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계속되는 만남(3)
“아니, 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호출을 받고 회장실로 달려간 이강혁 부회장은 정인재 대표로부터 뜬금없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부회장님께서 대룡파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관계를 끊으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강혁이 회장 이철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사람이 저렇게 침묵을 한다는 건, 정인재 대표와 생각이 같다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갑자기 왜?
이철호 회장과 정인재 대표의 정보망이라면, 자신이 대룡파와 손을 잡고 있다는 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 이렇게 브레이크를 거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정 대표 말 들어라.”
“회, 회장님.”
이강혁이 감히 목소리를 높이자, 이철호는 호랑이 같은 눈빛으로 그를 한 번 노려보았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라면 이글거리는 이철호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받을 수가 없지 않은가.
이강혁은 마른침을 삼키며 금방 꼬리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알면 됐다. 그런 깡패들이랑 어울려서 너한테 좋을 거 뭐 있겠냐? 가서 호구 짓이나 하고 오겠지.”
이강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게 따지면 이철호도 화진파와 놀아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마치 그 생각을 다 읽었다는 듯 이철호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화진파와 대룡파는 차원이 다른 곳이야. 대룡파가 군부 손에 찢어졌다는 걸 네가 모르진 않을 테고. 곧 있으면 사라질 놈들한테 돈 퍼다 줘서 뭐 하려고? 그걸로 네 앞가림이나 해.”
이강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숙인 다음 회장실 밖을 나왔다. 물론, 나가면서 정인재 대표에게 매서운 눈길을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이철호는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쯧쯧. 부회장이나 된 녀석이 아직도 저렇게 그릇이 작아서야. 거기다가 머리 굴리는 것도 시원치가 않아.”
“이강혁 부회장이 대룡파와 엮이는 걸 보고, 전 회장님이 금방 움직이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왜? 제 놈이 당한 걸 화진파에게 고스란히 갚아 주겠다고 일을 벌이는 건데, 하고 싶은 대로 놔둬야지.”
역시, 이철호 회장은 이강혁 부회장의 행각을 동인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강혁이 화진파에게 제대로 한 방 맞지 않았던가?
겉모습만 봐도 그 답답한 기분이 정인재에게 전해졌다.
“멍청한 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똑같은 놈에게 당하다니.”
이철호가 이강혁에게 가장 화가 나는 부분은, 두 번이나 똑같은 사람에게 당한 것이었다. 그것도 아직 18살밖에 되지 않은 학생에게 말이다.
“그렇게 못마땅하셨으면 부회장을 좀 도와주지 그러셨습니까?”
“저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내 도움이나 받고 살아야 해? 그리고 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직접 나를 찾아와서 당당히 거래를 하자고 요구했어. 18살밖에 안 된 놈이 말이야. 이미 강혁이와 그놈의 그릇 차이가 달라도 너무 달라.”
“그럼, 이번에 이강혁 부회장이 아니라 김태산의 손을 들어주신 이유가…. 오로지 천성 때문이란 말씀이시군요.”
“다른 이유가 뭐 있겠나. 비즈니스에 사사로운 감정을 넣어서는 안 돼.”
정인재는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며 은근하게 물었다.
“정말 사사로운 감정이 없으십니까?”
이철호는 조금 찔렸는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김태산 그놈이 금양 그룹한테 한 방 먹이자는 소리만 안 했어도 강혁이를 도와줬겠지만.”
“하하. 그 친구가 회장님의 아킬레스건을 제대로 건드렸네요.”
이철호도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정인재에게 물었다.
“그래서, 넌 그놈 보니까 느낌이 어땠어?”
정인재는 조금 난처한 얼굴빛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한 마디로 겁대가리가 없다는 건가?”
“하하. 회장님 말씀이 맞네요. 그 친구가 겁이 없긴 한 거 같더군요. 그런데 보는 시야가 넓고 통찰력 뛰어납니다. 정신 개조만 좀 된다면 옆에 두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나긴 했습니다.”
“인재,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그놈이 확실히 난 놈이긴 한가 보네.”
이철호는 정인재 대표의 결단력을 지금까지 믿어 주었다. 왜냐하면 항상 좋은 결과만을 내놓던 사람이니까.
이번에도 그는 정인재 대표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그럼, 세가랑은 작별하고 닌텐도로 돌아서는 건가?”
“예. 그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 놈들이랑 비즈니스하는 게 영 까다로운 게 아닌데. 세가 쪽 구멍 뚫느라고 시간 좀 버렸잖아.”
일본이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관점은 아직 부정적이다. 특히 비즈니스에 입각하면 더욱 그렇다.
현재 군부가 한국을 꽉 틀어잡고 있지 않은가?
이런 곳일수록 좋은 시선을 보내긴 힘들다. 더욱이 아직 일제강점기라는 앙금이 서로 남아 있는 상태라 외교 관계도 활발하지 않은 상태였다.
“제가 잘 구슬려 보겠습니다. 그 뒤는 강찬이와 김태산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그래. 구멍만 잘 뚫어주고, 나머지는 그 둘한테 맡겨. 넌 반도체 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내년에 우리 사돈이 똥 씹은 표정을 내가 꼭 봐야 속이 풀릴 거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회장님.
이철호는 벌써 금양 그룹 회장의 찌푸려진 얼굴이 떠오르는지, 입가로 호선을 그렸다. 반도체와 더불어 게임 산업까지 호재가 겹친다면, 연타로 사돈의 얼굴을 때릴 수 있지 않은가?
쌍코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금양 그룹 회장 얼굴을 얼른 보고 싶었다.
* * *
“태산아!”
아침 댓바람부터 여의도로 찾아온 성일환은 양팔 벌려 나를 껴안았다.
“저기… 형님?”
“하하. 이놈 새끼! 또 제대로 한 건 올렸구나!”
“예?”
성일환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위스키 한 병을 땄다.
아…. 저거 내가 일부러 아껴둔 건데.
“박세훈한테 급하게 연락이 왔더라. 이강혁 그놈이 갑자기 대룡에서 손을 떼는 바람에 지금 난리가 났다고.”
천성 전자의 면접 결과는 대룡파의 혼란으로 대신 듣게 되었다.
이강혁 그놈, 지금쯤 속이 부글부글 끓을 것이다.
“네가 또 뭔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겠다만, 가장 큰 장애물이 사라진 거야. 박세훈이랑 쇼부만 잘 보면 대룡파 흡수하는 건 순식간일 거다.”
“그래서 말인데. 같이 갈까? 박세훈 만나러.”
박세훈을 직접 만난다라.
썩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거기다가 내가 유독 박세훈을 잘 기억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그놈 옆에서 딸랑거리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놈,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알겠습니다. 형님.”
난, 한번 얼굴이나 보자는 마음으로 성일환의 뒤를 따랐다.
물론, 나는 지금 박세훈의 얼굴이나 보자고 시간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박세훈 옆에 있다가 자연스레 화진파로 들어오게 된 행동대장 윤형렬.
훗날 화진물산 부장이 되어 나와 연욱이를 죽인 그 새끼의 면상을 보러 가는 것이다.
* * *
“오랜만이오, 성 사장.”
박세훈의 얼굴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룡파가 시끌시끌한 거 때문인지, 얼굴이 수척해 보였다.
난 슬쩍 박세훈 옆에서 넓은 어깨를 자랑하고 있는 윤형렬을 바라보았다.
딱히 이가 갈리거나, 피가 거꾸로 솟지는 않는다. 이미 그런 마음은 변한 지 오래다.
어차피 저놈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던 게 전부일 테니까. 다만, 그때 겪은 수모를 조금이라도 갚아줘야 속이 풀리지 않겠는가?
“박 사장. 이렇게 얼굴 보고 말하는 게 몇 년 만이지?”
“한 3년 됐지. 그쪽이야 오성이랑 짝짝꿍 하느라고, 우리 대룡이랑은 놀아 주지도 않았잖아.”
성일환과 박세훈은 악수한 손을 꽉 잡은 채, 오랜 친구라도 만난마냥 신변잡기를 이어 갔다. 그러다 술상이 들어오고 서로의 잔에 술이 채워지자, 두 사람의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물론, 박세훈은 당당히 합석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저 친구는….”
“아, 박 사장은 잘 모르겠네. 인사해. 김태산이라고 우리 귀염둥이 막내야. 이래 보여도 이 친구가 여의도를 관리하고 있다니까?”
“김태산!”
박세훈은 내 이름을 듣자마자 격한 반응을 보였다.
“이거, 소문이 사실이었구먼. 고등학생 밖에 안 된 친구가 여의도를 맡고 있다는 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하하. 이 친구, 겸손도 떨 줄 알고. 나도 들었어. 여의도에 재범파랑 양양파, 그리고 천성까지 깡그리 쓸어 버렸다며? 거기다가 몇백 명이나 되는 연합원을 끌고 다닌다면서? 그 나이에 아주 대단해.”
“과찬이십니다.”
박세훈은 옆에 서 있던 조직원들에게 핀잔주듯 말했다.
“너희들도 저 어린 친구보고 좀 배워라.”
그들은 모두 내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가만히 있다가 나 때문에 듣지 않아도 될 잔소리를 들었으니, 짜증이 나긴 할 것이다.
“권용일 형님도 참 대단해. 아무리 그래도 이 친구 나이가 어리잖아. 그런데도 여의도를 떡하니 맡기시다니. 그만큼 능력이 좋다는 건가?”
“아닙니다. 그냥 귀여워해 주시는 것뿐입니다.”
성일환은 내 팔을 ‘툭’치며 비아냥거렸다.
“자식이 지금 손님 있다고 겸손 떨기는. 이놈이 내 앞에서는 얼마나 시건방을 떠는데.”
“혀, 형님….”
“그래도 어쩌겠어? 능력 없는 노땅은 가만히 입 다물고 하라는 대로 해야지. 안 그래?”
“허허. 성 사장, 많이 죽었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그쪽이 잘 몰라서 그래. 이런 놈이 옆에 있으면 뭘 할 의지가 사라진다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면 척척 알아서 되니까. 이번에도 박 사장을 꼬드기자고 말 꺼낸 게, 바로 이놈이었어.”
처음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던 박세훈의 눈빛이 달라졌다. 조금 더 날 진중하게 바라보는 눈치였다.
“그래? 내 이름을 콕 집어서 말했던 건가?”
성일환, 저 양반이 또 괜한 소리를 했다.
나는 정중하게 박세훈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대답했다.
“그렇진 않습니다. 서로 뭉쳐도 시원찮을 판에 싸우고 앉아 있는 대룡파에게 환멸을 느끼고…. 이제 대룡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예상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네.”
“예. 어떤 조직이라도 그렇게 현명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박세훈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난 그에게 돌려서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다. 절대 경쟁자들이 무서워 도망치는 겁쟁이가 아니다.’라고.
박세훈에게도 배신자가 되었다는 부끄러움이 아주 조금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가려운 부분을 내가 긁어 준 것이니, 기분이 꽤 나아졌을 것이다.
그는 씨익 웃으며 성일환에게 말했다.
“왜 권용일 형님이 이 친구한테 퍼주고 있는지 알겠구먼. 나라도 그럴 거 같아.”
“하하. 우리 막내가 매력이 넘치긴 하지.”
“그러게나 말이야.”
박세훈은 잔에 담긴 술을 들이켠 다음, 진지한 톤으로 목소리를 바꿨다.
“일단, 너희들은 다 나가 있어.”
“예, 형님.”
박세훈이 똘마니들을 밖으로 내보내자, 나도 계속 자리를 지키기가 좀 민망해졌다.
“그럼, 저도….”
“아니야. 자네는 앉아 있어. 자네 덕분에 내 살길이 열린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리고 따지고 보면 김 사장 아닌가? 김 사장.”
박세훈의 권고로 난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태산, 이 친구 말대로 조직 내부에 현 상황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는 간부가 좀 있어. 그 사람들이랑 손잡고 일하면 참 수월해질 텐데 말이야. 그런데 타이밍이 좀 안 맞아.”
“왜?”
“이재훈. 그 새끼 때문이지, 뭐.”
이재훈이라면 대룡파의 2인자다. 화진파로 치자면 성일환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인 거다. 아무래도 이재훈을 따르는 무리들과 잡혀 들어간 석태훈을 여전히 따르고 있는 세력끼리의 싸움이 일어난 것 같았다.
그런데 원래 석태훈이랑 이재훈이 같이 들어가는 게 맞지 않나?
내가 뭘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는 석태훈이 잡혀 들어간 다음, 이재훈이 바로 군부 손에 붙잡히게 된다.
그런데 이놈이 아직도 멀쩡하다는 건….
“이강혁이 뿌린 돈이 이재훈 주머니에 있나 보군요.”
“어떻게 알았어? 자네 말이 맞아. 이재훈이 호구 새끼 하나 제대로 잡았던 거지.”
“지금 이강혁이 대룡과 인연을 끊지 않았습니까?”
“맞아. 그래서 그런지 이재훈, 이 새끼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갑자기 대대적으로 애들 풀어서 간부들에게 압박을 주고 있어. 그리고 그나마 있는 사업장들도 철수시키거나, 확장하려는 것도 중단시키는 중이고.”
이거, 그림이 좀 그려진다.
“이재훈이 하던 사업장은 다 스톱한 상태고, 다른 간부들이 운영 중인 사업장들은 오히려 늘리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 그건 또 어떻게 알았데? 우리 쪽에 뿌락지라도 심어 놓은 거야?”
역시, 그거였나.
이런 뻔한 패턴은 내가 검사 시절 때도 질리게 봐왔던 것이다.
이재훈 요놈, 잘 걸렸다.
이번에는 잠깐 검사 시절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볼까?
벌써 쾌감이 드는 게, 역시 난 이런 쪽이 천성인 거 같다.
도망치는 놈의 꼬리를 붙잡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일이 또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