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죽여야 산다 (4)
2억 달러.
이런 터무니없는 금액을 로페즈에게 당당히 요구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2억 5,000만 달러로 갚아주겠다고 한 건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왜 2억 달러인가?
콘트라 사건이 터지고 나서 백악관은 CIA를 통해 소유하고 있는 마약을 빨리 처분해야 했다. 무려 50톤에 육박한 코카인이지 않던가.
그들은 결국 완전히 헐값에 코카인을 팔아넘기기로 결정한다. 그만큼 사안이 매우 중대하기 때문이다.
당장 레이건 대통령의 탄핵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마당에, 그 많은 양의 코카인이 발견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빼도 박도 못하고 레이건은 감옥에 들어가 평생을 썩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많은 양의 마약을 헐값으로 메데인에게 넘긴다.
1톤 당 1억에서 2억 달러의 가치가 있는 코카인을, 50톤에 7억 달러라는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메데인에게 넘긴 것이다.
그리고 메데인은 그걸 고스란히 미국 국민에게 뿌린다.
이 일을 계기로 미 정부는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 파블로 에스코바르에게 원한을 갖고 그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을 펼친다.
맘 같아서는 7억 달러로 50톤에 달하는 코카인을 전부 인수 하고 싶지만, 그럴 순 없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은 1억 달러가 좀 넘는 정도.
로페즈가 2억 달러를 넘겨 주면 총 3억 달러로 50톤에서 절반 정도 되는 코카인을 가져올 생각이다.
“백악관에서는 이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심히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알고 계셨겠지요?”
“그건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그들이 뭔 짓을 꾸밀지 매우 궁금했던 차였지.”
“예. 그래서 저희는 백악관에게 이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백악관은 그 의견을 채택했지요.”
“그게 뭔지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
더는 로페즈에게 숨길 필요가 없다. 우린 서로 계약을 한 사이니까. 하지만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일단, 계약서에 사인부터 해야겠죠?”
“아아. 이런. 제가 너무 서둘렀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변호사가 올 겁니다.”
로페즈의 말대로 변호사는 금방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거리낌 없이 우리의 대화를 전부 말해 주며 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다.
아무래도 변호사 중에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을 부른 모양이다.
“자. 이제 여기에 서명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제 궁금증도 함께 풀어주십시오, 미스터 김.”
“물론입니다, 로페즈.”
계약서를 확인해 보니, 그리 긴 내용은 아니었다. 나는 계약서에 얼른 서명을 한 뒤, 각각 한 장씩 로페즈와 나눠 가졌다.
이제 속 시원히 말을 해 줄 차례다.
“우린 이란에게 세 배가 넘는 가격으로 무기를 팔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로페즈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다.
“세 배요?”
“예. 세 배가 넘는 가격으로 이란에게 무기를 팔고, 그 돈으로 콘트라 반군을 도우라는 조언까지 했지요.”
“코, 콘트라 반군? 설마 니카라과를 말하는 겁니까?”
로페즈도 역시 갖고 있는 정보량이 상당하다. 니카라과 공화국에 있는 콘트라 반군을 알고 있다.
“맞습니다, 미스터 로페즈. 콘트라 반군은 친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단체입니다. 그리고 니카라과 공화국은 소련에서도 관심을 두고 있는 곳이지요.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로페즈는 침음을 짧게 내뱉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유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마약 때문이지. 그리고 니카라과가 사회주의를 유지하느냐, 아니면 민주주의가 되느냐가 관건이겠지요.”
“예. 맞습니다, 미스터 로페즈. 하지만 지금 미국이 관심을 두고 있는 건 마약이에요. 그걸로 운영 자금을 얻겠다는 거지요.”
미국도 그렇고, 소련도 관심을 두고 있는 게 바로 마약이다. 이들은 니카라과 공화국이 어떻게 되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품고 있는 코카인을 대량으로 얻을 수만 있다면….
두 국가가 충분히 욕심낼 만하다.
“그런데 2억 달러는 왜…?”
“그냥 만일을 대비하는 겁니다.”
“만일?”
“도박이랄까요? 제가 그런 쪽에는 재능이 있지 않습니까?”
내 말에 로페즈는 맞장구를 쳐 주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미스터 김이 하는 도박이라면 승률이 어마어마하겠군요. 이거, 나도 판돈 들고 끼어들어야 하는 건 아닐지….”
“원하신다면야 제가 루트를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로페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괜히 욕심내다가 험한 꼴을 보긴 싫군요.”
마피아치고 꽤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긴. 골든 마피아는 비즈니스로 성공한 곳이니까.
사업적인 마인드는 누구보다도 강할 터.
카지노를 운영하지만, 절대 도박은 하지 않는다는 저런 마인드가 골든 마피아를 더욱 부강하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우리 리턴 컴퍼니는 백악관과 협력해 메데인 카르텔을 끌어들여 마약을 운반하려고 합니다.”
“그럼 언론의 눈도 피할 수 있을 테니…. 아주 괜찮은 방법이군요. 근데 생각보다 리턴 컴퍼니의 영향력이 큰 것 같습니다. 메데인까지 움직일 줄이야.”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리턴 컴퍼니의 영향력은 상당히 큽니다.”
로페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건넸다.
“정보 고맙습니다, 미스터 김. 추후에도 업데이트를 할 수 있겠지요?”
나도 로페즈의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미스터 로페즈. 그리고 2억 달러는 추적에 걸리지 않게 주실 수 있겠지요?”
“그럼요. 조금 시일이 걸리긴 할 겁니다. 여러 나라를 거쳐야 해서요. 이런 일은 우리 전문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미스터 로페즈.”
지금 당장 2억 달러가 필요하진 않다. 아직 일이 터지려면 시간이 좀 더 남았으니까.
그동안 나는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 * *
“로이. 듣고 있습니까?”
내 설명을 듣고 있던 로이 루테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난 손가락을 튕기며 로이의 주의를 끌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가 내게 말했다.
“워커! 정말이야? 정말 50톤이라고?”
“예. 하실 수 있겠어요? CIA와 공동으로 움직여야 할 텐데….”
“CIA 나부랭이들은 크게 상관 안 해. 어차피 그놈들이랑 거래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CIA와 거래한 적이 또 있었던 건가.
하긴. 무기 거래부터 시작해 마약 거래로도 자금을 마련하는 놈들이니까. 메데인 카르텔이 엮여 있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가능하시겠습니까? 니카라과 공화국까지 가야 하는 수고도 있는데요.”
“50톤이라면… 가야지. 내가 안 가면 우리 카포가 날 죽일지도 몰라. 그리고 그사이에 빼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니카라과 공화국이라는 타지로 가야 한다는 게 좀 걸리긴 하겠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걸 로이는 잘 알고 있다.
이쯤 되면 넘어온 것 같으니, 나는 로이에게 한 가지 다짐을 받아야 했다.
“로이. 50톤 전부를 메데인이 당장 가지진 못할 거예요. 하지만 저와 협력한다면 50톤 전부를 메데인이 싼값에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50톤의 코카인이면 그 가치가 70억 달러야. 그걸 싸게 가져올 수 있다고?”
“예. 정확한 가격을 당장 추산할 순 없지만, 거의 절반 가격에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절반이라는 말에 로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 절반? 그거 진짜 대박인데?”
“그렇죠? 그러니까 저와 협력을 하시면 대박 한 번 터트려 드리겠습니다.”
내 제안을 로이가 절대 거절할 리 없다. 이런 제안을 거절하는 놈이 병신이지 않은가.
과연 그는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하하. 내가 워커의 말이라면 뭐든지 할게.”
이놈도 넘어왔군. 그럼, 이제 이놈 엉덩이를 걷어찰 일만 남은 건가.
“그럼, 어서 움직이세요. 늦기 전에 얼른 니카라과로 가셔서 일을 시작하면 됩니다.”
“아! 그래야지. 카포한테도 연락을 해서, 애들 좀 지원해 달라고 하면 해 줄 거야.”
로이가 말하는 카포라면 메데인 카르텔을 만든 파블로 에스코바르일 것이다. 그에게 용병 지원을 받는다면, 로이도 타지에 가서 일하기가 훨씬 수월할 터.
하지만 나중에 메데인 카르텔이 미 정부에게 뒤통수를 맞았을 때 로이의 입장이 어떻게 될지….
조금 안쓰럽긴 하다.
* * *
“사장님.”
강철중은 내가 묶고 있는 호텔로 찾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말씀하신 타깃을 바로 죽이면 될까요?”
타깃이라 하면 리 애트워터를 뜻한다. 내가 강철중에게 그를 죽이라고 의뢰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당장 죽이기보다는, 한 번 만나보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생포해서 데려올 수 있나요?”
그러자 강철중에게서 의외의 답이 나왔다.
“이미 잡아 놓았습니다. 사장님의 명령이 떨어지는 대로 그 사람의 생사가 결정될 겁니다.”
무시무시한 순간이구나.
적어도 리 애트워터에게는 말이다.
내가 어떤 콜을 내느냐에 따라 목숨이 결정된다니….
“그럼, 우리 목표물이 있는 곳으로 가 봅시다. 죽이기 전에 얼굴은 한 번 봐야겠네요.”
강철중은 내 눈치를 살짝 보며 우물쭈물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런 일에 흔들리지 않아요. 그러기에는 너무 막장 인생이지 않습니까.”
그제야 그는 조금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끔 사장님의 나이를 잊게 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도 그렇네요. 하하.”
멋쩍은 내 웃음에, 강철중도 살짝 미소를 보이며 나를 인도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할렘가에 있는 허름한 창고였다. 쉽게 말해서 사람 죽이기 딱 좋은 장소라는 것이다.
할렘은 말 그대로 뉴욕의 어두운 그림자다. 1950년대까지는 오페라 하우스도 열릴 정도로 평판이 좋았지만, 주택 과다 공급으로 인한 집값 폭락이 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흑인들이 대거 몰리게 되어 지금을 형성한 것.
그 결과 할렘은 범죄의 온상지가 되어 1990년대까지 악명을 떨친다.
물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미지가 차츰 달라지긴 하지만, 지금의 할렘은 막장 그 자체다.
그래서 여기로 올 땐 경호원들을 붙이고 오는 게 가장 좋다. 또한, 아무리 경호원들이 곁에 있어도 밤에는 절대 돌아다니지 않는 게 험한 꼴을 안 본다.
“이 사람인가요?”
“예, 사장님.”
나는 무너질 것만 같아 보이는 창고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 하나를 걸터앉았다. 그리고 내 앞으로 자루를 뒤집어쓴 채 무릎을 꿇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리 애트워터. 훗날 킹메이커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남자.
“리 애트워터. 맞습니까?”
내 말에 반응한 애트워터는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사, 살려 주세요! 갑자기 저를 납치한 이유가 뭡니까? 전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누군가의 원한을 살 일도 없단 말입니다!”
“정말이에요? 정말 원한산 일이 없어요?”
애트워터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불안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혹시… 애덤스 의원이 보낸 건….”
아무래도 선거전 때 공격한 상대편이 보낸 사람이라고 오해한 모양이다.
리 애트워터는 원한을 살 일이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 사람은 꽤 원한을 많이 산 인간이다.
선거전 때마다 네거티브 공략으로 상대의 약점을 만천하에 공개해, 망신을 주지 않았던가? 그를 죽이고 싶어 이를 갈았던 후보가 한둘이 아닐 터.
하지만 적어도 난 아니다.
“아닙니다.”
“그,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러게요. 일단 그 답답한 복면부터 벗겨 드리죠.”
내 눈짓에 강철중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곤 애트워터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자루를 벗겼다.
“도, 동양인?”
애트워터는 내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란 눈치였다.
“놀라셨습니까? 동양인이라서.”
“그게… 아, 아무튼 난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이렇게 보니 사람이 참 초라하다. 내가 중간에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킹메이커라는 소리를 들으며 승승장구했을 텐데. 그러나 지금은 초라한 인간에 불과하다.
나는 허리춤에 있던 총을 꺼내 애트워터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자, 잠깐만! 도, 도대체 왜, 왜 이러시는….”
“저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꼭 사라져야 해서요.”
“이, 이러지 마십시오. 제게는 아내와 딸이….”
“아. 그들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돌봐 드릴 테니. 섭섭지 않게 돈을 좀 쥐여주면 알아서 잘 살 겁니다.”
내가 알기로 리 애트워터는 부통령 선거 이후 이혼을 하게 된다. 킹메이커라는 자부심에 빠져 미국 하원의원으로 도전하다가 보기 좋게 고꾸라진 게 그 이유였다.
“누,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살려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뭐든지?”
내 물음에 애트워터는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뭐든지!”
“좋습니다. 그럼… 오늘 여기서 깔끔하게 죽어 주세요, 애트워터.”
“자, 잠깐!”
타앙-!
난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마에 구멍이 뚫린 애트워터는 시끄러웠던 목소리가 끊어진 채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강철중 씨.”
“…예, 사장님.”
“잘 정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양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오늘도 난 무고한 사람 하나를 죽였다. 하지만 감정의 요동침이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어쩌면 이미 난 돌이키기에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이런 내가 역겨워 보이기는커녕, 아주 잘 어울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