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한 번밖에 없는 기회 (2)
“킹메이커? 지금 그게 뭔지 알고 말하는 건가?”
킹메이커. 바로 왕을 만드는 자를 뜻한다.
부통령 부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리 애트워터의 별명은 킹메이커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제거하면서, 부시는 나의 도움이 아니면 절대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위치에 섰다.
“알고 있습니다, 부통령님. 그리고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도요…. 원래 일이 잘만 풀렸다면 부통령님은 자연스레 차기 대통령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두 놈이 배신을 때린 덕분에 우리가 위기에 빠진 꼴이지 않습니까?”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올리버 노스가 정말 우리를 배신했다고 볼 수 없어.”
부시는 아직도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며칠만 있어 보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곧 있으면 이스라엘 정부가 정식으로 미 정부에게 항의를 하기 시작하고, 올리버 노스의 이메일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다.
“부통령님. 며칠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벌써 레바논 언론에서, 미국이 이란과 무기 거래한 사실을 매일 퍼뜨리고 있어요. 또한, 이스라엘은 미 정부에 해명하라는 요구를 하게 될 겁니다. 이건 절대 우연으로 일어나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야당에서 철저히 기획한 일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올리버 노스와 리 애트워터가 야당의 끄나풀이라는 걸 부시가 믿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야당이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다는 걸 믿게 만들어야 한다.
“자네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진실은 곧 밝혀질 겁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일단 제 계획만 들어 보시고 일이 터졌을 때 제가 귀띔을 드린 대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어느 정도 여유를 줘야 한다. 강압적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며칠만 있으면 부시는 믿고 싶지 않아도 나를 믿게 될 것이다.
“일단, 자네의 의견을 들어나 보지.”
부시가 경청의 자세를 취하니, 나도 좀 여유가 생겼다.
이제 이 양반을 구워삶아 내게 꼬리를 살랑이게 만들어야겠다.
“우리 회사의 판단으로는 이미 늦었습니다. 콘트라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대의 스캔들로 기록이 될 겁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 일로 탄핵이 될 수도 있어요. 한 마디로 보수 정당의 종말이 되겠지요.”
부시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콘트라 사건이 국민들에게 알려진다면 그 폭주하는 비난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미 정부가 마약까지 거래했다는 걸 알게 되면 미국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막아야 해. 절대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돼!”
“부통령님. 송구하지만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미 늦었습니다. 콘트라 사건이 터지는 건 시간문제에요.”
“이보게!”
“대신!”
언성을 높이려고 하던 부시는 내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난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대신…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시는 목이 탔는지 잔에 술을 따라 놓고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넥타이까지 풀어헤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모든 정치인이 하는 일을 똑같이 하시는 겁니다. 모든 건 국가를 위한 일이었고,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마약 거래를 비롯해 불법으로 무기를 거래한 건 정부에서 승낙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발표를 하는 겁니다.”
“말이야 쉽지. 야당에서 그걸 받아들이겠는가? 언론은 또 어떡하고? 분명 특검까지 만들려고 할 거야.”
저 말이 맞다. 실제로 콘트라 사건이 터지고 레이건 대통령은 탄핵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발 빠른 대처 덕분에 탄핵으로 가는 최악의 사태는 막는다.
그 발 빠른 대처가 뭐냐고?
내가 말한 그대로다.
모든 정치인이 하는 것.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정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꾸민 일. 우린 아무 잘못도 없다.’
어느 국가나 똑같다.
모두 궁지에 몰리면 저런 말을 내뱉는다.
사람들은 뻔뻔하다고 손가락질하지만, 저것만큼 뛰어난 처세술이 또 없다. 그리고 항상 먹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레이건 정부는 진짜 저 방법으로, 콘트라 사건을 올리버 노스의 단독 범행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메데인 카르텔도 함께 엮어 천하의 나쁜 놈으로 만들어 버린다.
덕분에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 파블로 에스코바르만 미국 정부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부통령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야당이 모든 걸 기획했으니,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하겠죠.”
지금 내가 부시에게 알려 주고 있는 방법은, 저들이 내 도움 없이도 조만간 하게 될 일이다. 하지만 난 여기서 조금 조미료를 추가하려 한다.
한층 더 내게 이득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올리버 노스와 메데인 카르텔, 그리고 저희 리턴 컴퍼니를 희생양으로 삼으신다면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리턴 컴퍼니? 자네도 희생양이 되겠다고?”
난 짐짓 미소를 띠며 부시에게 말했다.
“아뇨. 제가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리턴 컴퍼니의 대표, 톰 윈스턴을 희생양으로 삼을 겁니다.”
“이, 이보게! 지금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자네 회사 대표를….”
“부통령님. 우리 회사는 대표 하나 갈아 치우는 건 일도 아닙니다. 대표는 그저 대표일 뿐, 실질적으로 회사를 움직이는 건 주주들이지 않습니까?”
부시는 영리한 사람이다. 그는 금방 내 말을 알아들었다.
“처음부터 희생양으로 세운 건가? 그 대표라는 사람.”
“그건 아닙니다, 그저 이런 경우를 대비했던 거고 대표라는 존재는 항상 그런 법이죠. 거기다가 우리 회사는 페이퍼 컴퍼니지 않습니까? 그깟 회사 하나 없앤다고 우리 회사의 실체가 사라지진 않습니다. 주주들 또한 그대로일 겁니다.”
“알면 알수록… 그 회사의 정체가 뭔지 궁금하구먼.”
올리버 노스와 리턴 컴퍼니의 대표를 동시에 엮어 희생양으로 삼는다.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올리버 노스는 알아서 정부의 희생양이 되긴 한다. 왜냐하면, 그가 청문회에 참석하고 모든 것을 뒤집어쓴 채 감옥에 갇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그런 전개를 원하지 않는다. 난 올리버 노스를 제거할 생각이다.
“이번 사건이 언론에 공개되는 순간, 우리 회사에서 두 사람을 제거할 겁니다. 한 명은 자살, 다른 한 명은 사고사. 어떻습니까?”
부시는 음흉한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올리버 노스가 유언장을 남기겠군. 모든 게 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예. 돈에 눈이 멀어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 해야죠. 그럼, 적어도 부통령님이 감옥에 가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윈스턴 대표도 죽어 버렸으니 더 이상의 조사도 힘들 테고요. 그리고… 지금 보수 정당의 힘이라면 특검은 조용히 마무리 짓지 않겠습니까?”
야당에서 항의를 해 특검이 발의되긴 하지만, 레이건 정부의 압박으로 특검은 설렁설렁 일을 마무리 짓는다. 공권력에 끼치는 보수 정당의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부시도 올리버 노스와 리턴 컴퍼니의 대표가 죽는다면, 특검을 잠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야. 차기 대선은 어떻게 할 건가?”
레이건이 탄핵이 되든 되지 않든, 부시에게 중요한 건 차기 대선이었다.
콘트라 사건이 터지면 올리버 노스와 메데인 카르텔 그리고 리턴 컴퍼니에 전부 뒤집어씌운다고 해도, 보수 정당을 향한 여론은 차갑게 변할 것이다.
그럼, 그건 곧이곧대로 투표에 영향을 끼친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부시가 대통령이 될 가망성이 사라지게 된다.
지금 그는 그걸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난 그런 그의 걱정을 환영한다. 그것도 아주 격하게!
“부통령님.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리턴 컴퍼니는 부통령님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부통령님을 도울 생각입니다.”
“그 말은….”
“저희와 손을 잡으신다면 부통령님은 반드시 차기 대통령이 되실 겁니다. 물론, 여론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게 변한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콘트라 사건이 터지고 나면, 부통령님은 절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올 테니까요.”
부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여론 조사를 완전히 신뢰할 순 없지만, 그 격차가 심하면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잠시 깊은 고심에 빠지더니, 이내 숨을 크게 뱉으며 내게 물었다.
“내가 뭘 하면 되겠는가?”
이제야 대화가 이어지는 것 같다.
“최대한 콘트라 사건의 피해를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가장 급한 건 멕시코로 들여온 마약입니다.”
“아!”
잠깐 잊고 있었는지 부시는 격한 신음을 터트렸다.
마약. 그게 걸리면 모든 게 끝장이라는 것을 아는 거다.
“니카라과에서 가져온 마약만 해도 50톤이야. 그 많은 걸 어떻게….”
“딱 하나 방법이 있습니다.”
부시는 눈을 반짝이며 내게 몸을 기울였다.
“그게 뭐지?”
“모든 걸 메데인에게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그 마약은 정부의 것이 아니라 메데인 카르텔 거라고.”
“그런데 지금 마약을 소유하고 있는 건 메데인이 아니라 CIA이지 않나?”
“그러니까 그걸 메데인에게 파셔야 하는 겁니다. 헐값이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50톤 중에서 20톤을 메데인에게 넘기세요.”
“헐값은 둘째 치고…. 20톤만? 나머지 30톤은?”
부시는 그 많은 마약이 헐값에 넘겨지는 건 중요하지 않은 상태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불을 꺼야 하니까. 그러나 20톤만 넘기라는 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바로 여기다.
내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이 두뇌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됐다.
“나머지 30톤은 저희 리턴 컴퍼니에게 넘겨 주십시오.”
“뭐라고? 곧 있으면 리턴 컴퍼니는 사라진다고 하지 않았나?”
“서류상으로만 사라질 뿐, 실체는 여전합니다.”
부시는 조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메데인과 마찬가지로 그걸 헐값에 살려고? 설마 자네는 이 기회를 노렸던 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
충분히 이해가 된다. 나라도 저런 눈빛을 띠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 사람의 의심이 맞다.
난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접근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걸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지.
“부통령님의 말씀대로 30톤에 달하는 마약을 저희 리턴 컴퍼니에서 헐값에 사드린 다음, 그걸 다시 마켓에 풀어 큰 이득을 챙길 겁니다.”
“뭐야? 설마 네놈들 짓이었냐?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어!?”
“마약으로 돈을 벌려던 건 맞습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죠.”
“시끄러워! 너 같은 놈들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이건 명백히 내 실수로군! 네놈들을 내가 가만히 둘 거 같아? 다 끝났어. 당장 내 방에서 나가!”
난 버럭 화를 내고 있는 부시에게 슬며시 미소를 보였다.
“부통령님. 이건 우리 회사의 이익 때문이 아니라, 바로 부통령님을 위한 일입니다. 그래도 절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십니까?”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가슴은 쿵쾅쿵쾅 뛰고 있었지만, 난 최대한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상대가 내 포커페이스에 말려 주기를 바라면서….
그 여유로움에 부시가 속아 넘어간 것일까.
그는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아 술잔을 들이켰다.
“…그게 무슨 말이지?”
좋다. 입질이 왔다.
“대선을 치르시기 위해서는 막대한 선거 자금이 필요하실 겁니다. 그런데 콘트라 사건이 터지고 나면 과연 누가 부통령님을 도울까요?”
부시는 말문이 막혔다. 그만한 사건이 터졌는데, 과연 누가 보수 정당을 도와 대선까지 지지해 준단 말인가.
바로 이런 약점을 난 파고들려는 것이다.
“하지만 저희 컴퍼니가 마약으로 창출하는 이익을 모아 전부 부통령님을 위해 사용한다면 어떻습니까?”
“뭐, 뭣?!”
이제야 부시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선이 시작되면 우리 회사에서 가지고 있는 정보를 전부 풀어낼 겁니다. 상대 후보의 약점들. 이미 저희에게 상대 후보들을 날려 보낼 수 있는 데이터가 있습니다.”
“저, 정말인가?”
“예. 그게 터지면 부통령님은 자연스레 당선되실 겁니다. 아무리 격차가 넓어도 절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격차는 저희가 줄여 드릴 테니.”
상대 후보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 난 그게 뭔지 잘 알고 있다.
딱히 우리 회사가 그러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 약점들이 사실은 진짜 약점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언론의 무서운 점은 바로 이것이다.
사실이 아닌 걸 마치 사실인 것처럼 계속 퍼뜨린다면 그건 곧 진실이 된다.
리 애트워터가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상대 후보들을 무참히 격퇴했다. 난 그 공략을 똑같이 따라 쓸 생각이다.
이미 애트워터는 내 손에 제거됐다. 그리고 그의 업적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 말은 곧, 부시를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 도대체 자네 회사는 어떻게 된 회사인가? CIA에서도 알아차리지 못한 걸 어떻게 그쪽 회사가….”
부시는 조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당연히 CIA는 이번 일의 내막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콘트라 사건이 언론을 통해 폭로된다는 것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다.
올리버 노스가 실수로 메일을 잘못 보내면서 사건이 공개되지 않던가? 난 그런 실수를 마치 올리버 노스가 일부러 그런 것처럼 꾸몄을 뿐이다.
아무리 CIA라도 인간의 실수를 예측할 순 없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부통령님. 저희 회사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그런 회사가 될 겁니다. 그리고 리턴 컴퍼니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연 누가 부통령님의 킹메이커가 될 수 있는지가 중요하겠지요.”
이제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부시는 여기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과연 나의 손을 잡고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나와 함께 공멸할 것인가.
“이번에도 자네의 말을 한 번 믿어보도록 하지.”
그리고 부시는 당연하게도 내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