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원한은 없다. (1)
판치기라는 것이 있다.
조직 내부의 간부가 경찰에게 막대한 정보를 넘겨주는 대가로 자신의 안위를 챙기는 수법이다.
경찰에게 조직의 중요 정보를 내준 다음 자신은 밀항을 통해 해외로 도피를 하는 건데, 몰락하는 조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다.
그 패턴은 정해져 있다.
자기의 죄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관련된 사업장을 모두 접거나, 아니면 다른 간부들에게 선심 베풀 듯 나누어 준다. 또는 사업장을 늘려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는 것이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면 한 번에 모든 걸 터트린다.
경찰이 범죄를 저지른 간부들을 잡아가는 동안, 자신은 은밀히 배를 타고 중국이나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
이재훈 이놈이 지금 그 짓을 하는 중이었다.
“이재훈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그놈 나와바리가 포항이야. 거기에 있겠지.”
“제가 볼 땐…. 이재훈이 지금 홀라당 다 해 먹고, 외국으로 뜨려는 것 같습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박세훈의 안색이 굳어 버렸다.
“외국으로?”
“예. 전형적인 수법 아닙니까? 해 먹을 건 다 해 먹은 다음에, 똥이란 똥은 다 싸놓고 뒤처리는 남겨진 사람들이 하게 하는 것. 경찰이랑 쇼부를 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정도 말했으면 박세훈도 대충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도 이 바닥에서 꽤 오랫동안 굴러다니지 않았던가.
“시발. 듣고 보니 이거 뭔가 착착 맞아 떨어지는데?”
속이 타긴 타는지 박세훈은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좀 이상하긴 했어. 그 욕심 많은 새끼가 갑자기 사업장을 차례로 접을 때만 하더라도, 천성이랑 손잡고 다른 걸 하려는 줄 알았지. 그런데 반대로 우리 사업장은 늘려 준다? 이건 김 사장, 네 말 대로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후레자식. 아무리 급하다고 자기 식구를 전부 팔아먹을 생각을 하면 어떡하나?”
타이밍 맞게 성일환이 박세훈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 개새끼. 그 새끼가 정말 다 팔아넘긴 거라면 발악을 해도 잡히는 건 똑같을 텐데….”
박세훈이 혼잣말로 짜증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는 위로하듯 그에게 슬쩍 떡밥을 던져 주었다.
“아직 경찰과 작전을 공모한 건지는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그놈이 한국을 뜨기 전까지는 경찰들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겠죠.”
“그놈이 뜨기 전에 치자?”
“예. 혹시 이재훈과 대립각을 이어 가던 간부가 있나요?”
“뭐 또, 좋은 생각이 있나 봐?”
박세훈은 벌써 담배 하나를 다 피고 재떨이에 비볐다.
그러곤 기대에 찬 눈빛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몇 있었지. 그런데 이재훈 그 새끼가 천성이랑 손잡고 전부 보내버렸어. 한 명 빼고.”
“그 한 명이 누굽니까?”
“송진운이라고 마포 쪽에 나와바리를 가진 놈인데, 이재훈이 전부 다 보내버리는 거 보고 알아서 꼬리를 내린 놈이야. 물론, 언제든지 이재훈을 물어뜯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긴 해.”
송진운이라-.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그래도 이재훈을 상대할 만한 녀석이 하나 있다는 건 다행인 일이다.
역시, 대조직은 대조직이란 말인가.
군부한테 두들겨 맞고 보스까지 잡혀간 대룡파이지만, 아직 건실한 힘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진 못하겠지만.
“그 사람을 박 사장님이 움직이게 해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송진운 그놈을? 안 돼. 그 새끼는 대룡파를 삼키길 원하지, 화진파 밑에 들어가는 건 원하지 않을 거야.”
그런가.
송진운이 그런 놈이라면 왜 내가 모르는 이름인지 알겠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대로 일이 흘러갔다면, 분명 권용일과 대립하다 개죽음을 당할 놈이겠지. 아니면 군부 손에 아작이 나거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재훈은 지금 미친 듯이 사업장을 늘리면서 간부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밖에 없을 겁니다. 다른 간부들과 만나서 사정을 설명한 다음 힘을 모으세요. 사장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간부들이 꽤 있지 않습니까?”
“좀 있긴 해. 근데 그렇게 많진 않아.”
“하지만 그분들이 전부 모여서 송진운에게 힘을 실어 준다면, 이재훈을 충분히 몰아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사업장도 다 접고, 다른 간부에게 뿌리는 바람에 이재훈의 세력도 많이 약해졌을 텐데요.”
내 이야기를 곰곰이 듣고 있던 박세훈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처음에는 송진운에게 힘을 실어 주고…. 그다음에는 화진파와 손잡고, 송진운의 뒤통수를 치자는 거냐?”
박세훈이 송진운과 조직 외적으로 친한 관계라면 수틀릴 일이지만, 그럴 거였다면 진작 같이 화진파로 왔을 것이다.
“예. 바로 그겁니다. 여러 간부가 지지하고 있고, 설상가상 이재훈은 경찰한테 대룡파 전체를 넘기려고 합니다. 송진운은 의심할 새도 없이 바로 사장님의 손을 잡게 될 겁니다. 의심을 한다고 해도 송진운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인간은 어차피 다 똑같지 않은가?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냉정하게 생각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이재훈이 경찰과 한패라면 송진운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박세훈을 비롯한 여러 간부와 손을 잡고 이재훈을 몰아내는 것.
지금이라도 당장 대룡파를 얻고 싶다는 그 마음이 송진운의 판단력을 흐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박세훈을 의심한다고 할지언정, 이재훈이 모든 것을 경찰에게 넘기는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이게 함정이라는 걸 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박세훈의 손을 잡아야 할 것이다.
“이봐, 성 사장. 앞으로 이 친구가 있으면 나쁜 짓도 못 하고 살겠어.”
박세훈은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였다.
“박 사장 말대로 요즘 내가 이놈 눈치 보고 산다니까? 이놈이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거든. 이런 놈이 옆에 있으면 피곤하지. 내가 몰래 뭔 짓이라도 하면 큰 형님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칠 테니까.”
서로 쿵짝거리는 걸 보니, 둘이 죽이 잘 맞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일까?
“그럼, 결정 났네. 이재훈이 정말 짭새 새끼들한테 우리를 팔아넘길 생각이라면, 지금쯤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을 거야. 그동안 나는 간부들 모아서, 그 새끼 배때기에 칼 한 자루씩 꽂아야 속이 풀리겠어.”
“그래. 어디 한번 잘 해 보자고.”
박세훈과 성일환이 손을 맞잡았다.
동맹이 체결된 것이었다.
* * *
박세훈의 배웅을 받으며 나와 황규혁은 명동 나이트 밖을 나왔다. 나는 윤형렬에게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저 녀석은 아마, 저 어린 새끼가 왜 자꾸 날 쳐다보나 싶을 거다.
넌, 나중에 한번 보자.
“너 좋아하는 소고기라도 먹으러 갈까?”
“아니, 도대체 누가 그러는 겁니까? 제가 소고기 좋아한다고. 그냥 먹는 거지,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흐흐. 웃기지 마.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러더라. 네놈이 소고기만 보면 눈이 돌아간다고.”
그런 헛소문을 도대체 누가 퍼뜨린 거야?
물론, 소고기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때마침 저녁 시간대라 성일환과 나는 오랜만에 같이 한식당을 가게 되었다.
저번 날 어머니에게 면박을 주다 황규혁한테 된통 깨진 그 한식당이었다.
소고기에 살짝 핏물이 고이며 구워지자,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불판 위에 있는 소고기를 전부 비우고 말았다.
“역시, 소문이 사실이긴 사실이었나 보네. 소고기만 보면 아주 정신을 못 차리네.”
“아닙니다. 그냥 배가 고파서….”
“하하. 더 시켜 줄 테니까, 마음껏 먹어.”
난 우걱우걱 씹던 소고기를 삼킨 다음, 성일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대룡파 간부들과도 안면이 있으셨네요.”
성일환은 잔에 담긴 술을 홀짝 마시며 대답했다.
“아, 박 사장? 다른 간부는 나도 몰라. 박 사장이야 명동에서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니까. 내 나와바리가 거기잖아.”
그러고 보니 성일환의 사무실이 명동에 있었지?
황규혁 사무실이나, 여의도에 있는 내 사무실에서만 봐서 그런지 성일환이 있는 명동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대룡파나 오성파, 아니면 청룡파에 있는 간부들과도 몇 번씩 마주치긴 해. 구역싸움 할 때 마주칠 때도 있고, 그냥 지나가다 볼 수도 있는 거지. 어쩔 땐 식당에서 마주칠 때도 있고.”
“식당에서 마주치면 난감할 거 같습니다.”
“꼭 그렇진 않아. 우리가 뭐 만나면 바로 연장 들고 싸움부터 하는 줄 알아? 그냥 서로 가볍게 인사하고, 날이 좀 좋으면 술이나 한잔 같이 하고 그러는 거지. 박 사장이랑도 그렇게 만났고.”
눈이 마주치면 서로 으르렁대기부터 하는 건 행동대장이 할 일이다. 성일환은 고급 간부이지 않은가?
저 정도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초면부터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싸움보다는 술 한 잔 나누면서 가까워지는 게 더 이득이라는 걸 아는 것이다.
사람 일이라는 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거니까.
“그나저나 네놈은 언제 여의도 가져갈 거야? 내가 명동도 보고, 내 나와바리도 아닌 여의도에 계속 신경 써야겠냐?”
“저도 관리를 하긴 합니다만….”
성일환이 젓가락으로 상을 내려치며 언성을 조금 높였다.
“웃기고 있네. 드문드문 얼굴만 비추러 나타나는 놈이 무슨!”
“죄송합니다. 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힘들 것 같아요. 그리고 미국에도 가 봐야 하고요.”
“맞다. 너 해외 업무도 다 맡았지?”
성일환은 술잔을 들이키며 짙게 한숨을 내쉬었다.
“밑에 있는 놈이 잘나니까, 윗대가리인 내가 다 피곤해지네. 살살 좀 해라, 인마.”
“그래도 구역이 늘어나면 좋지 않으세요?”
“그 넓은 곳을 나 혼자 관리하려니까 힘들지! 내가 큰 형님인 줄 알아?”
“황규혁 사장도 있잖아요.”
“그놈은 영등포 관리하는 거로도 벅차. 오성파 새끼들이 저번 일로 날뛴 덕분에, 그거 뒤처리하느라고 뛰어다니고 있잖아.”
오성파는 화진파를 영등포에서 밀어 버리기 위해 물밑 작업에 들어갔었다. 하지만 아편굴 사건이 터지면서 지금은 오성파도 주춤거리고 있는 상태.
삼대 조직인 대룡파가 군부 손에 박살 난 것도 봤을 테니, 당분간은 쥐 죽은 듯이 살 것이다. 그동안 황규혁은 뒤집어진 사업장을 다시 열고 안정을 되찾아 가는 중이었다.
더욱이 화진파가 이번 아편굴 사건 때문에 큰 이익을 얻으면서, 황규혁이 그 돈으로 인력 증원을 하고 있다.
다음번에는 오성파에게 간단히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빠르게 일처리를 다 끝내고, 정식으로 여의도 관리를 인수인계 받겠습니다.”
“농이다, 농이야. 네가 지금 해야 할 게 미국 일도 있고, 천성이랑도 엮인 게 있잖아. 대룡파 일도 해결해야 하고. 도대체 일을 몇 개나 벌린 거야.”
좀 많이 벌리긴 했다.
그러나 천성에서 아직 내게 이렇다 할 연락이 없는 상태다.
“천성 일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한테 온 연락이 없거든요. 그냥 제 아이디어만 쏙 빼간 건지….”
“뭐, 귀찮은 일 하나 줄었으면 된 거지. 그러니까 다른 것도 후딱 끝내. 나도 너 대신 일하니까 힘들어 죽겠다.”
이 양반이 엄살은….
저렇게 죽는소리를 하니, 오늘은 내가 밥값을 내게 생겼다.
“죄송합니다, 형님.”
나는 사과에 뜻을 담아 성일환의 잔에 술을 채워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대룡파도 잘 부탁드립니다.”
“응? 대룡파를 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성일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룡파를 접수하게 되면 형님이 다 맡으셔야죠. 형님이 박세훈 사장과 손잡고 이뤄낸 합작이 아닙니까? 큰 형님께서도 반대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
자신의 일이 줄긴커녕 훨씬 더 늘어났다는 걸 깨달은 성일환의 얼굴이 꽤 볼만 했다.
“인마. 우리 같은 놈들은 나와바리가 늘면 좋은 거긴 하지, 그런데 지금 내 짬에 그럴 건 아니잖아? 너 지금 학생이라고 나한테 다 짬 때리는 거냐!”
“제가 졸업만 했으면 형님의 수고를 덜어드리는 건데, 죄송합니다. 아직 제가 너무 어려서요.”
“하-. 핑계는 아주….”
성일환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깨끗하게 잔을 비웠다. 지금은 저렇게 힘들다는 타령을 하지만, 내 말대로 대룡파까지 든든하게 맡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지금부터 힘을 기르지 않으면,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독사를 막지 못하기 때문이다.
권용일이 죽은 후, 이진용이 단숨에 성일환의 숨통을 끊어 버린다.
가마솥에 삶아지는 사냥개 꼴 나기 싫다면, 힘을 기를 수 있는 만큼 길러야 한다는 것.
그래야 성일환한테도 좋고 나한테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너무 일만 벌이면서 다니지 마라. 뒤에 있는 사람들이 힘들다. 박자 좀 맞춰.”
“명심하겠습니다.”
“어휴. 대답은 잘해요.”
성일환은 내가 절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반대는 하지 않고 끝까지 지지해 주려고 한다.
이 사람이 내 아군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어? 언제 또 다 먹었어?”
“이번에는 몇 점 안 먹었습니다.”
“구라치지 마. 뱃속에 소고기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들었나. 역시, 소고기에 미친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아니,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참나. 언제부터 저런 헛소문이 퍼졌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어떤 놈이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 잡아 놔야겠다.
“그런데… 소고기 더 안 드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