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모든 곳에 어둠이 있다.
“이렇게 빨리 또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사장님.”
여의도 사무실로 찾아온 강철중과 나는 가벼운 악수를 나눴다.
권용일이 나와 상의도 없이 이 양반을 불러 버리는 바람에, 자리를 잡게 하려 했던 계획이 좀 어긋났다.
“일본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낼 생각입니다. 곧 있으면 강철중 씨와 김아름 씨가 절실히 필요하게 될 일이 생기거든요.”
“그렇습니까?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강철중은 눈을 반짝였다.
그는 내가 4,500만 달러를 어떻게 벌었는지 직접 눈앞에서 보지 않았던가.
내가 말했던 대로, 곧 있으면 강철중과 김아름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는 때가 온다. 그때를 위해 이 두 사람을 미국에 박아놓은 것이었다.
86년 봄. 그리고 가을.
이 두 계절 동안 줄타기만 잘한다면 나는 어마어마한 액수를 만지게 될 것이다. 사실, 내가 이 두 계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목숨을 위협받더라도 메데인 카르텔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앞으로도 씨앗은 계속 뿌릴 것이며, 수확의 때가 오는 날 한꺼번에 거둘 작정이다.
“갑자기 일본으로 가신다는 말을 듣고 조금 놀랐습니다. 거기다가 천성의 이강찬 실장이라면….”
“천성 그룹의 후계자 중 하나죠.”
“글쎄요. 이철호 회장의 막내아들이긴 하지만, 후계자와는 거리가 멀다고 들었습니다.”
이강찬이 천성의 차기 회장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장남에게 모든 걸 물려주어야 한다는 보수적인 세습 방식의 문제도 있겠지만, 첫째 형과 둘째 형의 지속적인 방해로 이강찬이 공을 세울 만한 기회를 얻지 못한 이유도 크다.
거기다가 막내아들이라는 핸디캡이 있지 않던가.
“하하.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혹시 알아요? 뜬금없이 이강찬이 천성의 주인이 될지.”
내 말을 실없는 농담이라고 받아들였는지, 강철중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그쪽과 엮이는 바람에 일본으로 가게 생겼습니다. 미국에서 막 돌아와 힘드시겠지만, 부탁 좀 드릴게요.”
강철중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전 사장님께 고용된 사람이지 않습니까? 마구 부려 먹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만한 보수를 받고 일하는 거니까요.”
최근에 김아름을 통해서 강철중에게 약속한 월급을 지불해 주었다.
웬만한 대기업 이사 정도는 돼야 받을 수 있는 액수를 줬으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가 마음이 한결 놓이네요. 일본에 가도 크게 할 일은 아마 없으실 겁니다.”
“야쿠자와 거래를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쪽이야 우리가 적대적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물론, 좀 거친 사람들이긴 하지만요.”
일본은 겉과 속이 정반대의 나라다.
그 어느 나라보다 예의를 중시하지만, 그 안은 음흉함으로 가득 찼다.
괜히 일본인의 겉모습에 속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그에 반해 야쿠자들은 거친 면이 많다. 그걸 유념하고 가야하는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하겠습니다. 제가 다른 건 못하지만, 사장님만은 꼭 지켜내겠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강철중이 지켜주겠다는 말이 더 믿음이 갔다.
그만큼의 값어치를 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 * *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회귀 전에, 일본은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다녀왔던 것 같다.
21세기가 되면 저가 항공이 많아져, 부산 KTX를 타는 것보다 더욱 싼 가격에 여행을 떠날 기회가 생겨나지 않던가.
지진으로 인한 원자로 폭발 사고가 있긴 하지만,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매년 일본 여행 지수가 높아진다.
일본의 외화벌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해 주고 있다는 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안내원의 말에 따라 우리는 막힘없이 출국수속을 받고 비행기로 올랐다.
오르는 내내 단 30초도 가만히 서 있던 적이 없다. 마치 다 짜인 각본마냥 모든 길이 오픈되어 있었다.
보통은 우리가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이번에는 비행기가 우리를 기다리는 진풍경을 보며 자리에 앉았다.
이래서 전세기를 이용하는 구나….
과연 일전에 내가 탄 비행기보다 더 깔끔한 모습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분은 앉자마자 잠에 드시는군요.”
내 앞에 앉은 강철중이, 내 뒤쪽 왼편에 홀로 앉은 이강찬을 흘깃거리며 말했다.
“주무시는 게 아니에요.”
“그럼….”
“글쎄요. 명상이랄까….”
회귀 전에, 이강찬이 평소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일본에는 처음 가 보시는 거죠?”
내 물음에 강철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갈 기회가….”
우리나라와 일본 외교 상황이 썩 좋지 못하다 보니, 관광 여행을 떠나는 빈도가 아직 낮다.
더군다나 반일 감정의 최고점을 찍는 때가 바로 80년대다.
“일본은 앞으로도 성장 가능성이 높은 나라에요. 그리고 거기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인드도 상당히 열정적이죠. 곧 있으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여행지가 일본이 될 겁니다.”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일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번에 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하는지.”
일본의 정치권과 나라 자체의 문화적인 문제가 많긴 하지만, 비즈니스로 볼 땐 배울 게 분명 있는 나라다.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벌써 기대가 됩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따 라멘이나 한 그릇 같이하시죠?”
* * *
우리가 도착한 곳은 닌텐도 본사가 있는 오사카였다.
공항에서 나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탑승하기 무섭게 이강찬의 말문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생각에 심취하고 있던 터라, 제대로 말씀도 못 나눴네요.”
이강찬의 사과에 나는 손을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전세기는 처음이라, 탑승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하하. 다행입니다. 그래도 사과의 의미로 제가 맛있는 점심 한 끼 사겠습니다. 여기 정말 신선하고 좋은 스시집이 있어요. 괜찮으시죠?”
“예. 그 비싼 스시를 먹을 수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죠.”
이강찬이 말한 스시집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차를 타고 15분 정도 달리니, 금방 도착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스시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미 예약을 해 놓은 모양인지 가게 직원이 깍듯하게 우리를 방으로 인도했다.
나와 이강찬 둘을 제외하고 나머지 경호원들은 모두 밖으로 나갔다.
“보셨나요?”
뜬금없는 이강찬의 물음에 난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여기 직원들. 굉장히 친절하지 않습니까?”
“아, 예. 저도 느꼈습니다.”
“한국도 친절한 곳들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여기 일본은 이렇게 비싼 가게가 아니더라도 친절함은 똑같아요. 서비스 정신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거죠.”
가격과 상관없이 친절하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자세가 관광객들을 끌어모은다.
“하지만 그만큼 꼼꼼한 면도 강해서 아무래도 깐깐한 구석이 있어요. 이번 협상… 꽤 고생스러울지도 모릅니다.”
이강찬도 일본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나도 대충 예상은 하고 있던 일이다.
일본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는 건 90년대부터다.
그런데 나와 이강찬이 그걸 5년 앞당기려고 하니, 당연히 힘이 들 수밖에.
하지만 시기가 앞당겨지면 앞당겨질수록, 엄청난 이익을 거두게 된다는 건 부정 못 할 사실이다.
“최선을 다해 보는 수밖에요. 꼭 그쪽에서 우리와 손을 잡도록 만들겠습니다.”
“제가 마음이 다 놓이네요. 저도 태산 씨가 잘 해내 주실 거라 믿습니다.”
괜히 부담 주기는….
지금은 믿는다고 말하지만, 내가 제대로 된 결과를 내놓지 못하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어차피 이쪽 세계가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는가?
“실례하겠습니다.”
우린 잠깐 말을 멈추고 직원들이 상 위에 놓아 주는 진수성찬부터 즐겼다.
역시, 이강찬이 말했던 것처럼 신선한 스시가 입안에서 살살 녹아드는 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난 뒤, 나는 노인처럼 천천히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 이강찬을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게 하나 있다.
검사 시절 때부터 이강찬에게 묻고 싶은 게 참 많았다.
어떤 비리를 저질렀고, 또 어떻게 저 돈을 해 먹었는지. 하지만 지금 묻고 싶은 건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는가.
난 슬쩍 이강찬을 떠보았다.
“일본 기업들의 서비스 정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실장님께서는 만약 천성의 회장이 되신다면 어떤 기업을 만들고 싶으세요?”
이게 참 궁금했다.
이강찬은 막내아들로 태어나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멀고 먼 후계자 자리.
그는 과연 처음부터 회장이 되기로 야망을 품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어쩌다 보니 회장이 된 것일까?
아니. 천성 회장 자리는 거저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철호도 바보가 아니지 않던가?
아무런 야망도 없는 놈한테 회장 자리를 던져 줬을 리 없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이강찬은 차기 회장 자리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행동한다.
그러다 모든 걸 한 번에 뒤집어 천성의 주인이 된 것이다.
“천성 회장이라…. 하하. 어려운 질문이네요. 제 위로 워낙 형님들이 많아서 말이죠. 천성의 주인이 될 기회가 과연 있을지….”
대답을 피하는 건가.
“그럼, 제가 김태산 씨에게 묻겠습니다. 만일 태산 씨가 천성의 회장이라면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이것 봐라?
교묘하게 답변을 피하면서 대신 내 대답을 들어보겠다?
내가 갑자기 삼천포로 빠지는 질문을 던진 게 잘못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음-. 저라면 말이죠….”
난 내가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기업. 법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건드릴 수 없는 그런 기업. 내 나라가 망해도, 내 회사는 망하지 않는 바로 그런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철호가 주춧돌을 만들고, 이강찬이 그 위에 쌓게 되는 철옹성이 바로 내가 방금 말한 기업의 모델이다.
난 이강찬이 만들게 될 기업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묘사했을 뿐.
실제로 그렇지 않던가.
회귀 전에, 대한민국 헌법으로 도저히 천성 그룹을 건드릴 수가 없었다. 당장 대통령도 겁이 나서 건드리지 않는데, 법조인이 미쳤다고 그 짓을 하겠는가?
설령 정의감에 불타올라 일을 벌인다고 해도 끽해 봐야 집행유예다.
2008년에 이강찬이 수천억의 비자금을 만들고, 경영권 편법 승계와 조세 포탈 혐의를 받아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그때가 되면, 국민들은 드디어 재벌의 폭거를 정부가 막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정권과 법조인, 그리고 언론까지 장악한 천성의 주인을 벌할 방법은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이강찬은 천성 그룹의 생산라인을 전부 가동 중지시키는 극단의 조치를 내세워 결국, 집행 유예로 풀려나게 된다.
“이거… 뭐라고 해야 할지….”
내 대답을 들은 이강찬의 반응은 과연 어떨까?
그는 처음부터 저럴 생각이었던 걸까?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기업.
그것이 이강찬이 꿈꾸던 천성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