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아메리카 드림 (2)
비록 시대가 아직 1980년도이지만, 퍼스트 클래스를 만끽하는 기분은 21세기가 되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최고의 서비스로 VIP를 모시는 스튜어디스들의 행동에 어머니는 이따금 깜짝 놀라곤 하셨다. 그건 태혁이도 마찬가지.
나는 실실 웃으며 애써 자연스러운 척을 해 봤지만, 나도 이런 곳은 처음이라 어머니처럼 가끔 몸을 들썩였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니지만, 그만한 게 또 없다는 메이웨더의 말이 문득 와 닿는다.
그러고 보니, 메이웨더는 지금쯤 슬럼가에서 권투를 배우고 있으려나?
필리핀의 영웅 파퀴아오는?
두 사람 다 아직 제대로 된 스폰서도 만나지 않았을 텐데.
“음료 필요하신가요? 아니면 다른 거라도?”
젠장. 나도 모르게 또 몸을 들썩였다.
아까 먹은 디너 코스 요리도 꽤 인상 깊었는데.
난 스튜어디스가 건넨 메뉴를 찬찬히 읽어봤다. 뭔 놈의 비행기에 먹을 게 이리도 많은지 모르겠다. 난 대충 맛있어 보이는 걸 몇 개 고른 뒤 커피 맛을 음미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록 컴컴한 밤이 되었지만, 날씨가 참 푸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내 미래처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 * *
어머니와 태혁이는 처음 비행기를 타본 것도 모자라 퍼스트 클래스를 경험해 보았다는 것에 감격했다. 그러나 그 감격을 뛰어넘는 일이 이곳 라스베가스에서 일어났다.
최고급 호텔, 그것도 스위트룸을 잡아 준 권용일의 선처 덕분에 어머니와 태혁이는 입을 쩍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라스베가스 호텔들은 시설이 좋은데도 가격이 싼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이유로는 바로 저 카지노에 있다.
호텔을 진입하기 위해선 카지노의 입구에서부터 출구까지 거쳐야 하는데…. 자연스럽게 호텔을 찾는 고객이 카지노의 마수에 빠져드는 설계인 것이다.
호텔은 미끼고, 주머니를 터는 진짜 도구는 카지노인 것.
물론, 대한민국 국적의 국민이라면 관광 목적으로 유흥을 즐기는 정도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상습적 도박은 또 얘기가 다른데….
유명 연예인이나 재벌 3세들이 도박 행위를 위한 라스베가스 방문 후, 수십억 원을 탕진한 뉴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같은 시민들이 게임 조금 했다고 대한민국 공권력이 나서진 않지만, 금액이 커지면 문제가 된다. 하지만 굳이 카지노가 아니더라도 라스베가스는 유흥거리가 넘쳐난다.
한 마디로 소돔과 고모라에 불덩이가 떨어지기 딱 직전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편히 쉬십시오.”
“편히 쉬세요. 그리고 이건 말씀하신 티켓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강철중을 따라 정중히 내게 인사를 올린 김아름은 팔에 부착할 수 있는 티켓 두 개를 내게 건넸다.
카지노와 그 외 시설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이다.
아직 내가 미성년자라서 이런 얼굴로 밖에 나돌아 다녔다가는 붙잡히기 딱 좋다. 하지만 이 티켓이 있다면 누구도 제제를 하지 않는다.
로얄 티켓을 가지고 있는 손님이라면,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감히 터치를 하지 않는 게 바로 라스베가스의 법칙이다.
“어머니. 잠깐만 여기에서 쉬고 계세요. 태혁아. 넌 따라와.”
“으응?”
태혁이도 2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퍼스트 클래스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나도 비행기를 타고 몸이 가벼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디 가는 건데?”
“나중에 네 직장 될 곳.”
“뭐?”
난 태혁이를 끌고 호텔에 있는 카운터에서 라스베가스 아레나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라스베가스 하면 딱 두 개를 먼저 말한다고 한다.
하나는 카지노. 다른 하나는 라스베가스 아레나.
바로 세기의 권투 경기들이 펼쳐지는 곳이다.
그리고 오늘은 전설의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의 경기가 펼쳐지는 날이다.
* * *
라스베가스 아레나는 도박의 천국이다.
권투가 흥행할 수 있던 이유는 도박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미국에서 총기 다음으로 뺄 수 없는 게 바로 도박이다. 그리고 도박 중에서 가장 돈을 많이 만질 수 있다는 게 복싱 도박.
이 순간만큼은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내가 우위에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저 사람을 잘 보도록 해, 태혁아.”
헤비급에 걸맞지 않게 작은 키. 하지만 웬만한 펀치로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만 같은 두꺼운 목을 가진 흑인 파이터.
19살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험악한 인상의 소유자.
저것이 바로 핵주먹의 전설을 쌓는 마이크 타이슨이다.
“어때? 아무리 봐도 헤비급 선수인 거 같진 않지?”
라스베가스 아레나에 오고 나서부터 계속 들 떠 있었던 태혁이는, 타이슨이 입장하는 순간부터 말이 없어졌다.
무언가를 유심히 관찰하는 듯, 태혁이는 타이슨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형. 저 사람….”
“응?”
“엄청날 거 같아.”
나야 마이크 타이슨의 미래를 전부 알고 있으니 그렇다고 하지만, 태혁이는 과연 뭘 보고 그런 평가를 내린 것일까.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음…. 뭐라고 설명하기는 그런데, 그냥 딱 보면 알 거 같아. 체격 차이가 상대와 심하긴 하지만, 저 사람은 분명 펀치력이 강할 거야. 언뜻 보면 하나의 탱크를 보는 느낌이랄까?”
나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느낌으로 안다, 이건가?
“아무튼, 잘 봐. 저 사람이 어떻게 싸우는지.”
“어. 좀 기대 되네.”
아직 마이크 타이슨이 메인이벤트로 뛰는 선수가 아니다. 지금은 메인이벤트 전에, 잠깐 볼거리를 위한 선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1년만 있어봐라.
저 남자가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된다. 그것도 고작 20살이란 나이에.
“베팅?”
그때 내 옆으로 동아시아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내가 차고 있는 로얄 티켓에 향해있는데, 아마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먹음직스러웠으리라.
그 뒤로는 두 명의 백인이 있었는데, 돈 갖고 튀는 놈들이 있다 보니 그걸 방지하기 위해 있는 것 같았다.
“오케이.”
아직 수십만 달러에 이르는 돈을 뽑지 않은 관계로 내 지갑에는 백 달러 지폐 열 장이 있었다. 난 망설이지 않고 열 장을 전부 뽑아 상대방에게 건넸다. 유창한 영어는 덤이다.
“타이슨에게 1라운드 KO로 걸겠습니다.”
내 돈을 받은 동아시아인 딜러는 왼쪽 뺨에 나 있는 점을 긁적이며 부정확한 영어 발음으로 말했다.
“오. 알겠습니다. 성함이?”
“워커 김입니다.”
“워커 김. 오케이.”
그는 내 이름을 종이에 적고 표 하나를 내게 건넸다.
“적중하시면 이 종이를 갖고 아레나 입구에 있는 카운터 빌로 오세요. 그곳에서 교환을 해 줄 겁니다.”
내게 검은 색 표를 건넨 동아시아인과 백인 두 명은 밑에 자리에 있던 손님에게 다가가 베팅을 권유했다.
“형. 방금 그거 뭐야? 왜 갑자기 돈을 저 사람한테 준 거야?”
“응. 저 마이크 타이슨이란 사람한테 내 돈을 건 거야. 한국에서도 이런 도박은 많이 하잖아.”
“아…. 그렇구나. 근데 형이 이렇게 영어를 잘 할 줄은 몰랐네.”
“기본이지.”
난 어깨를 조금 으쓱거리며 방금 받은 표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흠…. 막상 돈을 거니 좀 떨린다.
마이크 타이슨이 85년 데뷔전을 갖는 게 바로 오늘이다. 내가 알기로 그는 경기 시작 1분 만에 상대방 턱을 무식하게 날려 버리는 KO 승을 거둔다.
근데 1라운드가 맞던가. 아니면 2라운드였나.
1라운드라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조금 걱정이 됐다. 혹시 내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방금 베팅을 한 건 단순히 누가 이기고 지냐는 승무패 게임이 아니었다.
누가, 누구를, 몇 라운드에 제압하는지를 맞추는 카운트 게임이다.
카운트 게임은 승무패를 맞추는 게임보다 베팅률이 높다. 정확하게 맞추기만 한다면 방금 전 내가 건넨 천 달러가 10배로 불어나는 건 한순간이다.
베팅률이 높은 게임인 만큼 10배가 아니라 100배까지도 오른다.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경기에서는 베팅률이 350배에, 한도금이 500만 달러에 이르렀다고 하니…. 괜히 한탕의 세계로 불리는 게 아니다.
때앵-!
“시작했다!”
1라운드를 알리는 시작종이 울리면서, 태혁이는 흥분된 목소리를 터트리다 이내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타이슨의 모공이라도 꿰뚫어 볼 기세로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경기는 아주 화끈하고도 싱겁게 끝났다.
타이슨의 귀신같은 몸놀림에 상대 선수는 계속 헛방질만 하다 어퍼컷을 맞고 그대로 기절.
완벽한 KO 승리였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단순히 내가 돈을 땄다는 게 좋아서 박수를 치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내가 정말 이곳에 왔다는 이 현실이 실감 나서, 저 마이크 타이슨의 펀치를 직접 보게 되었다는 것이 기뻐서.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기립 박수를 하는 것이다.
“어때?”
난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고 자리에 앉아 태혁이에게 물었다. 이놈이 앞으로 뒹굴게 될 바닥이니, 감상을 듣고 싶어서였다.
“대단하더라. 저 선수. 이름이 마이크 타이슨이었나?”
“그래. 네가 저 선수랑 링 위에서 싸운다면 어떻게 될 거 같아?”
“그거야….”
태혁이는 머리에 깍지를 끼며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설마, 이놈 마이크 타이슨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고 자부라도 할 생각인가.
그냥 농담 삼아 물어본 건데, 이놈은 예능을 다큐로 받아들였다.
“지금은 못 이겨. 저 사람 보니까 전성기 타면 대단할 거 같은데, 그 기세를 쉽게 이길 순 없지.”
“그래?”
‘지금은’이라는 말이 와 닿는다. 아직 자신의 실력으로는 저 남자를 넘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조금 더 있으면 충분히 넘을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태혁이는 이제 막 날개를 피고 있는 중이다.
제대로 된 트레이너를 만나 날개를 다듬고, 나는 법을 배운다면 타이슨이 무섭겠는가? 물론 둘의 체급상 만날 일은 없겠지만, 이 세상 누구도 무서울 게 없다고 난 자부할 수 있다.
* * *
카운터 빌이라고 했던가.
나는 적중된 표를 들고 그 왼쪽 뺨에 점 있던 동아시아인이 말한 곳으로 가 보았다. 예상대로 꽤 많은 도박꾼이 즐비했다.
우리나라와 조금 풍경이 다른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박 게임인 경마장 같은 경우에는 막노동을 하는 아저씨나 노숙자, 혹은 아줌마들이 많다.
그러나 이곳은 베팅 금액부터가 천문학적인 액수로 불어나는 라스베가스 아레나다.
모두 쫙 빼 입은 양복을 입고 차례에 맞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저들 중 대부분이 누군가가 보낸 비서나 심부름꾼일 것이다.
돈 많은 사람이 취미 삼아 노는 곳이 라스베가스이니까.
나도 태혁이와 뒷줄에 서서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우리 같은 동양계 애들이 줄을 서고 있으니 시선이 조금 집중되긴 했지만, 그들은 이내 모두 신경을 꺼 버렸다.
피부 색깔이 어떻든 간에 돈이 곧 최고인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여전히 인종차별이 심하긴 하지만, 이곳은 돈이 중심인 라스베가스 아닌가? 그가 입고 있는 옷과 가지고 있는 지갑 속 지폐들로 그 사람의 높낮이를 평가한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걸 바꾸려고 왔습니다.”
내가 표를 내밀자, 카운터를 보고 있던 여직원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오. 축하드립니다. 1,000달러를 베팅하셨고, 정확하게 적중을 하셨네요.”
여직원은 서류를 꼼꼼히 살피며 뭔가를 열심히 계산하더니, 이내 다시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15배나 따셨네요. 획득하신 금액은 총 1만 5천 달러입니다. 수수료 10%를 떼면 1만 4천인데, 현금으로 드릴까요, 아니면 칩으로 드릴까요? 라스베가스에 있는 전체 카지노 매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칩입니다.”
“4천은 칩으로. 나머지는 현금으로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태혁이는 내가 이 여직원과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1만 달러와 4천 달러에 달하는 칩을 직원들이 내놓자, 이 녀석이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야 이건?”
“뭐긴. 형이 딴 거지.”
“분명 천 달러 준 거 아니었어? 그런데 이건 왜 이렇게 많아?”
“흐흐. 열다섯 배나 벌었거든, 형이.”
돈 좀 있었으면 만 달러를 거는 건데, 아쉽긴 하다. 하지만 그냥 가볍게 손을 풀었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미래는 내가 관여하지 않는 한, 정해진 선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근데 이 칩은 뭐야?”
“오늘 형이랑 카드 좀 만지러 가자.”
“카드? 무슨 카드?”
“오늘 형이 신세계를 보여 줄게.”
로얄 티켓도 있겠다, 난 동생을 이끌고 카지노장으로 향했다.
검사라는 직함 때문에 한 번도 손을 대지 못한 카지노 게임.
오늘 이 4천 달러로 실컷 해 주마.
나 정도면 카드 게임은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