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마치 내가 한 것처럼 (3)
“사, 사장님….”
호텔 레스토랑을 나와 방으로 돌아오기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김종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 도대체 사장님 정체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DEA를 움직일 정도의 회사라니…. 리턴 컴퍼니란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김종관이 말 꺼내길 기다렸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DEA는 내가 움직인 게 아니지 않은가. 그냥 그런 척을 해서 와타나베를 속였을 뿐이지.
하지만 이왕 속일 거라면 화끈하게 속이는 게 좋겠지?
“김 실장님.”
“예, 사장님.”
“많이 알면… 다치시지 않겠어요?”
이런 쪽 일을 파고드는 건 결코 좋지 못한 행동이다. 자신의 명줄을 길게 만들고 싶다면 말이다.
김종관은 금방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그렇죠.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습니다.”
“하하. 너무 겁먹진 마세요. 김 실장님은 그저 맡은 일만 잘하시면 됩니다. 그럼, 서로 좋은 게 아니겠어요?”
나는 김종관에게 명함 하나를 꺼내 주었다.
“제 명함입니다. 갖고 계세요. 그리고 앞으로 일본에서 일이 있을 때, 실장님을 찾아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거면 실장님도 리턴 컴퍼니로부터 신변 보호를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보증을 섰으니, 리턴 컴퍼니 측에서 당신을 건드릴 일은 없다는 걸 말한 것이었다.
김종관도 눈치는 빠른 모양인지 얼른 명함을 가져다 챙겼다.
“가, 감사합니다. 앞으로 사장님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전적으로 돕도록 하겠습니다.”
“예. 저희는 사람을 막 부려먹고 그러진 않습니다. 그만한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만큼 돈을 지불하죠. 저희 쪽과 관계 유지만 잘 하신다면 돈 걱정은 없을 겁니다.”
흔들리던 김종관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실장님.”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혹시 이 일을 큰 형님께서도….”
권용일이 내 정체에 대해 아느냐는 물음이었다.
난 슬쩍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약간의 살기를 담아 김종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제 정체에 대해 큰 형님께 말씀드리는 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큰 형님 성격 아시죠? 저야 괜찮지만, 큰 형님께서는 비밀 엄수를 좋아하시거든요. 우리 회사보다 큰 형님이 먼저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리턴 컴퍼니가 움직이기도 전에, 권용일이 먼저 당신을 칠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이번에도 김종관은 빠르게 내 말을 캐치했다.
“알겠습니다. 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하하. 아닙니다. 앞으로 볼 날도 많은데, 저도 손발 맞춰 본 사람이 훨씬 편하고 좋죠.”
김종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으로 권용일에게 말이 새어 나가는 건 막은 것 같다. 물론, 언제 김종관이 변덕을 부릴지는 모르지만, 아무렴 어떤가?
권용일이 설사 이번 일을 알게 된다고 해도 내가 적당히 둘러대면 될 일이다. 그리고 이 양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영원히 땅에 묻어 버려야겠지.
* * *
이틀 뒤, 와타나베는 안정적으로 차기 쿠미쵸가 되어 야마구치 구미를 이끌게 되었다. 그가 남몰래 감사 인사를 내게 전함과 동시에, 이번 마약 거래 또한 편의를 봐준다고 했다.
거기다가 닌텐도에도 손을 썼다고 하는데….
“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나는 야쿠자와의 거래를 마치고, 이강찬이 머무는 방으로 찾아갔다.
갑자기 닌텐도에서 먼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며 서둘러 나를 찾은 것이다.
어지간히 급했는지, 이강찬은 벌떡 일어나 내게 말했다.
“우리가 몇 번이나 컨택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들은 척도 하지 않던 닌텐도가, 갑자기 우리에게 먼저 만나자는 제안을 보냈습니다. 혹시 이거….”
이강찬은 저번에 말한 다른 방법을 썼냐고 물어보는 듯한 눈빛을 내게 보냈다.
나는 능청스럽게 고개를 흔들며 대꾸했다.
“글쎄요. 그놈들이 무슨 바람이 난 걸까요?”
“그럼, 김태산 씨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겁니까?”
“하하. 일단, 만나보면 알겠죠. 그냥 그쪽에서 마음을 바꾼 걸지도 모르니까요.”
굳이 여기서 내 자랑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일단 얼른 가시죠.”
우리는 처음 닌텐도 기획팀 팀장 나카무라 류이치를 만났던 장소로 다시 한번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류이치와 함께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부사장 ‘다나카 겐’이라고 합니다.”
오. 이것 봐라?
저번에는 꼴랑 팀장이란 놈 하나를 보내더니, 지금은 부사장이 나왔다.
이건 분명 야마구치 구미에서 압박을 받았다는 건데….
“안녕하십니까, 저는 천성 그룹 전략팀 실장 이강찬이라고 합니다.”
“저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나카 겐이 잘라 버렸다.
우리의 편의를 위해 영어를 써 준 덕분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럼, 이쪽 분이 바로 김태산 씨겠군요.”
날 알고 있는 건가.
내가 고개를 살짝 들자, 적의라고는 한 점 없는 얼굴로 다나카가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김태산 씨. 지난번에는 결례가 많았습니다. 뭐하나, 나카무라 군. 어서 두 분에게 사과드리지 않고.”
“일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다나카가 나를 향해 유한 미소를 짓던 것과는 다르게, 나카무라에게 고압적인 사과를 강요했다.
나카무라는 그런 고압에도 불구하고, 90도로 허리를 꺾으며 정중하게 사과해 왔다. 일본인은 이런 점이 무서운 것이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면 어떤 가면이라도 쓸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아, 괜찮습니다. 앞으로가 중요한 거죠.”
내가 던지는 사과에 이강찬은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위기가 경직될까 싶어, 그에게 살짝 눈치를 주자….
“저도 괜찮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나카무라의 사과를 받아주자, 다나카 겐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자자.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오늘 주고받을 흥미로운 이야기가 참 많을 것 같군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강찬과 함께 나는 소파에 앉았다.
“이거, 맘 같아서는 사케라도 한잔하고 싶네요. 아쉽지만 오늘은 차라도 한잔하시죠.”
다나카 겐의 제안에 나는 가볍게 주문을 했다.
“전 커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이강찬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실장님은 어떤 걸로….”
“아-. 저도 커피로….”
여전히 이강찬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보였다.
다나카는 빙긋 웃으며 팀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눈치 있게 자리를 비우라는 신호였다.
역시 사회생활을 거저 하진 않았는지, 팀장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잠시 정적이 흐르다 다나카가 먼저 운을 뗐다.
“저희가 한국을 좋은 투자 모델로 보지 않는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천성 그룹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겠죠. 그래서 사실 검토를 하긴 했습니다만….”
다나카는 내쪽이 아니라 이강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쪽에서 먼저 태클을 걸었어요.”
이강찬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이게….”
설명하기가 난해했는지, 다나카는 넥타이를 조금 풀며 대답했다.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도 천성과 거래를 해 보자는 의견이 나오긴 했습니다. 중국에 진출하기 전, 시험 삼아 한국에 먼저 진출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나도 몰랐던 일이다.
그냥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것도 있고…. 군부 독재라는 사회적인 문제도 있어서 천성과의 거래는 크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은 닌텐도가 계약을 맺으려고 했었다?
그렇다는 건 중간에 누군가가 일을 망쳤다는 건데….
“실제로 우린 계약서도 만들려고 했어요. 그런데 천성 부회장이 연락을 하더군요. 천성과의 계약을 엎어달라고.”
이강찬은 눈을 크게 뜨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그놈이 이 정도로 집요할 줄이야.
그렇게도 동생의 앞날을 가로막고 싶었던 건가.
“처음에 저희도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조사를 해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더라고요. 일본도 후계자 싸움이 한 번 붙게 되면 정말 보통 난리도 아닙니다. 한국도 똑같이 그러더군요.”
대를 이어받아 가업을 잇는 문화. 그게 가장 심한 곳이 바로 한국과 일본이다.
다나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천성이 지금 후계자 싸움 때문에 시끄럽다는 것을.
그것도 부회장이라는 놈이 고작 실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생을 견제하고 있으니, 닌텐도 입장에서는 질렸을 거다.
이런 놈들과 거래를 하기보다는, 다른 곳과 컨택을 하는 게 더 빠르다고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
“저희는 복잡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천성과 거래를 거절한 겁니다.”
이강찬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우리가 마실 차들이 들어오면서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이유가 뭡니까? 부회장이 그 난리를 쳤다면 저희와 거래를 할 생각이 나지도 않을 텐데요.”
“하하. 물론입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복잡한 일에 끼어드는 건 저희도 싫어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더 복잡한 일이 얽힐 수도 있는데….”
다나카가 나를 바라보며 뒷말을 말하자, 이강찬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그는 야마구치 구미가 닌텐도를 압박한 사실을 모르지 않던가.
“솔직히 놀랐습니다. 그곳이 천성과 연관이 있을 줄은….”
“아니요. 천성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한층 달라진 다나카였다.
“그렇다는 건, 김태산 씨가 그들을 움직인 거란 말입니까?”
“뭐, 움직였다기보다는 거래를 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네요.”
“거래라….”
야마구치 구미가 어떤 식으로 닌텐도를 압박했는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부사장까지 나왔다는 건 와타나베가 꽤 힘을 썼다는 건데…. 완력일 수도 있고, 정재계의 힘을 빌렸을 수도 있었다. 결국, 다나카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만한 일인데….
“거친 방법을 써서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귀사에서 저희를 상대해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천성에게도, 그리고 닌텐도에도 좋은 기회가 될 거로 생각합니다.”
내가 강압적인 방법을 썼다고는 하나, 이건 닌텐도에 결코 실이 되는 일이 아니다.
“천성과 닌텐도가 손을 잡게 된다면, 닌텐도는 아시아 시장을 장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겁니다.”
나의 말이 조금 애절하게 들렸던 것일까.
다나카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아. 제가 기분이 언짢아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희는 천성과 파트너쉽 맺는 걸 꺼려하지 않았어요. 그쪽 부회장님이 나서기 전까진 말이죠.”
이강찬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다나카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아예 기분이 상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될 인연이었다고 생각하면 되겠죠.”
“이거… 제가 괜히 죄송스럽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솔직히 그 야마구치 구미를 움직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곳과 연관이 되어 있는 분이라면, 우리 회사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역시, 이 사람도 철저한 비즈니스맨이다.
언짢은 기분을 숨긴 채 회사의 이득을 챙기기 위한 밑밥을 깔아 놓는다. 나중에 나를 다리로 삼아 야마구치 구미와 연을 만들어 놓겠다는 심산이 아닌가?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앞으로도 좋은 인연이 계속되었으면 좋겠군요.”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단지, 이강찬 실장님의 형님이 또 방해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비지니스 문제는 이미 해결할 의사가 있으니, 사적인 관계에 대해서 짚어보겠다는 것인데….
이 거래를 성사시키고 싶다면 당신의 형부터 막으라는 뜻이다.
이강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나카에게 손을 건넸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사장님.”
“예. 회사를 대표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강찬 실장님.”
다나카도 이강찬의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지금은 그저 아빠 잘 만난 띨빵이를 만났다고 생각하겠지만, 조금만 있어 보면 사실은 대어였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김태산 씨도 자주 뵈면 좋겠군요.”
이번에는 다나카가 내게 손을 건네었다. 나는 그 손을 꽉 잡은 채 대답했다.
“언제나 환영입니다, 부사장님.”
거래 성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