국에 붙잡아 놓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일단, 권용일의 장단에 맞춰 줘야 뭔 일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알겠습니다, 큰 형님. 아! 그리고 멕시코 쪽에서 약이 갈 겁니다. 한 1톤 정도 갈 예정인데… 울진항에서 받을 수 있게 준비를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1톤? 너 거기서 도대체 뭐 하고 지내는 거냐? 어디서 그 많은 약을….”
“귀국 선물, 미리 드리려는 겁니다.”
권용일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어지간히 좋은가 보다.
“이놈! 저번에 네가 준 약도 아직 다 안 팔았는데, 아주 날 배를 불려 죽일 생각이로구나!”
“마음에 드셨다면 다행입니다, 큰 형님.”
“허허. 그려. 내가 바쁜 사람 시간을 많이 뺏었구나. 거기 지금 무슨 요일이냐?”
“수요일입니다.”
“그래? 그럼,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좀 내라. 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이거였구먼. 하지만 내게 무슨 일을 맡기려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예끼! 그냥 시간을 좀 내라면 낼 것이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나왔다.
불리하면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권용일의 버릇이.
“어떤 일인지는 최소한 알려주셔야 제가 준비를….”
“시끄럽다! 아무튼, 뉴욕으로 가서 일요일 오후 2시까지 힐튼 호텔 로비에 있으면 된다. 알겠지? 그럼, 끊는다.”
속사포처럼 할 말만 남기고 권용일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난 잠시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한 방 제대로 먹은 것 같다.
* * *
“먼저 와 계셨네요.”
“예.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김아름 씨에게 물어볼 것도 있고요.
김아름은 오늘도 숨 막힐 것만 같은 자태를 뽐내며 킬힐을 신고 또각또각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예쁘긴 정말 예쁘다.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80년대 연예계는 21세기와 많이 다르지 않던가. 물론, 연예계의 패악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남아 있긴 하지만.
“어떤걸요?”
“사실 어제 큰 형님이 전화를 하셨는데, 갑자기 뉴욕에 있는 힐튼 호텔에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혹시 뭐 좀 아는 게 있으세요?”
김아름은 잠깐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 안경을 추켜올리며 대답했다.
“아뇨.”
그것도 아주 짧고 차갑게.
“그래요?”
겉은 저렇게 얼음공주마냥 차갑게 부정해도, 강철중처럼 뭔가 냄새가 난다.
그렇다면 권용일, 강철중 그리고 김아름까지 짜고 치는 고스톱이 있다는 건데….
설마, 저 둘이 내가 미국에서 하는 일을 권용일한테 다 까발린 건가?
아니. 그런 것 같진 않은 것 같다.
결국,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뉴욕으로 날아가야 할 것 같다.
“그럼, 준비해 주세요. 일요일에 뉴욕으로 가야 하니까요.”
김아름은 특유의 차가움과 딱딱함으로 대답했다.
“예, 사장님.”
그 영감이 뭔 일을 꾸몄는지는 모르겠다만, 뭔가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호텔이지?
* * *
콘래드 힐튼이 세운 힐튼 호텔은 럭셔리함을 강조하는 곳이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호텔 기업이기도 하다.
2016년에는 전 세계 4600개에 달하는 호텔을 세우게 되니, 변함없는 성장세로 세계 호텔 시장을 주름잡는다.
이곳 뉴욕에 있는 힐튼 호텔은 미국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호텔로 알려져 있다. 그런 곳에 권용일이 나를 보냈다는 건, 어떤 높은 사람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인가?
난 로비 소파에 앉아 지루함을 달래며 누구인지 모를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시간은 오후 2시 30분.
약속한 시간보다 30분이 늦었다.
설마, 파투인가.
난 옆에 앉아 있던 김아름에게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안 오려나 봅니다. 그만 가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김아름이 나를 강제로 다시 앉혔다.
“왜, 왜 그러는 겁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사장님.”
김아름의 이런 강압적인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다.
역시, 김아름도 권용일의 수작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군.
강철중과 김아름이 내게 이럴 줄이야. 그래도 조금은 믿었더니….
“어머. 언니. 오랜만이에요.”
잠깐 배신감을 느끼는 중에 젊은 여성이 다가와 김아름에게 인사를 반갑게 건넸다.
김아름과 아는 사람인가?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언니도 참! 제가 그렇게 부르지 좀 말라고 했잖아요.”
“아닙니다, 아가씨.”
“쳇. 여전하시네요, 언니는.”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역시, 가차 없이 자르는 게 보통 철벽이 아니다. 그것도 같은 여자한테도 저렇게 완강할 줄이야.
그런데 잠깐만.
방금 김아름이 아가씨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이쪽은… 김태산 씨?”
“아… 예. 그렇습니다만.”
이름 모를 여인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불쑥 튀어나왔다.
“권윤아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권유리라면 권용일의 막내딸 이름이지 않은가?
동명이인일 리 없다.
이 여자가 정말 권용일의 막내딸이 맞을 것이다.
몇 번이나 권용일이 말하지 않았던가?
자기 딸이 미국에서 유학 중이라고.
아마 나와 나이가 2살에서 3살 정도 차이 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드디어 만났네요. 어떤 분이신지 정말 궁금했는데….”
“저를요?”
“예. 아빠한테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하하…. 그럼, 제 이미지가 그리 좋진 않겠군요.”
권윤아는 손사래를 치며 얼른 내게 말했다.
“아니에요. 아빠가 그렇게 남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건 제가 처음 봤어요. 또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칭찬하는 것도요.”
“그럼, 다행이네요. 내심 걱정했습니다.”
난 권윤아의 말을 조리 있게 받아 주었다. 그러자 권윤아는 이것저것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는 중이었다.
사실, 지금 내 머릿속은 권윤아의 말을 다 받아들일 정도로 한가하지가 않았다.
심경이 참 미묘하고 복잡하다고 해야 할까.
권용일이 내게 미리 말하지도 않고 자기 막내딸을 만나게 했다는 건 무슨 뜻이겠는가?
막내딸과 나를 이어 주려는 계획이 분명하다.
“그럼,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사장님. 그리고 이건 저녁 예약을 한 레스토랑 주소입니다.”
얼씨구.
자리도 피해 주고 레스토랑 예약까지?
권윤아와 내가 분위기 좋게 데이트하기를 바라는 건가. 아니, 그렇게 권용일이 각본을 짠 것인가?
거기다가 만난 장소가 호텔이라는 건….
“언니. 이따 또 봐요!”
“예, 아가씨. 그럼….”
김아름이 사라지기 무섭게 권윤아는 내 앞에 앉아 헤벌쭉 미소를 보였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벌써 난감하다.
“제가 갑자기 나와서 놀라셨죠?”
“아…. 그, 그게….”
“놀라시는 거 보니까 정말인가 봐요?”
뭐가 그리 좋은지 권윤아는 혼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동안 난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권용일은 나와 막내딸을 이어 주길 원한다. 그렇다는 건 나를 사위로 맞이할 의향이 있다는 건데….
만일 내가 이 여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된다면.
그건 곧 화진 그룹 승계 작업에 끼어들 수 있는 결정적인 명분이 생긴다는 뜻이다.
원래는 세습을 하는 게 대한민국의 문화이긴 하지만, 권용일이 예전에 내게 밝히지 않았던가? 화진파를 크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자기 자리를 내어 줄 수 있다고.
물론, 내가 아는 미래에서는 권용일의 첫째 아들 권오준이 모든 걸 갖게 된다. 그러나 그건 이진용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
이미 많은 것이 바뀌었고, 또 많은 것이 바뀔 예정이다.
그럼, 눈앞에 이 여자는 내게 아주 좋은 체스말이 될 터.
처음 만난 상대에게 이런 생각부터 가지는 건 너무 가혹한 짓일까…?
아니. 내가 이미 이 세상에 눈을 뜬 이상, 모든 발걸음이 철저한 계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남녀 간의 사랑이라도.
“죄송합니다. 제가 놀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코 나쁜 뜻으로 그런 게 아닙니다. 실은… 저도 윤아 씨를 오래전부터 만나보고 싶었거든요. 큰… 아니, 회장님이 워낙 윤아 씨 이야기를 많이 하셔서요.”
생각을 정리하니, 머리가 맑아졌다.
연애는 거의 해 본 적도 없고, 어떻게 여자를 다루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의 게임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니, 청산유수마냥 말이 술술 나오고 있다.
역시, 난 진심을 가지고 연애하기에는 그른 것 같다.
권윤아는 살짝 홍조를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다행이네요.”
정적이 잠깐이라도 흐르게 놔둬서는 안 된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권윤아에게 손을 뻗었다.
“같이 가실까요? 제가 미국 구경은 제대로 해 보질 않아서요.”
“좋아요. 오늘 제가 제대로 관광시켜 드릴게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여자는 날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 그 뜻은 곧 내가 이 게임에 한 발자국 앞서 있다는 것이다.
난 들뜬 채로 호텔 밖을 나서는 권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김아름이 섹시미로 가득하다면, 권윤아는 청순미가 있달까.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그냥 사람 자체가 권용일과는 다르게 순수함이 느껴진다.
이런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권윤아가 권용일의 막내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이상, 내게는 하나의 체스말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에, 정말 만약에 계속 이 여자 곁에 있다 보면…. 언젠가 사랑이란 감정이 싹틀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지금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