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새로운 발걸음 (2)
“서로 인사해라.”
권용일의 집무실에 불려온 사람은 둘이었다. 하나는 우람한 체격과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을 자랑하는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갸름한 얼굴과 날씬한 몸매에 지적으로 보이는 외모를 소유한 여성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철중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아름이라고 합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김태산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권용일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너희 둘이 태산이를 잘 도와봐. 해외 나가서 일하려면 아무래도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한 명은 너무 인상이 무섭게 생겼고, 다른 하나는 예쁜 것 같으면서도 번뜩이는 안광이 참 살벌했다.
이 두 사람과 내가 잘 합을 맞출 순 있을까….
벌써 걱정이다.
“나중에 따로 자리 만들어서 다시 인사하고, 일단 둘이 나가봐.”
오늘은 가볍게 소개만 해주려는 것인가. 제대로 인사를 하고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별도의 자리를 만들어야겠다.
그래도 해외에서 내 업무를 도와줄 파트너들이 아닌가?
“대충 감이 오지?”
“예?”
“둘 다 보통이 아니라는 거.”
“아, 예.”
“잘 데리고 다녀봐. 도움이 될 거야. 저 덩치 큰 놈은 총도 잘 쓰고 칼도 잘 써. 맨주먹으로도 웬만한 놈들은 다 때려눕히니까, 미국 가서 맞고 다닐 일은 없을 게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머리가 똑똑하고 일처리가 좋아. 돈 계산하는 일이나 양키 놈들이랑 거래할 일이 있으면 저 애랑 상의해. 일말고 다른 건 하지 말고….”
“네…?”
“아녀.”
이 영감님이 실없는 소리도 하시고, 참….
한 명은 보디가드, 다른 하나는 비서라고 봐야 하나?
꽤 괜찮은 인선이다.
영감님 땡큐.
“감사합니다, 큰 형님.”
“허허. 이게 다 내 주머니 불리자고 하는 짓인데, 감사는 무슨.”
틀린 말은 아니다.
권용일이 내게 해외 업무 전체를 맡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남들보다 내가 하는 게 더 돈이 될 거라는 판단 때문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 편하라고 저 둘을 붙여 준 것이다.
하지만 마냥 좋다고 볼 순 없는 일. 저 두 사람은 양날의 검이다.
내 일에 도움을 줄 순 있겠지만, 그들은 결코 내 사람이 아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세세히 권용일에게 보고하며 나를 감시하는 역할도 맡았다는 것.
“언제쯤 갈 생각이냐?”
“언제가 좋으세요?”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큰 형님께서 원하시는 날짜에 가겠습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영감님은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다음 달에 미국에서 중요한 거래가 있다. 네가 저번에 준 가루 덕분에 양키 놈들에게 절절거릴 필요가 없긴 해. 근데 마약 말고도 들여올 건 많잖아. 요즘 또 뜨는 게 있긴 하지.”
마약이 아닌 다른 걸 들여오겠다는 건가?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뭐냐. 스테로이드? 운동하는 놈들이 아주 환장하는 게 있어. 그거 한 방 맞으면 효과가 엄청나다고 하던데?”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말하는 건가.
운동선수 중 유혹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악마의 약.
74년 국제올림픽위원회로부터 금지를 당하기 전까지, 많은 올림픽 선수들이 스테로이드를 맞고 금메달을 쟁취했다.
스테로이드를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자 너도나도 약물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
우리나라도 올림픽을 대비해 스테로이드를 마약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엄격한 규제에 나섰지만, 권용일 같은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회귀하기 전에도 도핑 문제가 항상 이슈로 떠오르지 않았던가.
스테로이드제는 앞으로도 영원히 문제로 남을 것이다.
“저도 그게 뭔지 알고 있습니다. 예전 올림픽 선수들이 그걸 맞고 경기에 나서면 메달은 무조건 획득했다고 하더군요.”
“그래. 좀만 있으면 올림픽 한다고 난리들이잖아. 약물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는 거지.”
“그 사람들이 과연 살까요? 도핑에 걸리면 빼도 박도 못 하는데.”
“선택은 그놈들이 하는 거야. 내가 언제 주사 맞으라고 강요했어? 난 그냥 물건 진열만 해 놓는 거지.”
지독한 영감.
자신은 판매만 할 뿐, 강요하지 않았으니 양심의 가책은 전혀 없다는 건가.
역시 천생 장사꾼, 아니지 사기꾼이다.
“요즘 미국도 시끌시끌해. 소련에서 새로 나온 지도자가 개혁을 외치면서 미국과 대화를 하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그놈이 냉전을 끝내려는 거 같은데, 돈놀이하는 놈들은 썩 달갑지 않은 이야기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면서 차갑게 식어 있던 미국과의 관계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 대통령인 레이건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화의 통로를 열고, 무역까지 추진하며 냉전 시대의 종결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냉전의 긴장감을 이용해 무기를 팔거나 주가를 조작하던 놈들이 쪽박을 차게 되었다. 당연히 이 일에 깊숙이 관련이 되어 있는 미국 갱스터들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련의 입장은 다르다.
“반대로 소련 마피아들은 상승세를 타겠네요.”
“응? 소련 마피아들이?”
“예.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을 외치면 외칠수록 마피아들의 힘은 강해질 겁니다.”
“어째서?”
“개혁개방이라는 건 결국 국영기업을 사유화시키겠다는 것도 포함이 되는데, 마약과 무기거래로 돈 좀 만진 마피아들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습니다.”
마피아가 러시아 경제 40%를 장악하고 있다는 통계는 머지않아 나올 것이다. 그들이 급속도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건 전부 고르바초프가 포문을 열고, 옐친의 무능으로 이룬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국영기업만 해도 1500개가 넘고 400개가 넘는 은행을 보유하게 된다.
여기서 끝이 아닌게, 그들은 전 세계적으로 수만 개에 달하는 기업을 운영하게 될 것이다.
“소련 마피아들이 그렇게 성장을 한다고? 그 근본도 없는 놈들이?”
아직 영감님은 소련 마피아들이 곧 세계로 뻗어 나간다는 걸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소련이 붕괴한다는 것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시대가 아닌가?
이런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만큼 지도자의 영향이 크니까요.”
“허허.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나도 빨리 소련으로 가서 한 발 걸쳐야겠구나. 떡고물이라도 떨어지게.”
“너무 서두르진 마세요. 몇 년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권용일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투정을 부렸다.
“뭐야. 아까는 당장이라도 가야 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나는 너 미국에서 돌아오면 바로 소련으로도 보내려고 했지.”
“그게… 가능합니까?”
“아, 좀 힘들긴 할 거야. 거기가 마음대로 비행기 타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대신, 배타고 중국으로 넘어간 다음에는 좀 쉬워.”
고르바초프가 당 서기장이 된 지 아직 1년도 되지 않았다.
소련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가라고 해도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86년에 일어나지 않던가.
괜히 발 잘못 들였다가 피폭당하는 건 사절이다.
“지금 가봤자 아무런 소득도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몇 년은 더 있어야 합니다.”
“그게 정확하게 언제인데?”
“글쎄요. 그건 상황을 잘 봐야겠죠.”
“에잉. 그러다가 늦으면 어쩌려고.”
영감님, 참 걱정도 많다.
내가 설마 그 시기도 모르고 있겠는가?
사유화 시작이 정확히 1990년도부터인데….
이거 물타기만 잘하면 나도 발을 내밀 기회가 생길 수도…?
그나저나 블라디미르 푸틴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나중에라도 그와 인연이 닿아서 손을 잡는다면….
“너 왜 갑자기 잘 말하다가 실실 웃고 있냐?”
“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미국으로 넘어가면 뭐부터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미국에서 뭐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어떤 조직과 거래를 하는 건가요?”
“가면 미스 김이 잘 알려 줄 거야. 그리고 갱스터 놈들이랑 괜히 싸움 만들지 말고 잘 지내. 그것들이랑 한 번 마찰 생기면 난리도 아니야. 거기서는 뻑하면 총 쏘니까.”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거기는 방아쇠를 한 번 당기는 것으로 목숨이 날아가지 않던가.
“잘 알겠습니다.”
“허허.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그리고 얘기는 잘 들었다. 대룡파 새끼들을 너 혼자 아주 박살을 냈다고 말이야. 들리는 활약상이 아주 대단해.”
“별로 한 건 없습니다. 성 사장이 다 한 거죠.”
“어이구. 어울리지 않게 겸손 떨기는. 아무튼, 고생 많았다. 저놈 새끼가 총을 남발하긴 했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처리했잖아. 그러니까 내가 아무 말 않고 있는 거야.”
역시,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아무래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겠다는 것이다.
성일환이 운이 좋았다.
“내가 우리 태산이 온다고 소고기 사놨는데. 어때? 벌써 군침이 돌지?”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아니긴. 네놈 눈빛이 벌써 반짝이고 있는데.”
“정말 아니라니까요, 큰 형님?”
“허허. 그럼, 먹지 말고 그냥 가던지.”
진짜 확 가버릴까 보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저를 위해 사 놓으셨는데, 그냥 가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말입니다.”
“허허, 퍽이나….”
권용일은 비웃음이 만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참는다.
절대 내가 소고기 때문에 가지 않는 게 아니다.
저 영감님이 삐지면 곤란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거다.
“그런데… 한우인가요?”
* * *
“이 자식. 얼굴 멀쩡한 거 봐.”
다음 날 나를 반겨 준 것은 황규혁이었다.
언제 왔는지 여의도에 있는 내 사무실에서 팔자 좋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대낮부터 술이라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있지. 우리 동생이 대룡파를 박살냈다고 하는데, 안 좋을 수가 있겠냐?”
“별로 한 건 없습니다. 성일환 형님이 다 하셨죠.”
“우리 형님 말씀은 또 다르시던데. 네가 날뛰어 준 덕분에 그놈들 잡기가 더 수월했다고 말이야. 거기다가 우리 애들도 자기 자랑마냥 네 얘기를 얼마나 하던지…. 듣는 내가 다 귀찮았다.”
황규혁은 내 앞에 잔을 놓고 술을 따라 주었다.
“한잔하자. 어떻게 된 게 네놈이랑은 술 한 잔을 해 본 적이 없냐.”
“저 술 안 먹는 거 아시면서….”
“야, 오늘은 기념적인 날이잖아. 그냥 마시는 척이라도 해.”
황규혁과 술을 마시는 걸 계속해서 미루다 결국 오늘까지 오게 되었다. 더는 피할 수만은 없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형님이 주시는 건데, 받아야죠.”
나도 모르게 침이 절로 삼켜졌다.
이게 얼마만의 술이란 말인가. 하지만 예전처럼 술을 많이 마실 생각은 추호도 없다. 술 때문에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지 않았던가.
“딱 한 잔만 받겠습니다.”
“나도 두 잔 주기 아까워. 이게 얼마짜리 술인데.”
맥캘란 30년산.
나중에는 맥캘란이 면세점에서도 팔게 되고 가격이 많이 내려가긴 하지만…. 대량 생산으로 만든 게 아닌 한정판으로 만든 맥캘란 30년산의 가격은 더욱 비싸진다.
한 병당 3500만원은 기본이고, 샷 한 잔에 60만원으로 판매된다. 대신, 한정판이 아니라 대량 판매용은 한 병당 50만 원 정도.
현재 한국에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구매할 수가 없다.
성일환과 황규혁이 워낙 술을 좋아해서 구해온 거 같은데….
“눈이 왜 그래? 술 모른다는 녀석이.”
“평상시와 똑같습니다.”
“내가 네놈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도 모를 줄 아냐. 뭐야? 너 술 싫어한다면서.”
“아니. 정말 아니라니까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황규혁이 나를 살펴봤다.
내가 걸신들린 놈처럼 그렇게 뚫어지라 쳐다본 건가?
“일단, 마시자.”
“예, 형님.”
이게 뭐라고 심장이 다 두근거린다.
난 슬쩍 사무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저번에도 이런 역사적인 순간에 이진용이 난입해서 산통을 깨지 않았던가.
“크으-.”
다행히 이번에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잔을 깨끗이 비웠다.
맥캘란은 난생처음 먹어보는 건데, 왜 그렇게 사람들이 이 술에 미치는지 알 것 같았다.
맥캘란 특유의 향과 깊은 맛, 특히 진득한 면이 일품이다.
“한 잔 더 할래?”
난 조용히 빈 잔을 내밀며 답을 대신했다. 황규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킬킬 웃으면서 잔을 채워 주었다.
“새끼. 끝까지 안 마신다고 뻐기더니, 이거 보니까 아주 술꾼이었구먼.”
“이제 겨우 두 잔째인데요?”
“척 보면 알아, 인마. 네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사실 틀린 말은 아니라서 부정은 하지 않았다. 나도 황규혁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는 정겨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가끔 한 잔씩 하자. 동생이랑 이런 시간 보내는 것도 기분이 좋네.”
“예, 저도 형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그래? 다행이네. 난 네가 술 마시는 걸 꺼리기에 좀 아쉽긴 했지.”
“자주 마시는 건 좀 그렇습니다. 가끔이면 괜찮을 거 같아요.”
황규혁은 날 슬며시 바라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멀었구먼.”
“예?”
“술에도 무게라는 게 있는 거야. 그걸 잘 모르네.”
술에도 무게가 있다?
이건 과연 무슨 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