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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76화 (76/325)

76화. 마치 내가 한 것처럼. (4)

“축하드립니다, 실장님.”

다나카와의 만남이 끝난 뒤, 우리는 추후 계약서 사인을 위해 따로 날짜를 정해 놓고 왔다. 물론, 이땐 내가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내 일은 딱 여기까지이지 않은가?

닌텐도와 천성의 거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뜻은 나와 천성 사이에 있던 거래도 마무리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거… 공을 세우신 분은 따로 있고, 축하는 제가 받게 생겼으니….”

이강찬은 멋쩍은 얼굴로 내가 건넨 잔을 받았다. 그래도 자기가 한 건 거의 없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면박을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앞으로 이 양반 얼굴 볼 날이 많을 테니까.

“하하. 실장님이 열심히 해 주신 덕분입니다. 그쪽에서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부회장님만 아니었다면 천성과 손을 잡았을 거라고. 솔직히 부회장님만 아니었으면 제가 나설 일도 없었을 거예요.”

부회장 이강혁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강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큰형이라는 사람이 그 정도로 집요하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잠시 정적이 흐르면서,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리기 위해 그의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힘내세요. 그만큼 실장님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부회장님도 알고 있는 겁니다.”

“오늘 닌텐도와 거래를 성사시킨 것도 모자라 위로도 해 주시고…. 면목 없습니다.”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이강찬은 굳어 있던 얼굴을 풀며 잔을 홀짝 들이켰다. 그리고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그런데 김태산 씨. 아까 다나카 부사장과 나눈 이야기는….”

“야마구치 구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맞습니다.”

야마구치 구미가 일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다고 해도, 이강찬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일 수도 있다.

“야마구치 구미가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그게… 들은 것 같긴 한데, 정확히 알진 못합니다.”

“그러시겠죠. 야마구치 구미는 야쿠자니까요.”

수달마냥 그윽하게 그어져 있던 이강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야쿠자요?”

“예. 야마구치 구미는 일본 야쿠자 조직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야마구치 구미가 닌텐도를 압박했다는 겁니까?”

이강찬에게는 생소한 일로 들릴 것이다. 한낱 조직 나부랭이가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닌텐도를 건드리다니. 하지만 야마구치 구미의 힘이라면 소니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실장님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야쿠자의 힘은 강합니다. 지금 시대가 법보단 주먹이 앞서는 때이지 않습니까? 야쿠자들이 분탕질이라도 하게 되면, 닌텐도 입장에서는 난처해지겠죠.”

“야마구치 구미라…. 야쿠자의 힘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이미 정계에도 진출하고 있는 게 야쿠자입니다. 웬만한 대기업보다 수익도 많고요. 거기다가 무차별적인 공격도 서슴지 않는 놈들이니, 닌텐도가 백기를 든 겁니다.”

이강찬은 목이 탔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다시 채웠다.

“그런데… 그렇게 세력이 넓은 야쿠자 조직을 어떻게 김태산 씨가 움직이게 만든 겁니까?”

“음-. 제가 저번에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내 말에 이강찬은 살짝 미소를 던지며 대꾸했다.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그저 어두운 쪽에서 일어난 일종의 거래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쪽이 원하는 걸 제가 제공해 주었고, 그쪽은 제가 원하는 걸 준 것일 뿐. 제가 그 큰 조직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위치까진 아닙니다.”

이강찬은 알아들었다는 듯 잔을 비운 뒤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사람이 크게 웃는 건 처음 들어본다.

“정말이지…. 가끔 보면 김태산 씨가 고등학교 2학년생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뛰어난데, 앞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지….”

“하하. 너무 띄워 주시는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역시, 제가 사람 하나는 잘 봤다고 생각합니다.”

이강찬의 칭찬 일색에 나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강찬에게 칭찬을 듣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세상 참 살다 보니 별일이다.

“그런데 실장님은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세요?”

어느 정도 순배가 돌아갔고, 슬슬 무거운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되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하는 건가?

난 한 번 더 찔러 보았다.

“부회장님 있지 않습니까?”

이강찬은 길게 숨을 뱉으며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일단, 닌텐도와의 거래는 무사히 끝낼 생각입니다. 아버지께서도 관심을 두고 있던 일이니, 형님도 크게 간섭을 하진 못하겠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부회장님이 실장님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다는 걸 밝힐 생각이십니까?”

이강혁의 방해만 아니었더라면 시간이 더욱 단축됐을 것이다. 만일 이철호 회장이 부회장의 치부를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치진 않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 크게 혼구녕을 당하진 않을까?

그러나 이강찬은 일러바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한 대 맞았다고 아빠한테 쪼르르 달려가는 건 어린아이나 하는 짓입니다. 아버지도 그런 행동을 매우 싫어하세요. 이번 일은 제가 어떻게든 잘해 봐야죠.”

이강혁도 이강찬의 발목을 붙잡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프로젝트가 생길 때마다, 이강찬을 방해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행동할 건 뻔하다.

“그리고… 이런 걸 보여주는 것도 좋지 않나요? 네가 온갖 수를 써서 방해했지만, 결국 내가 해냈다는 것을.”

이철호 성격상, 이강혁이 이강찬을 방해했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서로 치열하게 싸워서 차기 회장 자리를 쟁취하는 것이, 바로 이철호가 원하는 그림이다.

실제로 이철호는 인터뷰에서도 차기 회장 자리는 처음부터 정해진 바가 없다고 했다. 이기는 자가 결국 가져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게 이철호라는 것이다.

이강찬은 이철호에게 보여주고 싶은 걸까.

형의 방해가 있어도 자신은 끄떡없다는 것을.

이강혁이 방해를 했다는 건 어쩌면 이철호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런 계산을 밑바탕으로, 이강찬이 스스로 내보이려는 것일 수도 있다.

“아. 그런데 이걸 김태산 씨에게 말하고 보니, 좀 부끄럽네요. 정작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하하. 아닙니다. 실장님이 아니었더라면 이번 일은 완만히 해결할 수 없었을 거예요.”

이강찬은 내 잔에 물을 채워 주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 마음이 놓입니다.”

오늘따라 물이 아니라 술이 땅기는 날이다.

* * *

일본에서의 일이 모두 마무리가 되고, 나는 이강찬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일정이 잡히고 말았다.

“닌텐도와는 잘 이야기가 끝났나?”

야마구치 구미의 새로운 쿠미쵸가 된 와타나베가 나를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

뭐지?

닌텐도 일로, 생색이라도 내보겠다는 건가?

“예. 덕분에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군.”

나는 술잔을 천천히 들이켜고 있는 와타나베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놈이 갑자기 나와 약속을 잡은 이유가 궁금했다.

“이번에 그쪽과 거래를 하면서 말이야. 나도 생각이 좀 달라졌어. 우리가 너무 안에서만 놀은 게 아닌가 싶더라고.”

“해외 쪽에 발을 더 뻗을 생각이시군요.”

“맞아. 그럴 생각이야. 이번에 타케나카가 잡혀가는 꼴을 보니, 등골이 오싹하더라고. 우리가 너무 우물 안 개구리였어. 조금만 더 해외에 폭넓은 정보망이 있었다면 그런 일은 당하지 않았겠지.”

김종관을 통해 듣는 이야기지만, 통역이 영 불편했다. 이거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일본어라도 배워야 하나?

다행히 말하는 어조를 보니, 내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이놈은 내가 만든 리턴 컴퍼니가, 미국의 DEA를 이용해 타케나카를 잡았다고 착각하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적대감은 없지만, 경계심은 느껴진다.

“저도 말씀드렸듯이, 야마구치 구미와 앞으로의 관계를 잘 유지 하고 싶습니다. 물론, 서로 파트너로 일할 기회가 온다면 말이죠.”

“야쿠자와 손을 잡는 일이라면 합법적인 일은 아니겠지?”

“그런 고리타분한 걸 하는 곳은 아닙니다.”

“맘에 드는군.”

와타나베는 잔을 쭉 들이켜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고작 나와 친분이나 쌓자고 여기에 온 건가?

“사실은… 그쪽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 말이지. 이런 걸 딱 까놓고 말할 곳이 없어서 말이야.”

그럼 그렇지.

뭔가 일이 있으니까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상담을 받으러 올 줄은 몰랐다.

“야마구치 구미는 세력이 상당히 넓어. 기존의 쿠미쵸들이 그러했듯, 혼자서 조직 전체를 통괄하는 체제는 좋지 않다는 뜻이야.”

아. 설마 이 이야기였나.

나는 와타나베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조직적 쇄신을 준비하신단 말입니까?”

“말이 잘 통해서 좋네. 그래. 조직적 쇄신.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슬슬 역사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와타나베 요시노리는 기존의 있던 쿠미쵸들처럼 일인체제의 통치를 원하지 않았다.

후계문제로 항상 골머리를 앓던 조직이 아니던가. 하지만 블록제를 도입해 세력범위를 5개로 나누고, 구역마다 두목을 지정하여 폭넓은 권한을 준다면…. 후계문제는 저절로 완화될 거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건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야마구치 구미의 구역을 다섯 개로 나누면서 지정된 두목들이 가만히 명령을 따르기만 하겠는가?

이들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될 것이고, 야마구치 구미의 최고가 되고자 할 것이다.

인간의 야망이란 항상 그렇지 않던가?

처음에는 하나를 원하고 다음에는 둘을 원한다. 그렇게 인간의 욕망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끝이 없다.

그리고 결국 나중에 일이 터지고 만다.

나뉜 다섯 개의 구역이 마치 개별적인 조직처럼 행동하며,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그래서 야마구치 구미의 힘이 급속도로 약해지는 것이다.

갈수록 갈등이 깊어지자, 와타나베 요시노리는 갑작스레 집행부로 모든 전권을 위임한 채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살해를 당할까 두려워 먼저 몸을 내뺀 것이다.

“우리 조직의 영향력을 봐서는 구역을 다섯 개로 나눠도 괜찮다고 봐. 구역마다 두목을 정하고 권한을 넓혀주는 거지.”

이제 선택은 내게 달렸다.

과연 나는 이 남자에게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와타나베의 이 선택으로 야마구치 구미는 분열의 길을 걷게 된다. 처음에는 안정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점점 그 힘이 약해져 종국에는, 타 조직보다 세력이 작아지는 굴욕을 겪는다.

난 뭐라고 답을 해 줘야 하는 것일까?

“마치… 군웅할거를 보는 것 같습니다.”

“군웅… 할거?”

군웅할거.

그 유명한 삼국지가 시작되는 때다.

중앙 정부의 힘이 더는 없다고 판단한 각 지방의 관료들이 들고일어나 각자의 세력을 갖게 되는 최악의 사태.

쉽게 말해서, 청와대와 국회에 더는 힘이 없다고 판단한 각 지방 지사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각자 독립을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

군웅할거로 인해 조조와 원소 그리고 유비라는 영웅이 나와 천하를 호령하지 않았던가.

군웅할거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지역마다 군웅들에게 힘을 준 한나라 황실의 판단 미스였다.

그런데 와타나베가 똑같은 실수를 하려는 것이다.

“후계자 문제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야마구치 구미가 직면한 문제는 그게 가장 크지 않습니까?”

“그렇지. 자네 말대로 그게 가장 크지.”

“그런데 후계자 문제야 어떻게든 그때 해결하면 됩니다. 조금 잡음이 생기긴 하겠지만, 세력을 찢어 놓는 것보단 훨씬 나을 겁니다.”

와타나베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쿠미쵸가 하려고 하시는 일은, 그냥 도망치는 겁니다. 문제에 직면했다고 해서 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냥 부딪히는 수밖에요. 구역을 나뉜 블록형 체제는 내분만 더욱 가중할 뿐입니다. 나아가 별개의 조직처럼 행동하려는 두목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거야…. 우리가 철저한 심사를 거쳐….”

“그 잘난 심사를 해도 야마구치 구미에서 항상 후계자를 두고 싸움이 일지 않았습니까?”

와타나베는 더욱 인상을 팍 구기며 술을 빠르게 들이켰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그냥 현 상태를 유지해라?”

“예. 그게 쿠미쵸를 위해서도 나을 겁니다. 확신하건데, 구역을 나누는 순간 야마구치의 분열은 크게 일어날 겁니다. 또 다른 야마모토 히로시와, 또 다른 이치와 카이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는 거죠.”

이치와 카이를 결성해 야마구치 구미의 분열을 조장했던 히로시가 거론되자, 와타나베는 구겨진 인상을 폈다.

“듣고 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네. 군웅할거라….”

와타나베는 짙게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잔을 건넸다.

“조언 고마워. 참고하도록 하지.”

“예.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군요.”

나는 깊은 고심에 빠진 듯한 와타나베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잔을 들이켰다.

과연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겠다.

사실, 그냥 놔둘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이왕 분탕질할 거면 제대로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만일 와타나베가 내 말을 따라 현 체제를 유지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심히 궁금했다.

뭐,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진흙탕 싸움은 일어나게 되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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