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2)
미 정부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충 내용은 이렇다.
-이란과의 무기 거래를 한 것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국가를 위해 정해진 사안일 뿐이다. 결코, 다른 의중이 있어서가 아니다. 또한, 이스라엘 정부와 원만한 협의를 이루어내 굳건한 동맹을 이어 갈 것이다.
그리고 중령 올리버 노스와 리턴 컴퍼니 대표 톰 윈스턴이 돈을 목적으로 정부를 속이고 메데인 카르텔과 마약 거래를 했다는 정황을 포착했다며 여론몰이에 들어갔다.
연극은 시작이 되었고, 스테이지는 마련이 되어 있다.
각 상황에 맞춰 배역들이 움직여 줄 차례였다.
“미 정부는 이번 콘트라 사건의 핵심으로 알려진 리턴 컴퍼니의 대표 톰 윈스턴과 중령 올리버 노스를 추적 중에 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언론에 알려진 이후로 두 사람의 행적은 여전히 묘연한 것으로 알려져….”
TV에는 연일 콘트라 사건에 대한 뉴스로 시끄럽다.
우리의 계획대로 존 반디는 이미 제거가 됐다. 하지만 그의 신분 노출을 염려해 강철중은 시체를 완전히 훼손시켜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올리버 노스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나오는데, CIA에서 손을 쓴 게 분명했다. 조만간 올리버 노스가 유언장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속보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지금 미 정부에서는 우리 메데인 카르텔을 아주 나쁜 놈으로 몰아가고 있잖아.”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메데인 카르텔이야 항상 악역이었는데요?”
“워커!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그 CIA 새끼들이 헐값에 마약을 넘긴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로이 루스테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급하게 여기까지 달려온 것을 보면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난 슬쩍 미소를 띠며 로이에게 물었다.
“그렇게 심각합니까?”
“위쪽에서도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나한테 추궁까지 하고 있어. 카포도 이 일을 심상찮게 보고 있고.”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라면 파블로 에스코바르이지 않은가.
그도 미 정부가 메데인 카르텔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미 정부는 이 사건을 덮기 위해 급급해 할 것이며, 모든 비난의 화살을 메데인 카르텔에 돌리게 될 것이다. 또한,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구속하기 위한 작전도 시행하게 될 터.
내가 이번 콘트라 사건에 개입하게 되면서 파블로의 명줄이 더 짧아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의 조력자 로이 루스테가 험한 꼴을 당하게 놔둘 순 없다.
앞으로도 이 남자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테니까.
어차피 이 모든 상황은 이미 예상된 결과다.
“로이.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됩니까?”
“뭐를?”
난 로이에게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로이는 메데인 카르텔에 절대적인 충성을 하는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메데인 카르텔이 죽으라고 하면 죽고, 살라고 하면 살 겁니까?”
로이 루스테는 아직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과연 이 남자는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에게 충성을 다할 것인가, 아니면….
그를 밀어내고 새로운 메데인 카르텔의 주인이 될 것인가?
“갑자기 그건 왜….”
“로이.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절대 영원히 집권할 수 없습니다. 그가 마약왕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그건 곧 옛날 일이 될 겁니다. 미 정부는 파블로를 희생양으로 삼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메데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카포가 미국 손에 잡힌다고?”
이 시대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미 정부 손에 붙잡힌다는 게 그토록 상상하기 힘든 일인가?
“로이는 미 정부의 힘을 얕보고 있군요. 아무리 파블로 에스코바르라고 해도, 미 정부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순순히 붙잡힐 수밖에 없어요.”
내가 알고 있는 파블로의 최후는 이렇다.
그의 마지막은 미 정부와의 마찰로부터 시작된다.
콘트라 사건 이후 가장 큰 이득을 본 메데인 카르텔은 미 정부에 지속적인 압박을 받게 되는데, 미국 전역에 마약이 뿌려지자 부시 대통령은 메데인 카르텔 척결을 외친다.
그리고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추격하기에 이른다.
그 당시 파블로의 고향 콜롬비아는 메데인 카르텔을 건드릴 수가 없었다. 당장 콜롬비아의 군권까지 좌지우지하고 있는 파블로를 어떻게 건드린단 말인가?
그런 와중에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하면서 콜롬비아 정부가 엎어지고, 위기를 느낀 파블로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그러다 이런저런 일에 휘말려 나중에는 국민들 손에 붙잡혀 죽게 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파블로가 미 정부 손에 붙잡히게 되면, 그의 동생인 로베르토 에스코바르가 메데인을 지휘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로베르토가 정말 메데인을 잘 이끌 수 있을 거로 생각하세요?”
본래 역사대로라면 로베르토 에스코바르가 먼저 붙잡히게 된다. 하지만 이미 역사의 흐름은 바뀌었다. 둘 중 누가 먼저 잡힐지 모른다는 것이다.
로이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용히 내게 물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겠다.
“로이. 로이가 마음을 굳게 먹기만 한다면 저는 언제든 로이를 도울 생각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결정을 내리세요.”
“뭐를?”
“차기 카포. 메데인 카르텔의 새로운 주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겁니다.”
생각보다 격한 반응이 터져 나오진 않았다.
너무 놀란 탓일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차분한 사람이었던 것일까.
그는 굳은 표정으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로이. 혹시라도….”
“워커. 내가 하나만 물을게.”
내 말을 끊은 뒤 로이는 술이 담긴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내가 만약 마음을 정하면… 정말 날 도와줄 생각이야? 무슨 수로?”
“예. 미 정부와 협의를 봐서 파블로 에스코바르만 잡는 것으로 끝을 낼 겁니다. 어차피 미 정부도 메데인이 완전히 무너지는 건 바라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블랙마켓이 너무 분산되기 때문이죠.”
차라리 덩치 큰 녀석 하나를 앞장세워 검은 시장을 통제하는 게 미 정부로서는 편하다. 그래서 전 세계 마약 시장을 점령하고도 메데인이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메데인이 사라지고, 크고 작은 조직들이 우후죽순 늘어난다면?
그들을 전부 통제하기란 절대 쉽지 않을 일이다.
“워커가 도와준다면 나야 고맙지. 그런데 왜 나를 도와주는 거지?”
“당연한 일이지 않나요?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와 친분을 쌓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설마, 카포가 되고 나서 절 모른 척할 생각이세요?”
로이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그럼, 어서 준비하세요. 미 정부가 파블로를 잡게 되면 왕좌를 쟁탈하기 위해 여러 두목이 날뛰기 시작할 거예요. 만약 그때 로이가 주도권을 잡지 못하면 전부 헛수고라는 거… 명심하세요.”
내 말에 로이도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지금부터 준비하면 되겠지. 어차피 나 말고는 누구도 카포가 붙잡힐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말 한번 잘했다.
메데인 카르텔은 거대 조직이다. 당연히 파블로 에스코바르 밑으로 여러 두목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파블로를 암살하기 위한 시도를 했으나, 그때마다 실패해 모두 제거당했다.
그렇게 해서 파블로 에스코바르 중심의 메데인 카르텔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재산만 무려 500억 달러에 이르는 마약의 황제.
로이가 그 자리에 앉게 된다면 난 든든한 아군을 얻게 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용병을 동원해서라도 도움을 드릴 테니까.”
“용병…? 그건 사양할게. 용병은 절대 메데인을 건드리지 않아. 차라리 너만의 세력을 만들어서 날 도와주는 게 훨씬 나을 거야.”
원하는 답이 나왔다.
나도 용병들이 메데인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난 짐짓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세력이라…. 그렇다는 건, 저만의 조직을 만들어 놔야 한다는 건데….”
“그렇지.”
“그럼, 로이. 절 좀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이쪽 계통에서는 로이가 프로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돈도 많은 분이 애들을 빌려달라는 건 아닐 테고…. 루트를 알려달라는 거야? 그럴 만한 약은 있고?”
로이는 내가 정부로부터 30톤가량의 마약을 챙겼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다.
“로이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요. 이번에 미 정부가 멕시코로 가져온 약이 총 50톤이잖아요?”
“그런데?”
“그중 20톤은 메데인에게 넘겼고, 나머지 30톤은 어디로 간지 아세요?”
로이의 표정이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설마….”
“그 30톤은 저한테 있습니다. 제가 동원한 용병들은 보셨을 거예요. 미리 사 놓은 창고에 쌓여 있죠.”
지금부터 내 함선에 승선할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로이는 박수를 치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대단해. 어떻게 꼬드긴 거야? 설마, 이번 콘트라 사건도 전부 네가 꾸민 짓이야?”
살짝 찔리긴 했지만, 난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
“하하. 그렇게나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지금 여기 있겠습니까?”
“그런가…. 아무튼, 그 정도 양이면 돈 좀 만지겠네.”
난 짙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 돈이 전부 제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습니다. 아무튼, 도와주실 겁니까?”
로이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내가 너 보면서 항상 생각하는 게 뭔지 알아? 넌 나이에 맞지 않게 생각하는 거랑 보는 눈이 너무 넓다는 거야.”
“음…. 그건 제가 소름 끼쳐서 싫다는 겁니까?”
“하하. 소름 끼치는 건 맞는데, 너 같은 사람은 적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거지.”
그는 내게 잔을 하나 건네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진짜 같이 동업을 하는 거네, 파트너?”
그 잔을 받으며 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리틀 보스라 부르지 않기로 한 겁니까?”
“하하. 그렇게 불러 주길 원한다면 리틀 보스라고 부르지 뭐.”
“그냥 파트너가 나을 것 같네요.”
나는 미래에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가 될 사람과 손을 맞잡았다.
* * *
나는 멕시코까지 직접 날아가 콜리나스 드 산타페 지역을 탐방했다. 그곳에서 헐값을 주고 사들인 창고를 이용해 미 정부에게 받은 마약을 저장해 놓았다.
이번 일을 맡게 된 강철중을 믿긴 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봐야 알 것 아닌가?
그리고 30톤의 마약이 창고에 쌓여 있는 그 진귀한 장면을 어찌 놓친단 말인가.
사실, 콜리나스 드 산타페에 마약을 저장했다는 소리를 듣고 거부감이 들었다.
이 지역은 무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로는 대량 암매장이 수시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경쟁 마약 조직이나, 마약 조직에게 돈을 받지 않는 세관원들…. 그리고 불법 마약 거래에 대해 폭로하는 언론인들까지 이곳 어딘가에 묻혀 있다.
주로 메데인이 그들을 살해한 것인데, 아주 간편한 방법을 썼다고 볼 수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좀 섬뜩한 곳이긴 하지만, 멕시코 정부가 전혀 터치를 안 하는 곳이라 마약을 저장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물론, 멕시코에 계속 이 마약을 놔둘 순 없다. 다른 마약 조직이 쳐들어와 마약을 뺏어 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정말이지…. 대단하네요.”
이 광경을 보고 감탄을 터트리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강철중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이 정도로 많은 양의 마약은 처음 보는 거라서요.”
“하하. 그거 아세요? 메데인 카르텔이 매달 10톤이 넘는 마약을 이곳 멕시코에 실고 오는 거. 그것도 비행기로 버젓이 마약을 나른다고 합니다.”
“멕시코 정부가 개판이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긴 했습니다. 그런데 매달 10톤이면… 좀 심했네요. 그 정도 양이면 멕시코인과 미국인 전부를 약쟁이로 만들 것 같은데….”
틀린 말이 아니다.
멕시코는 약을 평생 해 보지 않은 사람보다, 약을 해 본 사람이 더 많지 않던가?
그건 미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 그런데 사장님.”
“예?”
“회장님께 연락은 받으셨습니까?”
권용일?
“아니요.”
“그런가요. 이상하군요. 조만간 연락을 주신다고 했는데….”
“제가 멕시코로 날아오는 바람에 못 받은 걸 수도 있죠. 무슨 급한 일인가요?”
“그건… 음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뭐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팍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추궁해 봤자 저 무거운 입이 열릴 것 같진 않다.
권용일과 강철중이 내게 해가 될 만한 걸 꾸미진 않을 테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