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한 번밖에 없는 기회. (1)
때를 기다린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급히 움직인다고 해서 바뀔 일도 없다. 그저 지금은 고요한 연못처럼 잔잔하게 기다릴 뿐이다. 천사의 발끝이 닿아,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연못으로 바뀔 그 날까지.
그전까지는 나름 취미를 즐길 생각이었다.
“정말… 여기를 들어갈 생각이십니까?”
“하하. 왜요?”
“이건 제가 지켜드리지 못할지도….”
강철중은 마른침을 삼킬 정도로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켜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약한 모습까지 보인다.
백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지금 내가 들어가려는 곳은 바로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콘서트장이니까.
앞으로도 수많은 콘서트가 열리지만, 마이클 잭슨의 콘서트장 분위기를 뛰어넘을 가수는 아무도 없다. 그만큼 마이클 잭슨은 살아 있는 전설이고, 죽고 난 후에는 정말 전설이 된다.
팝의 황제, 음악의 신이 바로 마이클 잭슨이지 않던가?
그리고 나는, 한 번 들어가면 밟혀 죽을 수도 있다는 마이클 잭슨의 콘서트장으로 들어가려 한다. 실제로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인파에 밀려 큰 부상을 당하는 사례가 상당히 많다. 그리고 마이클 잭슨의 파워에 압도되어 기절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기대되지 않습니까? 살아 있는 팝의 황제를 만나러 가는 일이잖아요. 전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사장님께서 팝송을 좋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마이클 잭슨은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으니까요.”
이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마이클 잭슨의 인기는 조용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80년대를 휩쓴 조용필의 인기가 무색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판매량을 올리지 않았던가.
그게 바로 마이클 잭슨의 전설적인 명반이자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Thriller다.
나중에 마이클 잭슨이 죽고 나서 알려진 내용이지만, 그는 항상 Thriller를 뛰어 넘는 음반을 내놓고자 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Thriller는,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깰 수 없는 기록으로 남게 된다.
“제 생에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라이브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얼른 보고 싶네요.”
“그럼, 모시겠습니다.”
나는 vip 티켓을 구입해서 콘서트 가장 앞자리를 맡아 두었다. 말이 앞자리지, 의자 하나 없는 스탠딩 콘서트장이다. 하지만 마이클 잭슨의 콘서트를 감히 앉아서 볼 순 없지 않은가.
나는 팔팔하게 뛰어다닐 여성 팬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미리 몸을 풀어 두었다. 그리고 강철중은 벌써 저 끝까지 모여 있는 인파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이 양반, 엄청 피곤한 하루가 될 것이다.
* * *
콘서트가 성황리에 끝나면서 나는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그 화려한 몸놀림을 잊을 수가 없다. 역시, 왜 마이클을 팝의 황제라고 하는지 이해가 된다.
DVD로 보는 것과 실황의 간극이 상당히 크다는 걸 오늘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나는 나보다 더 흥분해 펄쩍펄쩍 뛰던 강철중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생각 이상으로 잘 노시던데요?”
“하하. 그, 그게….”
내 비꼬는 말투에 강철중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 사람도 마이클 잭슨이 내뿜는 기운에 압도되어 정신줄을 놓은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농담이에요. 어차피 오늘은 즐기러 온 거 아닙니까? 가볍게 맥주나 한잔할까요?”
나는 강철중과 밖으로 나와 호텔에 있는 칵테일 바에 들어갔다.
맥주를 마시려고 했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먹음직스러운 칵테일들이 눈에 띄었다. 결국, 나는 레인보우를 고르고 강철중은 블루 비치를 골랐다.
둘 다 즐겨 마시는 걸 고른 것이었다.
“미국에 사신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사는 건 아닙니다. 대신, 왔다 갔다 한지는 오 년 정도 됐습니다.”
“오 년이요? 생각보다 더 오래 있으셨네요.”
나는 알록달록한 칵테일을 짧게 들이켠 다음, 조심스레 강철중의 신상을 조사해 보았다.
“미국에서 무슨 일을 하셨던 겁니까? 처음부터 화진파를 위해 일하셨던 건 아닌 것 같고….”
“하하. 오늘이 그날이군요. 서로에 대해 털어놓는….”
“아아. 혹시라도 부담되신다면 괜찮습니다.”
강철중도 블루 비치를 한 모금 마신 다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사장님과 함께하려면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좋겠죠.”
이 사람은 확실히 내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유대감이 쌓였다는 걸까?
“돼지 부대라고 아십니까?”
돼지 부대라면….
“알고 있습니다. AIU를 말씀하시는 거죠?”
강철중은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모르시는 게 없군요. 맞습니다. 제가 그쪽에 있었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거친 곳에서 생활했다.
AIU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특작부대이다. 본래는 HID라는 곳으로….
극한의 훈련을 견디고 주민등록번호를 비롯해 존재 자체를 이 나라에서 없애 버린다. 그래야 북한에게 걸리더라도 정부에서는 깨끗이 손을 털 수 있으니까.
말이 특작부대이지, 실상은 인간 취급도 해 주지 않고 극한의 훈련만을 시킨다. 덕분에 특작부대 요원들은 인간 살상 무기가 되지만, 그만큼 훈련 중에 죽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인간 대우를 못 받으며 훈련을 받는 터라 나중에는 보상 문제로 정부와 소송까지 가게 된다.
공식적으로는 DIC로 변경되었던 곳이 사라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21세기에도 은밀히 운용 중이지 않냐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북한처럼 겉으론 사라졌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계속 양성을 해 간다는 것.
“그런데 어떻게 나오신 겁니까?”
“탈영했습니다. 거기 있는 소대장을 쏴버리고 나왔죠.”
“…예?”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건가?
“탈영했습니다.”
“정말입니까? 그게 가능하긴 합니까?”
“하하. 북한에서 넘어오는 놈들도 있는데, 고작 설악산에서 탈출하는 게 힘들겠습니까? 대신, 그 일로 인해 쫓겨 다니긴 했습니다.”
대충 퍼즐이 맞춰진다. 설마, 권용일이 강철중의 탈출을 도운 것인가?
“그렇다면 큰 형님이 강철중 씨를….”
“예. 우연히 인연이 닿아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죽은 것처럼 위장도 시켜 주시고, 새 인생을 살도록 신분도 만들어 주셨죠.”
이 사람이 권용일에게 보이는 충성심의 정체가 뭘까 항상 궁금했는데, 이것 때문이었나.
“저는 앞으로도 계속 사장님을 도울 겁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회장님에게 피해가 가는 일을 시키신다면….”
난 강철중의 말을 잘라버렸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오늘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 잘했다.
사람 일이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은 권용일과 내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좀만 일이 수틀리면 언제 둘 다 칼을 뽑아 들지 모르는 일.
그땐 강철중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아니면….
미리 제거하거나.
“저도 그건 믿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사장님을 유독 아끼시니까요. 그리고 사장님 곁에 있어 보니, 왜 그러시는지 알 것 같더군요.”
“하하. 강철중 씨에게 그런 칭찬을 다 듣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사장님. 회장님도 대단한 분이시지만, 사장님은 더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낯이 간지러웠다.
고작 이런 일에 존경을 다 받다니. 하지만 익숙해져야 한다.
난 더 이상 검사가 아닌, 악의 세계에서 사는 마피아이지 않은가?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악질이 되려 하는 마피아.
“앞으로 사장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믿기로 했습니다. 해글러와 무가비 전 때도 제가 사장님 덕분에 300만 달러나 벌지 않았습니까?”
그날 강철중은 날 믿고 1만 달러를 건 덕분에 300만 달러라는 거금을 챙겼다. 물론, 10%의 수수료를 빼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많은 금액을 번 것이었다.
“강철중 씨.”
“예, 사장님.”
이제 화제를 바꿀 때가 됐다.
“용병을 구입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용병이란 말에 강철중은 올 것이 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김아름 씨와 함께 용병을 알아보던 중이었습니다. 조만간 사장님께서 필요로 하실 것 같아서요.”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역시, 김아름과 강철중이 함께 일을 해 주니 나한테는 참 편하다.
“조만간 용병이 필요할 때가 올 겁니다. 메데인에게 손을 벌리기에는 꺼림칙한 일이라서요. 잘 알아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용병을 구한다라-.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곧 있으면 많은 용병이 필요할 것이다.
니카라과 공화국에서 멕시코로 이동 중인 마약을 전부 관리하려면 인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 * *
레바논에 있는 인질들이 풀려나면서 레바논 언론은 미국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이란과 미국 사이에 무기 거래가 있었다는 것과 그 대가로 인질들이 풀려났다는 의구심을 제기한 것이었다.
아직 반응이 미미하긴 하지만, 조만간 이스라엘 정부 측에서 강력히 반발하고 나서게 될 것이다. 도미노처럼 여파가 퍼져 미국도 영향을 받게 될 테고….
그러면 게임 끝인 거다. 그전에 얼른 일을 해치워야 한다.
난 때가 왔음을 느꼈다. 이제 콘트라 게이트가 터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발 빠르게 움직여 부통령 부시와 약속을 잡았다.
“니카라과 공화국에서 소식이 왔더군. 정말 메데인 카르텔이 우리 CIA와 협력해, 그 많은 양의 마약을 옮길 줄이야. 페이퍼 컴퍼니라고 무시할 게 아니야.”
부통령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며 매우 기뻐했다.
레바논에 있는 인질들도 풀려나고, 이란에게는 세 배가 넘는 값으로 무기를 팔아 돈도 번 상태이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몇 주만 지나면 저 웃는 면상이 울상으로 변하게 된다.
“곧 있으면 멕시코로 약들이 이동하겠군요.”
“잘 알고 있군. 일주일 후에 멕시코로 전부 들어오게 될 거야.”
부시는 그 약들이 고스란히 미국 국민들에게 넘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뻔뻔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치꾼들이야 국민의 삶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들이 원하는 건 국민들이 던지는 표일 뿐. 그 외의 것은 바라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이런 도둑놈 마인드는 어느 나라나 똑같다.
“부통령님.”
“말하게.”
“저번에 리턴 컴퍼니가 왜 이 일에 끼어들었냐고 물으셨죠?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인데 말입니다.”
좀 뜬금없는 말이긴 했지만, 부시는 흥미를 드러냈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그게 궁금했던 차였어. 이제 말해 줄 때가 되었나 보지?”
“예. 이제 속 시원히 말씀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아마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도, 그 웃는 얼굴이 계속될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조만간 콘트라 반군 사건이 밖으로 새어 나가게 될 겁니다.”
“…뭐?”
“엄청난 스캔들이 터지겠죠. 레이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추진되고, 이 일의 중심이 된 올리버 노스는 구속되어 재판을 받게 될 겁니다. 아마 부통령님도 조사를 받으실 겁니다.”
“자,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당황한 부시는 목소리까지 떨며 내게 물었다. 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리 애트워터를 아십니까?”
“애트워터? 그 사람이라면….”
아직은 애트워터를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정식으로 부시의 선거 캠페인에 참가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선거 운동 전략가로, 원래대로라면 다음 대선 때 당신을 돕겠다며 자청했을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실 야당에서 준비한 스파이라는 걸 아십니까?”
“스, 스파이!”
“예. 거기다가 올리버 노스도 사실은 야당에서 보낸 스파이입니다. 이 둘이 서로 합작해 일을 벌인 거지요. 제 말을 못 믿으시겠다면 며칠만 기다려 보세요. 올리버 노스가 안보 위원장에게 보낸 메일이 언론에 퍼지게 될 겁니다.”
리 애트워터와 올리버 노스는 사실 스파이가 아니다. 그냥 내가 전부 꾸며내는 이야기일 뿐. 하지만 올리버 노스의 메일이 곧 언론을 통해 공개된다는 건 사실이다.
부시는 손을 벌벌 떨며 물컵을 들이켰다.
“서, 설마…. 지금 내게 장난을 치는 건….”
“부통령님. 지금 제가 장난치는 거로 보이십니까?”
위압적인 내 목소리에 부통령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일단, 리 애트워터는 우리 회사에서 은밀히 제거했습니다.”
“뭐, 뭣이!”
“올리버 노스도 제거하려 했지만, 워낙 경계가 철저해서요. 아마 우리 쪽에서 손을 쓰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것 같더군요. 하지만 올리버도 꼭 제거해야 합니다.”
청부업자들에게 돈을 뿌린다면 올리버 노스를 죽이는 일이야 어렵지 않을 터. 하지만 지금은 올리버 노스가 살아 있어야 한다. 그의 메일이 공개되어 콘트라 사건이 밝혀져야 하니까.
메일이 발견되는 즉시, 올리버 노스도 제거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청문회에서 리턴 컴퍼니와 내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자네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그 두 놈은 기필코 죽여야 해! 그리고 이 일이 커지기 전에 손을 쓰지 않으면….”
부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번 일이 터지면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난 그를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혔다.
“부통령님. 일단,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이 일은 오히려 당신에게 기회가 될 겁니다.”
씩씩 숨을 몰아쉬던 부시는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자리에 앉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부통령님. 부통령님의 목표는 결국 백악관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부시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니라고 부정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 않은가.
이제 내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제안을 꺼낼 때가 되었다.
“저는 당신의 킹메이커가 되기 위해, 이 모든 걸 각오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