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사냥 시작.
4,500만 달러.
20만 달러가 4,500만 달러라는 거금으로 변하는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현재 환율이 892원.
원화로 교환하면 무려 500억이란 거금으로 변한다. 하지만 내가 바보도 아니고 이걸 원화로 교환할 생각은 없다.
적어도 아직은 말이다.
“김아름 씨. 저번에 알아봐 달라고 한 건 어떻게 됐나요?”
“죄송합니다, 사장님. 알아보고 있긴 한데, 확실하게 신용 보장되는 곳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있긴 있다는 건데, 신뢰할 순 없다?”
“예. 이런 쪽일수록 사기꾼은 넘쳐나니까요.”
이럴 땐 스마트폰이 그립다.
회귀 전에, 해외 도박 어플을 이용해 적게는 수천, 많게는 수십억이 웃도는 스포츠 도박 운영 일당을 붙잡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딥웹이라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없는 네크워크 어플을 운영해 많은 돈을 끌어모았다.
실제로 스마트폰이 점차 발달하면서, 해외 어플을 다운받아 불법 카지노부터 시작해 스포츠 도박을 하는 이용자들이 상당히 늘어난다.
한때 내가 그런 놈들을 붙잡고 다니면서 왜 그런 짓을 하고 다니나 했는데….
이제 내가 그런 짓을 하고 있으니, 남 욕하는 놈이 더 하다는 게 백번 옳은 것 같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요.”
“다른 방법이요?”
“예. 그전에 김아름 씨와 강철중 씨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줄곧 생각만 해 오던 것이 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내게 조력할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것도 능력이 출중한 사람. 돈만 주면 내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사람.
충성심은 필요 없다. 그저 돈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면 된다.
난 그런 사람을 원한다.
“두 분은 큰 형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겁니까, 아니면 그분께서 주시는 돈을 따르는 겁니까?”
직설적인 내 물음에 두 사람의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떠보는 게 아닙니다.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해 시시한 조폭 놀이를 하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그저 두 분이 보수를 위하여 화진파에서 일을 하는 건지 알아야겠습니다.”
“만약 돈 때문이라고 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그럼, 제가 더 큰 보수로 두 분을 고용하고 싶습니다.”
돈 때문이라고 하면 난 정말 이 둘을 고용할 생각이다.
김아름과 강철중, 둘 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다.
이 두 사람을 잘만 쓴다면 내가 원하는 바를 충분히 이룰 수 있을 터.
그래서 내가 이 두 사람에게 제안을 건네는 것이었다.
나를 위해 일 해 보지 않겠냐고.
“주로 어떤 일을 시킬 생각이십니까?”
“받아들이시는 건가요?”
“일단,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들어봐야겠죠?”
“흠. 생각보다 복잡하진 않습니다. 제일 먼저 하시게 될 일은 아마 이거일 겁니다.”
나는 약 4,500만 달러가 나눠서 들어 있는 가방들을 상 위에 올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에 든 100달러 뭉치들을 본 김아름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총 4,500만 달러입니다. 이걸 차명 계좌에 넣기보다는…. 회사 하나를 만들어서 그곳에 보관하고 싶습니다.”
“회사요?”
“예. 주식회사도 좋고,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앞으로 미국에서 많은 일을 하게 될 텐데, 저를 대표할 회사 하나쯤은 만들어 두는 게 좋지 않겠어요?”
“유령 회사가 필요하신 겁니까?”
“글쎄요. 때에 따라 다르겠죠. 지금 당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는 김아름 씨가 더 잘 아실 겁니다.”
진짜 회사. 하지만 소유주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그런 회사가 필요하다.
“소유주가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나라에서도 내가 소유주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나의 존재를 숨길 수 있는 회사가 있어야 한다.
김아름은 안경을 위로 추켜올리며 대답했다.
“괜찮으시겠어요? 제 가치는 생각보다 비쌉니다.”
재밌는 여자다. 가격 흥정을 해 보자는 건가.
하긴. 쉽게 나오면 오히려 의심을 해야겠지.
“얼마를 원하십니까? 아니. 큰 형님께 얼마를 받고 계십니까?”
“얼마를 받는 게 뭐가 중요한가요? 제가 얼마를 요구하느냐가 중요하지.”
“좋습니다. 말씀만 하세요. 최대한 맞춰 드릴게요.”
“월 3백. 수당과 보너스는 따로. 업무에 따라 제가 임금 인상을 요청할 수도 있어요.”
월 3백이라.
회귀 전 시세로 따지자면 거의 3,000만원에 가까운 금액을 월마다 내놓으라는 건데, 뭐 그 정도는 지불할 여유가 있었다.
“시원해서 좋네요. 알겠습니다. 계약서라도 써 드릴까요?”
“회사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면 그때 제가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러면 저야 감사하죠.”
김아름은 됐다. 그다음으로는 이 사람이다.
“강철중 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우리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강철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 이번 일로 권용일 회장님께 누를 끼치는 건 아닐지….”
“하하. 걱정 마세요. 큰 형님께는 제가 회사 설립 사실에 대해서 숨기지 않을 생각입니다.”
내 말에 강철중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에 반해 김아름은 조금 의외라는 눈치였다.
“무슨 나쁜 짓을 저지르려고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만드는 것뿐이에요.”
이 둘은 아직 내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별로 남지 않았다.
오물을 뒤집어 쓴 조직이라는 오명이, 그룹이라는 세척제로 탈바꿈되는 날이.
그땐 권용일도 화진 그룹 소속 회사를 미국에 출범시켜, 지부를 만들게 될 것이다.
난 좀 더 빨리 미국에 발을 담갔을 뿐.
물론, 권용일에게 모든 것을 밝힐 생각은 없다.
“단지, 큰 형님께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일일이 까발리는 건 좀 문제가 됩니다. 그런 건 사내 비밀 엄수로 따로 규칙을 만들 테니, 두 분 다 꼭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강철중도 조금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비밀로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 밝히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황.
그래서 고민을 하는 것일까.
도대체 이 사람은 권용일과 무슨 관계이기에 갈팡질팡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걸까.
“사장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말씀하세요.”
“왜 저를 뽑으시는지 모르겠군요. 김아름 씨야 워낙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니 그렇다고 해도, 저는….”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도 있어야죠. 조직으로 말하자면 강철중 씨는 행동대장이랄까요? 아, 물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누군가를 죽인다거나 납치하는 그런 추잡한 짓을 시키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말 그대로 회사 일이죠.”
강철중은 내가 또 다른 범죄 조직을 만들어, 미국에서 세력을 키우려고 하는 줄로만 알았나 보다. 그는 안심하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사장님이 합당하다 생각하시는 금액으로 받겠습니다.”
김아름의 충성도를 의식하고 하는 발언일까? 아니다,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신념을 지닌 사람인 것 같았다. 정말 영감님과의 관계가….
“예. 그러셔야죠. 그리고 제가 앞서 말했듯이 회사 일이긴 하지만, 화진파와 관련된 일은 계속하셔야 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일은 그만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랬다가는 회장님께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하하. 그렇겠네요.”
김아름에 이어 강철중도 넘어왔다.
이것으로 기틀은 좀 잡은 건가.
“사장님.”
“예, 김아름 씨.”
“이제 진짜 사장님이 되셨으니,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저희를 신뢰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김아름은 아직도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띠고 있었다. 난 그런 그녀와 강철중의 의구심을 한 번에 날려 주어야 한다.
“믿는다라…. 전 두 분을 믿지 않습니다. 그저 두 분께 드리는 돈을 믿을 뿐입니다. 두 분도 명심하세요. 전 두 분의 충성심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받은 액수만큼 일해 주시면 됩니다. 앞으로도 이것이 제 회사의 모토가 될 겁니다.”
받은 만큼 일한다.
그건 저 둘이 납득할 만한 액수를 받으면서,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소리다. 만일 그들이 내가 지불한 만큼 일하지 못한다면 해고가 되겠지만, 그 이상을 해낸다면 더 높은 액수를 받게 되는 게 나의 경영 방침이다.
“그리고 전 바보가 아니에요. 설마, 제가 두 분 인적사항에 대해서 조사를 안 했겠습니까? 두 분의 고향이 어디고 가족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낱낱이 꿰뚫고 있습니다.”
김아름과 강철중은 잿빛이 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큰 형님께서는 능력 있는 사람을 밀어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냥 걸러 내십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이 있다면 짓밟으시죠. 그만큼 철저하신 분입니다.”
난 룸 밖을 나서며 멍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는 둘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리고 전 그분보다 더 지독하고 철저한 사람이라는 걸 명심하셨으면 합니다.”
* * *
오늘 벌써 돌아가는 건가.
좀 아쉬움이 많이 남는 미국 여행기였다. 하지만 김아름이 정식으로 회사를 출범시킬 준비를 모두 끝내면, 그땐 다시 이곳에 돌아와 직접 지휘를 할 생각이다.
지금은 한국에 돌아가서 그곳의 일을 해야 한다.
난 아직 학생이지 않은가?
졸업도 해야 되고, 대학도 들어가야 되고… 정말 할 일이 많다.
“태혁이 너는 무슨 일 있으면 김아름 씨한테 꼭 전화해. 알겠지?”
“형은 내가 무슨 앤 줄 알아? 걱정하지 말고 어머니나 잘 모셔.”
“그래. 너 성공할 때까진 형이 어머니 호강시켜드리고 있을 테니까, 싹 다 쓰러뜨리고 금의환향해라.”
“물론이지.”
태혁이는 방긋 웃는 얼굴을 보였다. 솔직히 이놈을 그냥 놔두고 가도 되는지 걱정이 많이 되긴 한다.
그래도 김아름과 강철중이 미국에 있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저 둘이 잘 케어를 해 줄 것이다. 더군다나 무책임하게 사고를 칠 녀석은 아니다.
“태혁아. 운동도 좋지만, 틈틈이 공부도 해야 한다.”
어머니는 태혁이의 손을 꼭 잡으시며 신신당부를 하셨다.
태혁이가 학교를 자퇴하고, 미국으로 넘어온 게 마음에 걸리신 모양이다.
“응, 엄마. 영어는 정말 열심히 공부할게. 나중에는 형보다 더 영어 잘하도록 말이야.”
“형이 다음에 와서 검사한다. 그러니까 땡깡 부리지 말고 열심히 해.”
태혁이는 거듭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같이 리무진에 올라 매캐런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가 만찬을 즐기며 가족 간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비행기 시간이 다가오고…. 어머니는 계속 태혁이가 걱정되는지, 이런저런 같은 말씀을 반복하시며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제 그만 가야 해요, 어머니.”
“으응. 그래야지.”
출국장으로 들어가려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태혁이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놓질 않으셨다.
저렇게 옆에서 떨어지기를 싫어하시는데, 내가 너무 가혹한 짓을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어머니를 남겨 둘 순 없지 않은가.
“태혁아. 형 이제 정말 간다. 곧 다시 올 거니까 그때까지 몸 건강히 있고.”
“응. 형도 몸 건강히 있어. 엄마 잘 모시고.”
조만간 다시 돌아오긴 할 거지만, 막상 태혁이를 이곳에 떼어 놓는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럼….”
손을 흔드는 태혁이를 보며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때였다.
“사장님!!”
갑자기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거구의 몸 하나가 내 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다름 아닌 강철중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거래 물품 수량 때문에 못 오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이 사람이 뛰는 것도 처음 봤고, 이렇게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도 처음 봤다.
얼마나 달려왔으면 체력도 좋아 보이는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분명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우리와 거래한 카르텔에서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쪽과 거래한 물품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기에….”
“자세한 건 모르겠습니다. 내분이 일어난 건지, 아니면 다른 조직에게 공격을 받은 건지…. 아무튼, 그쪽 카르텔이 지금 난리가 난 상태입니다. 로이 루스테도 총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런. 하필이면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때에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누가 겁도 없이 메데인을 건드린 것일까.
정말 강철중 말대로 내분이라도 일어난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태혁아. 무슨 일이니?”
어머니는 먼저 출국장을 들어가셨다가 소란을 듣고 다시 나오신 것 같다.
나는 잠깐 정신이 멍해졌다가 침착하게 대처를 했다.
“어머니. 제가 회사 일 때문에 급하게 다시 호텔로 돌아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오늘 비행기는 아무래도 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응? 아니, 무슨 일이기에….”
“다행히 큰일은 아니에요. 일단, 오늘 비행기는 취소하고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잡도록 할게요.”
“뭐…. 네 일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나도 태혁이랑 좀 더 있어서 좋으니까.”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을 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정말 별일 아니에요, 어머니.”
하지만 앞에서 대충 무슨 일인지 듣게 된 태혁이의 표정은 결코, 좋지 않았다.
“태혁아. 어머니 모시고 먼저 호텔로 가 있을래?”
“혀, 형.”
난 정말 괜찮다는 미소를 띠며 태혁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얼른 돌아가. 형도 곧 뒤따라 갈 테니까.”
태혁이는 알겠다며 어리둥절 하시는 어머니를 데리고 먼저 출발했다. 나는 태혁이에게 보였던 미소를 싹 지운 채 강철중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시죠. 그리고 제가 출국 전에 맡긴 글록, 다시 돌려주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