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얼얼한 뒤통수 (4)
황규혁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빠져나가겠구만. 태산아, 넌 어떻게든 빠져나가 봐라. 네 어머님 계속 모셔야지?”
“…예?”
목숨 걸고 싸워서 다 같이 빠져나가자고 할 줄 알았더니.
뭐라고?
“저 새끼 보니까, 우리 죽이려고 처음부터 작정한 거 같다. 저 정도 숫자면 아무리 발악해도 못 이겨. 그러니까 너라도 어떻게든 빠져나가. 그리고 성일환 형님한테 달려가.”
“예?”
천하의 황규혁이 날 살리겠다고 하다니.
감동 받아서 울어야 할지, 아니면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너만은 살아야지, 인마.”
황규혁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박두기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박두기 뒤에 있던 조직원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황규혁을 향해 돌진했다.
이렇게 진흙탕 싸움으로 번질 줄이야.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박두기 저 녀석이 정말 배신을 할 줄은….
아니. 처음부터 저놈은 우리를 배신할 생각으로 손을 잡은 것이었다.
단지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거 하나로 너무 설쳐댄 게 아닌가 싶다.
모든 사람 머리 위에서 내가 놀고 있다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한 것이다.
그런 교만이 씨가 되어 지금의 결과를 초래한다.
하지만….
- 삐빅
마침, 내 귀로 기계음이 들려왔다. 주변에 있던 황규혁에겐 들리지 않은 것 같지만….
“형님!”
기세 좋게 달려 나가던 황규혁이 발을 멈추고, 신경질적으로 나를 돌아본다.
“빠져나갈 준비 안 하고 뭐해! 정신 안 차려?”
“제가 어떻게 갑니까, 형님! 잠시….”
난 황규혁 옆에 바짝 붙어서 박두기가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했다.
“형님. 최대한 버티면서 많이 쓰러뜨려야 합니다. 최대한 많이요.”
“야. 너랑 내가 발악해도 이건 못 이겨.”
“저도 압니다. 그러니까 절 믿고 최대한 많이 쓰러뜨려 주세요.”
여기까지 말했으면 황규혁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것이다.
“너, 설마….”
난 한쪽 눈으로 윙크를 살짝 날렸다. 황규혁은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누구 말인데. 오늘 내가 저 새끼들 다 죽이고 만다.”
풀풀 흘러나오는 황규혁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저 사람이라면 끝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죽자고 모든 걸 계획한 것도 아니고, 맘 같아서는 황규혁의 말대로 기회를 틈타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황규혁을 혼자 놔두고 도망치는 건 죽는 것보다 싫었다.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깡패한테 목숨을 빚질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황규혁을 미끼로 도망친다고 한들, 어차피 가다가 붙잡힐 확률이 높다.
차라리 황규혁과 같이 싸워서 이 아수라장을 뚫는다면 모를까….
그리고 내게는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지 않던가?
“병신들. 아주 발악을 해요, 발악을.”
박두기는 경치라도 즐기러 온 사람처럼 의자에 앉아 손을 까닥였다. 그 신호로 조직원들이 개떼처럼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갈 때 가더라도, 저놈들 멱은 다 따버려!”
숫자 차이가 심하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한 차례 전투를 겪은 상태.
숫자 면에서도 체력 면에서도 우리가 열세이지만, 지금은 독하게 버티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킹을 먼저 쓰러뜨려 체크메이트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황규혁을 따라 활로를 열려던 조직원들 몇이 틈을 잠깐 열어 보았지만, 금세 다시 닫혀버렸다. 그리곤 나로 인해 모두 대치상태를 유지하는 중.
나는 황규혁에게 한 번 더 이야기를 하곤 그들을 주변으로 불러들였다.
“달려들어서 저 새끼들 틈에 박히지 마, 뭉쳐서 오는 놈들부터 조져!”
“예, 형님!”
박두기도 내 외침에 실소를 하며 조직원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뭉쳐있던 우리들에게 달려든 조직원들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칼 다루는 손놀림이 보통이 아닌데….
내 말을 듣고 뭉쳐있던 조직원 세 명이 벌써 칼침을 맞고 쓰러졌다.
우리 조직원들도 꽤 칼을 잘 다룬다. 그런데 저놈들은 훨씬 더 정교하게 급소를 노려 찌르고 있다.
내가 박두기를 너무 무시한 걸까.
저놈도 화진파의 간부가 되기 전까지 수많은 아수라장을 헤치고 왔을 텐데.
당연히 거느리고 있는 조직원들도 실력이 출중하지 않겠는가.
이거, 좀만 방심하면 그대로 저 세상 티켓을 끊게 생겼다.
“이러다가는 끝도 없겠네, 시발.”
몇 명을 헤치운 것인지, 황규혁은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뒤로 빠졌다. 그리고 그는 왼쪽 허리춤에 있던 칼도 꺼내 양손에 하나씩 무기를 들었다.
“아직이냐?”
“예. 아직….”
“야. 뭔지 모르겠지만, 이러다가 우리가 먼저 다 뒤지겠다.”
“벌써 약한 소리 하시는 겁니까? 형님답지 않으세요.”
나도 말은 그렇게 받아쳤지만, 연속된 격전으로 슬슬 지쳐간다.
머릿수 차이도 크고 상대 실력도 뛰어나다는 게 문제였다.
“저 새끼들. 좀 이상해. 박두기 쪽 애들 실력이 저렇게 좋진 않았어. 이거 아무래도… 이런 시발!”
황규혁은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우리 조직원이 있던 다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위험에 빠진 조직원들을 구하기 위해서인데, 나도 얼떨결에 뒤를 따랐다.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계속 싸울 수 있다.
“뭐해? 저 새끼들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죽여 버려!”
“예, 형님!”
입술을 까득 물었다.
이런 얄미운 새끼.
그렇게 밟고 싶으면 직접 자기가 여기까지 오던가.
난 조직원들 뒤에 쏙 숨은 채 고함만 지르고 있는 박두기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저놈에게 접근할 틈이 나면 좋으려만…!
“뒤져, 이 새끼들아!!”
아! 지금인가?
우리 쪽 조직원 중 하나가 수세에 몰려있던 나머지 몸을 먼저 날린 듯했다.
큰 덩치로 무작정 포위망에 달려들면서 미세한 틈이 생겼다.
안타깝게도 포위망을 흔들어 놓은 저 조직원은 여러 번의 칼침을 맞고 쓰러졌다. 하지만 그 희생을 헛되이 할 순 없다.
난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박두기가 있는 방향으로 뛰면서 무릎을 꿇었다.
치지직-!
바닥에 고여 있는 피 덕분에 매끄럽게 슬라이딩이 됐다.
난 두 조직원 사이로 지나가면서 양손에 든 칼로 이놈들의 복부를 깊게 찔렀다.
내가 갑작스레 날린 공격이라 이놈들은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복부에 구멍이 생겼다.
이제 이 길로 박두기한테 달려가면….
핏-!
양쪽 복부에 꽂아 넣은 칼을 뽑는 동시에 난 다시 달음박질하려고 했다. 그런데 내 왼쪽 어깨에 칼끝이 스치면서 두 다리가 저절로 멈췄다.
고개를 돌려보니, 방금 전 내게 복부를 찔린 놈들이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뭐지, 이놈들은?
이 정도 거리면 다 피하지 못한다.
복부에 들어오는 칼 하나쯤은 허용하고, 다시 찔러서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는 건가.
퍼억-!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마주 오는 상대와 부딪히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칼과 손도끼가 날아오더니, 저 두 명의 뒤통수에 정확하게 박혔다. 그제야 이놈들도 힘을 다했는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한눈팔지 마, 김태산! 뭉치라던 놈이 나자빠져 있냐!”
어느새 황규혁도 내 뒤를 따라 움직인 것으로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황규혁의 솜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짧은 거리가 아님에도 손도끼 두 개를 던져서 맞추다니.
저 양반 솜씨는 정말 알아줘야 한다.
아니지. 지금 딴생각을 할 때도 아니고, 박두기 조직원 실력에도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놈들은 전부 화진파 소속이 아니던가?
곧 있으면 대한민국 최고의 조직으로 거듭나는 놈들이니,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줄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하의 김태산도 담가낸 것이고….
그럼 나도 물러설 수 없지.
이런 깡패들한테 또 목숨을 잃을 순 없지 않은가.
콰득-! 콰직-!!
난 황규혁이 던진 손도끼를 죽은 놈들 머리에서 빼낸 다음, 내게 거침없이 달려오던 한 놈의 정수리에 꽂아 버렸다.
방심하고 있을 틈은 없다.
그래. 다 죽어라.
내가 죽나 너희들이 죽나 갈 데까지 가 보자.
더군다나 아직 박두기에게는 한 방도 날려 주지 못했다.
저 새끼 배때기에 칼침을 놓을 때까진 쓰러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 나 참. 지독한 새끼들.”
줄곧 가만히 자리에만 앉아 있던 박두기가 드디어 일어났다.
“야 이 새끼들아. 고작 저 두 명을 가지고 그렇게 애를 먹으면 어떡해?”
조직원들은 아무 말 없이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덕분에 나와 황규혁이 한숨 돌릴 시간을 벌었다.
슬쩍 주변을 바라보니, 우리 쪽 조직원은 거의 전멸이었다.
“황 사장. 그리고 너 핏덩이. 이제 그만 좀 하자. 나도 얼른 집에 가게, 새끼들아.”
박두기의 비아냥거림에 나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습니까?”
“그랬지.”
“그럼, 오성파는….”
“그건 걱정하지 마. 오성파 놈들은 우리가 당장 쳐들어올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으니까.”
이 정도로 많은 조직원을 끌고 왔음에도 오성파를 속일 수 있는 똘마니들이 더 있다는 건가? 박두기가 그 정도로 많은 조직원을 데리고 있었다니. 내가 알기로는 그렇지가 않은….
불현듯 내 머리에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이진용 형님도 이 일과 관련이 있으신 겁니까?”
이진용이란 이름이 나오자, 황규혁도 눈매를 번뜩이며 박두기를 노려보았다.
박두기는 잠깐 말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건 알 필요 없고.”
역시, 이 일에 이진용이 관련된 게 틀림없다.
아. 이제 퍼즐이 풀리는 것 같다. 왜 저렇게 박두기가 자신만만하게 우리 뒤를 노렸는지. 그리고 저 숙련된 조직원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또 이 많은 머릿수는 어떻게 채운 건지도….
난 짧게 웃음을 터트리며 박두기에게 말했다.
“하하. 정말이지… 완벽하게 당했습니다, 형님.”
박두기는 인상을 쓰며 내 말을 받았다.
“이 새끼가 실성했나, 웃긴 왜 처웃어. 그렇게 깝치고 다니니까 이런 날이 오는 거야.”
“저한테 쌓이신 게 많은가 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해외 쪽 업무를 가져갔었죠? 형님께서 맡아 오시던걸요. 고작 고등학생한테 그런 걸 뺏기셨으니, 어지간히 화나셨겠네요.”
박두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아픈 곳을 건드니, 저놈 표정이 좋을 리 없다. 난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찔러댔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형님은 능력이 없고 구시대 사람인데. 거기에 반해 전 능력도 좋고 젊지 않습니까? 슬슬 자리를 비켜 주실 때가 된 거죠.”
“아니, 이 새끼가 지금 미쳤나. 죽을 때가 오니까 발악이라도 하는 거냐?”
“할 말은 다 해야 할 거 같아서요. 언제 또 이런 말을 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뭐야!?”
박두기는 한계가 왔는지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그래. 마음껏 개겨라. 오늘이 네 마지막이니까, 그 정도는 이해해 줄게”
“누가 그럽니까? 오늘이 제 마지막이라고.”
“뭐?”
나는 주머니에 있던 삐삐를 꺼내 보였다.
“이게 뭔지 아시죠?”
“뭐?”
“곧 올 겁니다.”
“무슨 개소리를….”
내 말을 받아치던 박두기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됐다.
“네가 이제 좆 됐다는 말이야, 이 새끼야.”
삐삐 소리가 멈추기 무섭게 창고문이 ‘쾅’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창고 안으로 연합원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김 회장! 자장면, 탕수육 값 받으러 왔다!!”
선봉으로 서 있던 최정식의 고성에, 나와 황규혁을 포위하고 있던 조직원들이 당혹스러운 안색을 띠었다. 저들의 숫자가 적어도 백 명은 넘는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연합원 모두 한 손에 쇠방망이를 든 채 험악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상대가 조직원이라는 걸 모르지 않겠지만, 등 뒤에 있는 아군의 숫자가 백 명이 넘지 않던가. 이 정도라면 무엇도 무섭지 않다는 자신감이 물씬 풍겨 나왔다.
그에 반해 우리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면서 다소 기세가 꺾인 박두기 쪽 조직원들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전개였다.
“뭐, 뭐야….”
그건 박두기도 마찬가지리라.
“내가 설마 너 같은 비열한 새끼를 믿고 여기까지 왔겠냐?”
“너, 너 이 새끼. 그러면 처음부터…!”
“애새끼한테 일도 다 뺏긴 놈이면 수준을 알만하지. 이런 식으로 가족 뒤통수를 때리니까 속이 좀 시원해?”
나는 더 이상 박두기에게 말을 높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놈은 우릴 배신한 순간, 한 조직에 묶여 있는 가족이 아니다. 그저 사형대로 보내야 할 배신자일 뿐.
“하하. 이런 미친 새끼. 지금 핏덩이들 끌고 와서 나랑 한 번 해 보자는 거 같은데, 우린 조폭이야. 너희들이 몇백 명을 끌고 와도 우리한테는 안 돼.”
틀린 말은 아니다.
연합원은 아직 고등학생이고, 이들은 전문적으로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조폭이다. 이 둘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나도 그게 걱정이 돼서, 웬만하면 연합원을 이번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누가 죽기라도 한다면….
“쫑알쫑알 시끄럽네, 저 아저씨.”
정식이가 귀를 후비며 박두기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회장. 혹시, 저 사람들 죽은 거야?”
연합원들은 바닥에 가득한 핏자국과 시체들을 보며 움찔거렸지만, 정식이는 전혀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래. 거의 다 죽었지.”
“그럼… 나도 저 아저씨 죽여도 된다는 거네.”
순간, 알 수 없는 한기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정식이는 품 안에서 칼 한 자루를 꺼냈다. 저 녀석이 칼을 꺼내는 건 나도 처음 보는 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최정식은 박두기에게 시선을 옮기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