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84화 (84/325)

84화. 죽여야 산다. (1)

“250kg?”

“예, 로이. 250kg이면 괜찮겠죠?”

로이 루스테는 홀짝이던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하. 이번에는 또 어떻게 한 거야? 그것도 부통령을 구워삶다니. 너무 스케일이 큰 거 아니야?”

솔직히 나도 부통령을 직통으로 상대할 줄은 몰랐다. 그만큼 내게 운이 따르고 있다는 뜻이리라.

“별일 아니었어요. 어차피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했을 겁니다.”

내가 하지 않았더라도 역사는 원래대로 흘러갔을 것이다.

올리버 노스가 콘트라 반군 지원 안건을 발제하고 레이건은 이를 승낙함과 동시에, CIA와 메데인 카르텔의 협력을 허락한다.

메데인 카르텔이라면 언론의 눈을 잘 피하면서 마약을 운송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부시도 내 제안에 흥미를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내 말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으니, 그에 합당한 증거를 내놓으라는 것.

로이는 내 사정을 듣고 흔쾌히 허락했다.

“좋아. 250kg은 껌이지. 그 대신, 약속은 꼭 지키는 거다?”

“물론입니다. 로이가 메데인 카르텔을 진두지휘하면서 미 정부와 좋은 작품을 만들게 될 겁니다.”

부시는 250kg의 마약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게 아니다. 그는 그저 확실한 물증을 보고 싶은 것일 뿐.

창고에 쌓아 놓은 250kg 상당의 마약을 보게 되면 나를 믿게 될 것이다. 그럼,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네 말을 들어보니까. 이 일이 외부로 누설이라도 되면, 너나 나나 다 끝장인 것 같던데.”

로이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이번 일이 한 번 커지면 돌이킬 수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정부에서 은밀히 하는 일이잖아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우스꽝스러운 일?”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로이는 모르겠지만, 난 알고 있지 않은가.

콘트라 사건은 정말 우스꽝스럽게 발각이 된다.

완벽하다고 생각한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한 건 CIA와 올리버 노스의 실수로부터다.

레바논에 붙잡혀 있는 미국인들이 풀려나면서, 레바논 언론에서 이 사건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무려 세 배가 넘는 가격으로 무기를 구입하게 된 이란이, 미국에 보복을 하기 위해 레바논 언론을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처음 미국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다른 곳도 아니고 레바논 언론이니, 무슨 영향력이 있겠냐는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도저히 쉴드를 칠 수 없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CIA 요원 중 하나가 니카라과 공화국에서 붙잡히고, 레바논 언론의 보도를 인정한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정부가 미 정부에 항의를 하면서 사건이 더욱 커지고 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리버 노스가 미국 안전 자문의원 존 포인덱스터에게 보낸 이메일이 공개되면서 레이건은 탄핵 직전까지 가는 수모를 겪는다.

물론, 이란에게 무기를 제공한 건 전략의 일환이라는 말로 방어하기에 이른다. 국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다는 변명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긴 하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로이는 언제든 저한테 오세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로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너한테 쪼르르 달려갈 만큼 어수룩하진 않아.”

나도 로이와 함께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정말 그럴지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 * *

“어서 오게.”

두 번째 만남에선 부시의 자세가 저번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로이가 준비한 마약을 확인한 게 분명하다. 이제 나를 파트너로 인정하겠다는 것인가?

“자네 말이 정말이더군. 우리 쪽에서 확인을 해 보니, 그 약들은 전부 메데인을 통해 나온 거였어.”

약의 출처를 조사했다는 건가.

“혹시… 그 약을 전부 압수하신 건….”

부시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저었다.

“아니야. 언젠가 그놈들을 잡아넣을 거긴 하지만, 지금은 같이 손을 잡은 상태니까.”

일이 끝나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는 건가.

하긴. 세상에서 제일 못 믿을 게 바로 이놈 같은 정치인이지 않은가.

언제라도 등 뒤에 비수를 꽂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정치인이다.

“대통령님도 이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계시지. 자네도 알다시피 이란은 지금 이라크와 한창 전쟁 중이지 않나?”

“잘 알고 있습니다. 미 정부는 둘 중 누구의 일방적인 승리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요.”

미국이 이란을 도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것 때문이다. 더는 쓸 무기가 없는 이란이 이라크에게 두들겨 맞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게슴츠레한 부시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그는 내게 잔을 밀어주며 말했다.

“자네 말이 맞아. 우린 누구의 승리도 원하지 않아. 그냥 이대로 전쟁이 끝났으면 하는 거지.”

누구의 승리도 아닌 전쟁.

승자가 없는 전쟁.

바로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을 부르는 말들이다.

“이란이 혁명만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라크가 침공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뭐, 자네 말도 맞아. 하지만 사담 후세인은 너무 야망이 커. 그놈은 중동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되고 싶어 하지. 이란의 혁명이 아니더라도, 후세인이 어떻게든 침략을 했을 거야.”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은 중동 지역을 지배하는 황제가 되고 싶어 했다. 그 야망을 눈치챈 미국은 이것을 기회로 삼았다.

80년대 중동지역은 단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 땅은 석유가 생산되는 황금지대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중동 전체를 지배할 만한 국력을 가진 나라도 없어, 항상 분쟁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사담 후세인이 등장한 것이고, 미국은 미소를 짓게 된 것이다.

야망에 눈이 먼 사담 후세인이 국제적으로 금지 중인 생화학무기를 만들었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려, 미국은 기어코 이라크를 침범하지 않던가?

이라크에 있는 수많은 자원을, 미국이 전부 뽑아갈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계획은 레이건 때부터 시작해, 마침내 조지 워커 부시 때에 결실을 보게 된다.

아무튼, 앞으로 2년만 있으면 두 나라의 전쟁은 유엔의 중재로 끝이 난다.

“작전은 언제부터 시작되는 겁니까?”

“이미 시작됐어. 이란과 협상을 끝낸 상태고, 일주일 내로 포로들은 풀려날 거야.”

벌써?

나와 메데인 카르텔의 접점을 먼저 확인하고 움직이는 게 아니었나?

“자네 생각대로 세 배가 넘는 가격을 불러도 이란은 군말 없이 무기를 사들이더군.”

“그만큼 급하다는 것이겠죠.”

“그렇지. 사담 후세인, 그놈 욕심이 보통이 아니라서 말이지.”

나는 부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뭔지 알아차렸다.

“이제 메데인이 움직일 때가 되었군요.”

“눈치가 빠르군. 이란도 이란이지만, 우리도 일이 좀 급해.”

얼른 일을 해치우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 꼬리를 잡힐 일이 없을 테니까.

“생각보다 일이 빨리 진행 돼서 좀 놀랐습니다.”

“하하. 미국이 어떤 나라라고 생각하는 건가? 바로 세계 최강국이야. 일 처리는 항상 빠르지.”

물론, 빠른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확실하게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은가?

이것들이 뒤탈 없게 일만 똑바로 했어도, 콘트라 사건이 터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은 아마 위대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았겠지.

“메데인 카르텔도 벌써 준비를 다 마친 상태입니다. 언제든 신호만 주시면 움직일 겁니다.”

“오호. 역시, 메데인도 발이 빠르군.”

“돈 냄새 맡는 실력은 그들을 따라갈 곳이 없죠.”

마약 하나로 메데인 카르텔이 세계 시장을 휘어잡았다. 단순히 약을 팔아서가 아니다. 그만큼 그들이 발 빠르게 움직여, 먼저 자리를 선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메데인이 움직이면 자네도 같이 행동하는 건가?”

“그렇진 않습니다.”

“그렇군….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어. 자네 회사는 도대체 왜 이 일에 끼어든 거지?”

과정으로 보나 결과적으로 보나 리턴 컴퍼니가 얻게 되는 이득은 거의 없다. 그냥 남 좋은 일만 실컷 시켜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마 내가 그런 병신 같은 짓을 하려고 이런 위험천만한 일에 발을 담갔겠는가?

“미국의 무한한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 아마 안 믿으시겠죠?”

“그걸 말이라고? 자네의 눈만 봐도 난 알 수 있어. 난 욕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자네도 절대 만만치 않아.”

부시가 먼저 이렇게 말을 꺼내주니, 얘기를 나누기가 좀 더 편해졌다.

“부통령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대가 없이 이런 큰일을 벌일 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이걸로 뭔가 이득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예.”

“그게 뭐지?”

지금 당장 그걸 말해 줄 순 없지.

조금 시일이 지나면 그때 밝혀야 할 일이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겠군요. 하지만 약속드리겠습니다. 조만간 우리 회사가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 모두 보여드리지요. 그리고 그건 부대통령님께도 아주 좋은 일일 겁니다.”

처음에는 조금 언짢은 표정을 짓던 부시가,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얘기를 듣고 흥미롭다는 얼굴빛을 띠었다.

“그렇게 말하니 기대가 되는군.”

“예. 기대하셔도 될 겁니다.”

나의 이득이, 곧 당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게 될 일이니까.

* * *

내가 고대했던 일은 콘트라 사건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대충 일이 끝난 뒤 라스베이거스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왜냐하면, 오늘은….

“베팅?”

“아. 오랜만입니다.”

이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베팅을 받기 위해 찾아온 베트남 남성이 반갑게 말을 이었다.

“미스터 김. 역시, 오늘은 오셨군요. 저번 날 이후로 도통 모습을 안 보이셔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 했습니다. 아, 그리고 제 이름은 응우옌 찌엣입니다. 기억나십니까?”

맞다. 응우옌 찌엣.

베트남 사람 이름은 정말 기억하기 힘들다.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원래 주변 사람들이 제 이름을 자주 까먹긴 해요. 워낙 이름이 발음하기 어렵다보니…. 그래도 저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베트남 사람들이 많긴 합니다.”

그냥 흔한 이름이라는 건가.

그런데 자꾸 이 사람 얼굴이 낯이 익다.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그냥 내 착각인가?

“그래서, 오늘은 베팅을 하시겠죠? 무려 미들급 통합 챔피언 마빈 해글러와 무패 행진을 달리고 있는 무가비의 대결이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난 화재를 몰고 올 만큼, 마빈 해글러와 무가비의 대결은 세계 전역을 뜨겁게 달궜다.

마빈 해글러가 80년대 복싱 세계를 부활시킨 F4의 주역이긴 하지만, 너무 강하다는 게 오히려 문제가 되는 아이러니한 경우이다. 그리고 쇼맨쉽도 없고 말주변도 없는 사람이라, 다른 F4와 비교하면 푼돈이나 다름없는 파이트머니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26전 26승 26KO라는 무시무시한 연승 행진을 달리고 있던 무가비가, 세계 랭킹 1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래서 챔피언에게 도전장을 내밀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가뜩이나 마빈 해글러는 나이도 많이 먹은 터라, 사람들은 미들급 황제의 추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졌다.

그 덕분에 마빈 해글러는 자신의 커리어 사상 최고 금액의 파이트머니를 받으며 무가비와의 챔피언 전을 치르게 된 것.

“최고로 베팅할 수 있는 금액이 얼마입니까?”

“30만 달러입니다.”

마빈과 헌즈 때보단 흥행이 좀 덜해도, 베팅 금액은 훨씬 높아졌다. 그만큼 베팅 금액이 양쪽에 분산되어 있다는 뜻이다.

내게는 아주 땡큐다.

“30만 달러를 걸겠습니다. 11 라운드, 마빈 해글러의 KO 승.”

응우옌 찌엣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다, 조심스레 내게 속삭였다.

“괜찮으시겠어요? 무가비는 젊고 해글러는 이제 한물간 복서입니다. 무가비의 경기를 본 적이 없으신 거 같은데… 정말 강한 도전자입니다.”

나도 안다. 무가비에게는 무시무시한 레프트 훅이 있다. 이거 하나로 26KO를 따낸 신인 복서다. 하지만 이번 경기를 끝으로 무가비는 은퇴를 하게 된다.

마빈 해글러라는 산을 결국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하. 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도 전 마빈 해글러를 믿습니다. 설사 그가 진다고 해도 후회는 없습니다.”

“아-. 해글러의 팬이셨나 봅니다.”

딱히 해글러의 팬은 아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럼,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응우옌이 건네준 표를 받고 나는 경기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묵묵히 내 옆에 서 있던 강철중을 불렀다.

“오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네요. 사실 강철중 씨도 무가비가 이길 거로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강철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려야 하는 게 아닌지 한참 고민하는 중이었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제가 정말 베팅을 잘못하긴 했나 봅니다. 그래도 결과는 나와 봐야 아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짧게 미소를 짓고 있던 강철중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철중 씨.”

“예, 사장님.”

그리고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할 제안을 꺼냈다.

“사람 하나 좀 죽여 달라고 부탁드리면… 들어 주실 겁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