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마치 내가 한 것처럼. (2)
1985년 11월.
미국과 일본 뉴스에서 앞다투어 기사를 내듯, 열을 올리는 일이 발생한다.
바로 야마구치 구미의 실권자이자 차기 쿠미쵸로 지지를 받고 있던 타케나카 마사시와 그의 부하들이 잡히는 것.
그것도 일본 땅이 아닌, 바로 하와이에서 말이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해외 소식에 둔감할 때라 크게 알려지진 않지만, 미국과 일본은 연이어 속보를 내보낼 정도다.
회귀 전에, 나도 한창 외국 범죄에 대해 공부를 할 때 알게 된 사실이다.
함정 수사하면, 타케나카 마사시와 그의 일당을 검거한 예시를 자주 드는 터라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이 1985년 11월 첫째 주.
내 기억이 맞다면 11월 둘째 주에 사건이 벌어지니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거다.
사건의 개요는 대충 이렇다.
미연방 마약관리국(DEA)이 히로 사사키라는 신분 위장 조사원을 파견해, 타케나카 마사시를 유인한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는데, 막대한 무기 제공이라는 미끼로 하와이에 불러들인 것.
완전히 속아 넘어간 타케나카 마사시는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미연방 마약관리국에게 체포된다. 덤으로 그를 따라나섰던 삼합회의 간부까지 굴비처럼 엮이게 된다.
뜻하지 않은 함정 수사에 이득을 얻게 되는 건 바로 와타나베 요시노리다.
실권자 타케나카 마사시가 일본도 아니고 미국 손에 잡히지 않던가?
와타나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쿠미쵸에 올라 야마구치 구미를 다스린다.
쉽게 말해서,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와타나베는 저절로 쿠미쵸가 된다는 소리다.
“생각보다 빨리 연락을 주셨네요.”
그런데 만약에….
“김태산이라고 했던가? 리턴 컴퍼니의 실장?”
“예. 맞습니다.”
이 모든 걸 마치 내가 한 것처럼 꾸밀 수만 있다면…?
DEA를 이용해 타케나카 마사시를 함정에 빠뜨려, 마침내 그를 미국 손에 넘기고…. 와타나베를 야마구치 구미의 쿠미쵸로 올리는 것이 전부 나의 작품이라고 속인다면?
과연 저 거만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와타나베가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저번에도 말했지만, 감히 내게 장난을 치는 거라면….”
“이보세요, 와타나베 씨.”
나는 와타나베의 말을 중간에 잘라버렸다.
이제부터 최대한 뻔뻔하게 나가야 한다. 마치 내가 당신보다 더 위에 있다는 걸 과시하듯이.
“우리 리턴 컴퍼니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 회사의 모토가 바로 그거거든요.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그림자처럼 머문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와타나베는 저번과 다른 나의 태도에 좀 놀란 눈치였다. 나는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와타나베 씨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우리 회사의 영향력은 상당히 큽니다. 타케나카 마사시 쯤은 식전의 요깃거리도 아닌 것처럼 날려 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내 말을 들은 김종관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하지만 내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는 얼른 상대에게 통역을 해 주었다.
와타나베는 실소를 터트렸다.
“허세 부리지 마, 이 새끼야. 우리 야마구치 구미가 무슨 동네 구멍가게인 줄 알아? 너 따위에게 무너질 곳이었으면 진작 없어지고도 남았어.”
“물론, 저 따위에게 무너질 곳은 아니죠. 하지만 저희 회사 입장에서 야마구치 구미가 동네 구멍가게처럼 보이는 건 맞습니다.”
“뭐야!? 너 이 새끼 감히….”
“저를 이곳에 불렀다는 건!”
언성을 높이려던 와타나베의 목소리가 단번에 멎어졌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곤, 다시 말을 이었다.
“저를 이곳에 불렀다는 건… 타케나카 마사시가 하와이로 떠났기 때문이 아닙니까?”
“….”
와타나베가 침묵하는 것을 보니, 내 예상이 맞는 모양이다. 이럴 땐 쉼 없이 몰아쳐야 한다.
“이제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와타나베 씨. 당신은 우리와 손을 잡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왕이 될 기회를 놓치시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우리 뜻을 받아들인다면 타케나카는 영영 보지 않아도 될 겁니다. 아니, 그는 더 이상 이 땅을 밟지 못할 겁니다. 약속드리죠.”
이 정도 했으면 와타나베도 혼란이 가중될 것이다.
분명 내가 사기꾼 같긴 한데,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보면 내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일 터.
과연 저 사람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혹시라도 내게 장난을 치는 거라면….”
“하하. 당신에게 장난을 칠 정도로 제가 한가한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마지막까지도 와타나베의 속을 긁어 주었다.
그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평상시 모습을 되찾으며 말했다.
“좋아. 우리가 뭘 도와주면 되겠나?”
“그 말씀은 저희와 거래를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다른 것도 아니고, 쿠미쵸 자리가 걸린 문제다.”
됐다. 넘어왔다.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닌텐도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이번에 천성 그룹이란 곳에서 그쪽과 거래를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닌텐도 측에서 거절했죠.”
“천성?”
“예. 한국 기업입니다.”
와타나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닌텐도에게 압박을 줘서 천성과 강제로 거래를 하도록 만들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뭔가 좀 더 거창한 제안을 기대했던 걸까.
와타나베의 얼굴에 당혹감마저 어리고 있었다.
“정말 그거 하나면 되나?”
“예. 아주 간단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거 하나로 와타나베 씨는 야마구치 구미의 쿠미쵸가 되는 겁니다.”
와타나베가 내 제안을 거부할 리 없다. 누구를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회사 하나에 압박을 넣으라는 것일 뿐.
너무나도 간단한 거래 조건이기에 와타나베가 저렇게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리라.
“너무 뚫어지라 보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저희가 바라는 조건은 그거 하나에요. 아, 그리고 야마구치 구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는 게 저희 측 입장입니다.”
날카로운 안광으로 날 바라보고 있던 와타나베는 가볍게 헛기침을 뱉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거래를 지키려면 내가 야마구치를 움직여야 한다는 건데….”
이놈이 엄살은….
지금 위치로도 충분히 야마구치 구미를 이용해, 닌텐도에게 압박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말하는 건 먼저 결과를 봐야겠다는 소리다.
난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저희가 원래 선불을 낸 적이 거의 없긴 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겠군요. 며칠만 기다려 보세요. 곧 좋은 소식이 오게 될 겁니다. 그러니 그땐 꼭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와타나베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줄곧 날이 섰던 목소리가 조금 풀렸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내가 약속을 어길 이유가 없지. 정말 그쪽 말대로 된다면 말이야.”
아직도 의심을 거두지 못한 듯 보인다. 하지만 차라리 저게 낫다.
타케나카 마시시가 붙잡혔다는 뉴스를 보게 되면 엄청 까무러치게 될 거다. 그땐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
“사장님. 뭐가 잘못된 게 아닐까요?”
김종관은 오두방정을 떨며 울상을 지었다.
와타나베와 만남을 가진지 사흘이 흘렀다. 그런데 아직도 타케나카 마사시가 미국에서 붙잡혔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면 소식이 올 겁니다.”
내 말에도 김종관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똥줄이 타긴 한다.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리던가?
아니면 내가 뭘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사실은 1985년이 아니라, 1986년이었다는….
똑똑.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이 호텔의 직원도 아니고 지배인이 직접 나를 찾아왔다.
“김태산 고객님 되십니까?”
나는 김종관에게 손짓해 통역을 하라고 시켰다.
“네. 제가 맞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아, 맞으시군요. 지금 밖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호텔 레스토랑에 있는 룸에 들어가 있으신데, 제가 직접 고객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일반 직원도 아니고, 지배인을 움직일 정도의 영향력 있는 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다. 이게 과연 누구겠는가?
“와타나베 씨가 온 건가요?”
지배인은 조금 경직된 표정을 짓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놈이었구나.
그런데 놈이 여기까지 나를 직접 찾아왔다는 건….
“알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나는 김종관을 대동한 채 지배인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는 직원용 출입구가 있었는데, 그곳은 사실 직원용 출입구가 아니었다. 이처럼 비밀스러운 만남을 위해 마련된 고급스러운 장소인 것. 그리고 그곳에는 와타나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 사람이 여기까지 오는 수고를 했을까?
“일로 와서 앉지.”
자리에 앉아 있던 와타나베가 손을 흔들며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도박을 한 번 걸어보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먼저 찾아뵈려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직접 발걸음 하셨다는 건, 소식을 들으셨나 봅니다.”
난 능청스럽게 와타나베를 떠보았다.
그는 앞에 놓인 술잔을 단번에 들이켜더니, 이내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그쪽 회사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DEA가 움직였어. 설마, 미국 쪽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인가?”
잡혔구나!
DEA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와타나베는 타케나카 마사시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게 틀림없다.
아직 뉴스에 나오진 않았지만, 곧 있으면 모든 방송에서 그 이야기를 다루게 될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천연덕스럽게 와타나베의 말을 받았다.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우리 회사의 영향력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그런 놈 하나 날리는 건 저희에게 일도 아닙니다.”
내 대답에 와타나베는 의심 어린 눈빛을 띠며 내게 물었다.
“그런 회사가 고작 닌텐도 하나를 못 건드린다고?”
“뭐, 사실 저희가 일본에는 아직 손을 뻗치지 못했거든요. 굳이 일본이 아니더라도 닌텐도를 망하게 할 방법은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거기가 망하면 안 되니까, 좀 약한 방법으로 나가는 것뿐입니다.”
“이해가 안 돼? 네가 속해 있는 회사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기나 하냐고. 무려 야마구치 구미의 실권자를 건드린 거야. 거기다가 삼합회까지!”
겁을 주려는 걸까.
미안하지만, 그 잘난 실권자와 같이 붙잡힌 삼합회 간부는 영영 미국 땅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겁낼 이유도 없다.
그 말은 한 번 더 능청스럽게 나가도 된다는 것이다.
“와타나베 씨. 절 보세요. 제가 그따위 놈들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
김종관에게 내 말을 전달받았을 텐데, 와타나베는 침묵을 지키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을 뜻하지 않던가?
“물론, 와타나베 씨가 소문을 퍼뜨리기라도 하시면 제가 좀 곤란해지긴 하겠죠. 리턴 컴퍼니까지 건드릴 수는 없을 겁니다. 말씀드렸듯이, 저희는 존재하되 드러나지 않는 곳이거든요.”
“그런 곳이 잘도 내게는 모습을 드러냈군.”
“하하. 괜찮습니다. 어차피 와타나베 씨는 저희에 대해 아무것도 발설하지 못할 겁니다.”
와타나베는 팔짱을 낀 채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렇게 확신하지?”
이미 올 때까지 온 놈이, 되지도 않는 가오를 잡아보겠다는 건가?
“타케나카 마사시가 어떻게 붙잡혔는지 들으셨죠? 히로 사사키라는 놈에게 홀라당 속아서, 그렇게 된 거 아닙니까?”
“설마… 그 배신자를 보낸 게 너희들이었냐?”
“아아. 진정하시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단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와타나베 씨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한 거죠.”
와타나베는 눈을 부릅뜨며 내 말을 반박했다.
“내가 언제 그 사실을 알았다고!”
“물론 모르셨겠죠. 하지만 야마구치 구미의 오야붕들이 그 말을 믿어 줄까요? 이미 저와 여러 차례 만났다는 거로, 의심을 할 게 뻔합니다. 그럼,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되는 건 누가 되겠습니까?”
그제야 와타나베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타케나카 마사시가 사라지면서 그는 차기 쿠미쵸로 지명되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만일, 그가 외부자와 내통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협공을 받을 수도 있고, 야마구치 구미에서 영구 제명을 당할 수도 있다.
와타나베는 두 손 다 들었다는 듯 말했다.
“완전히 오니가 따로 없네. 너랑 그쪽 회사 쌍으로 말이지.”
“그런 얘기를 자주 듣긴 합니다. 그러니 우리 회사를 적으로 삼기보다는, 아주 좋은 아군으로 돌리는 게 좋으실 겁니다. 전 와타나베 씨랑 척을 지긴 싫네요.”
“몇 번이나 봤다고….”
구겨진 인상을 피며 와타나베가 술잔을 내게 건넸다.
난 그것을 받아들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서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일본에 자주 올 거 같기도 해서요.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면야 저희도 좋죠.”
와타나베도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나도 그쪽이 온다면 환영해 주지. 아, 그리고 저번에 했던 약속은….”
“빠른 시일 내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지.”
나는 와타나베와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이것으로 되었다. 연기는 여기서 끝난 것이다.
그리고 이 사케는 나 자신을 위한 성공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