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1)
처음에는 일주일이 흘렀다.
부시에게서 이렇다 할 연락은 없었다. 아무래도 상황을 더 지켜보겠다는 심산도 있고, 나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의심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의심이 곧 믿음으로 바뀔 것을 난 알고 있지 않은가.
-미 정부를 향한 이스라엘 정부의 항의.
-최고 동맹국 이스라엘이 이란과 미국의 무기 거래를 의심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뉴욕타임스의 첫 면을 장식한 뉴스.
이스라엘 정부가 미국 정부에 이란과의 밀거래를 추궁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부시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리고 미 정부도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그렇게 소란이 묻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주일이 더 흐르고 나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중령 올리버 노스 메일 공개.
-미 정부, 이란과 무기 거래 정황 포착. CIA를 통한 마약 거래까지 있었다!
됐다. 터졌다.
미국 최악의 스캔들로 기록될 콘트라 사건이 드디어 터진 것이다.
* * *
“올리버 노스와 메데인 카르텔, 그리고 리턴 컴퍼니까지. 이 셋을 한꺼번에 엮자?”
“그렇습니다, 대통령님. 이미 리턴 컴퍼니 쪽과는 이야기를 마친 상태입니다.”
레이건은 일주일 전보다 훨씬 더 안색이 나빠졌다.
처음 이스라엘 정부가 항의했을 때만 하더라도, 레이건은 원만하게 일을 풀어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니카라과 공화국의 지원을 도맡아 진두지휘하던 올리버 노스 쪽에서 사고가 터졌다.
이젠 정말 숨길 수도 없는 일.
여당에서도 이번 일로 소음이 나고 있었다.
그런데 부통령 부시가 한 가지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이 모든 일은 정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매듭을 지으면서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자는 것이었다.
“리턴 컴퍼니와는 언제 그런 협상을….”
“사건이 터지자마자 바로 그들에게 달려가 합의를 봤습니다. 그곳 주주들은 모두 동의를 했고요. 아마 그쪽 대표가 모든 책임을 지게 될 겁니다.”
“하지만… 만일 그 대표라는 사람이 청문회에 참석하고 입을 잘못 놀리기라도 한다면….”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통령님. 그 사람은 결코 청문회에 참석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올리버 노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통령 부시의 말에 레이건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 이내 음흉한 입가를 보였다.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하하. 역시, 부통령의 일 처리는 항상 빨라서 좋군요. 언제나 든든합니다.”
레이건의 흡족한 얼굴빛을 따라 부시도 함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비웃음을 가득 띠고 있었다.
일이 터지기 전, 부시는 레이건에게 미리 상의를 하려고 했었다. 리턴 컴퍼니를 통해 올리버 노스가 야당에서 보낸 스파이라는 것을 듣지 않았던가.
하지만 섣불리 이야기를 꺼낼 순 없었다. 만일 올리버 노스의 신분이 스파이가 아니라면 그땐 돌이키기 힘든 것도 있고, 어차피 터질 사건이라면 혼자 살 길을 열어 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통령님. 멕시코로 들여온 마약은 아무래도 빨리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메데인 카르텔과 리턴 컴퍼니에게 넘겨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야 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을 테니까요.”
“좋은 생각이군요. 하지만 무려 50톤에 달하는 약이지 않나요? 그 많은 걸 그들이 과연 사려고 할지…”
“아깝긴 하지만 빨리 처분을 하기 위해서는 헐값에 넘겨야 할 겁니다. 그래야 그들도 미끼를 물겠지요.”
“으음. 그건 부통령이 알아서 해 주세요.”
레이건은 그깟 마약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자신의 지위가 걸려 있는데, 그 마약을 팔아서 무슨 영광을 누리겠는가.
지금은 얼른 폭탄을 옆 사람에게 옮길 때다.
“제가 CIA 국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니, CIA 쪽도 제가 잘 해결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해 주니, 안심이 됩니다. 이번 일이 너무 커지지 않게 잘 해결해 봅시다.”
“예, 대통령님.”
부시의 대답에 레이건은 한시름 덜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에 반해 부시는 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 폭풍은 누구도 피하지 못할 터. 그렇다면 최대한 피해를 덜 받도록 해야 되지 않겠는가?
모든 비난의 화살이 어디로 쏟아지든 부시는 상관없었다. 단지, 그 불똥이 자신에게 튀지 않기를 바랄 뿐.
대통령실 밖으로 나온 부시는 마음을 정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뒤집을 수 없는 판.
그렇다면 자신에게 먼저 손을 건넨, 악마일지도 모르는 그 회사의 손을 잡으리라.
그들이 정녕 악마라고 할지라도…. 부시는 자신의 영혼이라도 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 나라의 최고가 될 수만 있다면…!
* * *
“대통령과는 협의를 끝냈네. 이제 자네 회사만 잘 움직여 주면 될 거야.”
콘트라 사건이 터지기 무섭게 부통령 부시는 날 백악관으로 불렀다. 이미 백악관 앞은 기자들이 지천으로 깔린 상태였고, 정부의 입장 발표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부통령님. 리턴 컴퍼니 대표 톰 윈스턴은 조만간 사고사로 기사가 나갈 겁니다. 그리고 톰 윈스턴이 올리버 노스와 일을 꾸몄다는 정황을 서류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런데… 올리버 노스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부시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죽여야지. 자살로 위장하는 게 훨씬 더 안정적이지 않겠는가? 유언장 하나 남겨 두고 가는 것도 그림이 좋아 보이고.”
올리버 노스에 대한 판결은 이미 끝난 상태인가.
“그럼, 그쪽도 제가 알아서….”
“아니.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하지. 배신자를 처단하는 일이지 않나?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순 없지.”
올리버 노스를 본보기로 삼겠다는 소리다.
뭐, 나야 일 하나를 덜었으니 땡큐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약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CIA 쪽에 내가 말을 잘 전달해 두겠네. 30톤가량을 자네에게 넘길 거야. 그때 대금만 잘 넘기도록 하게.”
“위치만 알려 주시면 우리 회사 쪽 용병들이 이동할 겁니다. 그때 잘 운반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부시는 부통령이 되기 전에 CIA 국장직을 맡았던 사람이다. 그 말은 CIA에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시라면 잡음 없이 CIA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이제 바쁘게 움직여야겠군. 곧 대변인이 백악관의 입장을 발표할 거라서.”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 모든 건 대선을 위한 일이지 않습니까?”
어두웠던 부시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 그렇군.”
대통령의 자리.
그것도 세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이지 않은가.
진실로 세계 최강의 일인자가 될 기회다.
이런 자리를 누가 과연 놓치고 싶겠는가.
부시의 야망이 벌써 뜨겁게 움직이고 있음을 난 느낄 수 있었다.
* * *
“강철중 씨. 저번에 말씀드린 용병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콜만 내리시면 바로 동원할 수 있습니다. 대신, 그쪽에서 요구한 금액이 좀 됩니다.”
“얼마 정도?”
“300만 달러입니다.”
꽤 비싼 값이다. 하지만 들인 만큼의 일을 해 준다면 전혀 아깝지 않다.
“꽤 많은 인원이 필요할 겁니다. 그 정도 값어치는 하겠죠?”
“물론입니다, 사장님. 아는 인맥을 통해서 얻은 용병 집단이니, 뒤통수를 치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이 CIA와 메데인과도 관련이 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뒤통수를 치고 싶어도 그럴 엄두가 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됐다.
강철중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믿어 줘야지.
“톰 윈스턴… 아니지. 존 반디에 대한 건은 지금 당장 해결해 주세요.”
강철중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철저하게 해 놓겠습니다.”
나는 이번엔 김아름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번에 말씀드린 서류는요?”
“준비는 다 끝냈습니다. 위장 사무실에 존 반디의 명패와 이번 니카라과 공화국에 관련된 서류들을 전부 넣어 두었습니다.”
콘트라 사건이 터지기 전, 나는 김아름에게 서류 위조를 부탁했다.
니카라과 공화국에 있는 콘트라 반군과의 마약 거래를 주로 삼아 만들어 둔 서류다.
곧 있으면 콘트라 사건을 파헤치기 위한 특검이 생긴다. 하지만 리턴 컴퍼니는 어차피 유령 회사이지 않은가?
아무리 깊이 파려고 해도 나오는 건 없을 것이다.
물론, 내 신분이 탄로 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서류에는 내 이름이 단 한 자도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만에 하나 내 신분이 드러난다고 해도 그건 부시가 직접 막아 주어야 할 일이다.
어차피 이번 특검은 설렁설렁하다 끝내게 된다. 대통령의 입김은 아직 살아 있으니까.
그저 나는 각본대로, 존 반디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는 서류만 특검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인 역할을 할 올리버 노스와 존 반디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콘트라 사건이 지나가면 다들 아시다시피 미국 대선입니다. 그때 김아름 씨는 부통령 부시의 선거 캠페인을 돕도록 하세요.”
“…예?”
저토록 당황한 표정을 짓는 김아름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하긴. 워낙 뜬금없는 제안이니 그럴 만도 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말을 해 둘 걸 그랬나?
“우리 리턴 컴퍼니는 전적으로 부시를 도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킹메이커가 될 겁니다.”
“하, 하지만 사장님. 이번 사건이 터지면 부시는 당선될 가능성이 거의 없을 텐데요?”
우려의 목소리가 먼저 나온 것은 김아름이 아닌 강철중이었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콘트라 사건이 터지면 여당에 얼마나 큰 파장이 일지.
여론은 분명 침을 뱉고 돌아선다는 것까지도.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사장님. 이 사건이 터지면 부통령 부시도 함께 매장될 겁니다.”
올리버 노스와 존 반디 그리고 메데인 카르텔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운다고 해도, 레이건 대통령이 언론의 화살을 피해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최악의 상황만은 면한다는 것이 이번 작전의 목표이지 않은가?
더불어 나는 무려 30톤에 달하는 마약을 팔아 엄청난 차익을 챙긴 다음, 그 돈으로 부통령 부시를 도울 것이다.
“전 절대 지는 게임은 하지 않습니다. 항상 그랬듯, 이번에도 우리가 이길 겁니다.”
“하지만….”
“강철중 씨. 저번에 그러셨잖아요. 제 말이라면 서쪽에서 해가 뜬다 해도 믿겠다고.”
강철중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여러 차례 내 예언이 적중하지 않았던가?
이제까지 모든 일이 다 그랬다.
무슨 말을 해도 믿겠다고 한 건 강철중이니, 그는 조용히 내 뜻을 따를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내가 맞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리라.
“김아름 씨도 여전히 절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전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다만, 사장님의 명령이라면 따를 뿐이죠. 전 사장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부통령 부시와는 이야기가 끝나신 건가요? 동양인 여자가 갑자기 선거 캠페인에 나타나면 이상하게 볼 텐데요.”
“그건 염려마세요. 김아름 씨가 전면으로 나설 일은 없을 겁니다. 그저 제 말만 부시에게 잘 전달해 주시면 됩니다.”
김아름을 전면에 내세울 생각은 없다.
앞으로도 나와 함께 같이 리턴 컴퍼니를 이끌어 갈 사람이지 않은가?
비록 이번 일로 리턴 컴퍼니가 소각되긴 하겠지만, 서류상 회사는 금방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김아름이 전면으로 나서게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리 애트워터의 자리를 김아름이 대신 꿰차고 들어가, 그녀가 주목을 받게 되면…. 리턴 컴퍼니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를 백악관에 깊이 투입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사람 마음이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법.
그녀가 더는 리턴 컴퍼니에서 일하지 않고, 백악관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면 난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지 않은가?
“그럼, 다 정해졌네요. 어서들 움직여 주세요. 콘트라 사건이 크게 터지기 전에 다 마무리를 지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