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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39화 (39/325)

39화. 계속되는 만남(2)

정인재 대표는 당황과 분노가 절묘하게 섞인 표정이었다. 마치 내게 정곡을 찔려, 얼굴이 굳어 버린 범죄자들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회귀 전에는 그런 놈들을 골려 먹는 맛에 살았는데, 역시 이런 버릇은 죽다 살아나도 고칠 수가 없는 모양이다.

“하하. 이거야 원…. 제대로 한 방 맞았네요.”

하지만 정인재 대표는 금방 냉정함을 되찾았다.

“끊지 말고 계속해 보세요. 오랜만에 흥미로운 지원자가 나온 것 같으니까.”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듯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저 자세로 나오는데, 내가 계속 싸가지 없이 나갈 순 없지 않은가.

“일단, 무례를 범했다면 죄송합니다. 금양 그룹을 넘어서겠다는 목표는 이철호 회장님이 고집해왔던 것이니까요. 그리고 대표님도 그 목표를 따라 지금까지 천성 전자를 이끌어 오신 것 아닙니까?”

“그걸 알면서도 담담하게 그런 대답을 하다니….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정말 그게 우리의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솔직히 둘 다 맞는 소리다. 내가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도 있고, 지금 천성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기도 했다.

계속 말을 이어가려 하자, 정인재 대표가 손을 들어 중재했다.

“아, 잠시만요. 이 재밌는 이야기를 혼자 들으려니 아까워서요. 그리고 방금 태산 씨가 답한 게 어떤 사람과 매우 비슷했다는 거 아세요?”

나처럼 비슷한 대답을 한 사람이 있었다고?

그놈도 어지간히 겁대가리가 없었나 보다.

근데 잠깐.

이 천성에서 이런 소리를 겁도 없이 할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지 않은가.

정인재 대표는 수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안 바쁘지? 그래. 그럼, 잠깐 내 방으로 들어와.”

방금 자기와 이 천성의 회장을 깎아내린 놈을 보고도, 화를 내기보다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게 좀 이상했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대표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들어와.”

이윽고 정인재가 말했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이강찬이었다.

뭔가 좀 낯부끄러운 상황이었다.

사실, 내가 정인재 대표에게 했던 대답은 이강찬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물론, 이강찬이 정인재 대표에게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그저 그가 천성 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직원들에게 내놓은 비전을 참고한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너도 같이 있게 하는 건데. 괜히 왔다 갔다 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대표님.”

“앉아.”

이강찬은 나와 정인재 대표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자리에 앉았다. 이제 정인재의 시선은 다시 내게 옮겨졌다.

“자, 태산 씨. 아까 했던 말 계속해 봐요. 아니지. 미안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실장도 들어야 할 것 같아서요.”

얼굴이 절로 붉혀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정도로, 속내가 다 드러나는 표정을 지을 순 없지. 그래도 회귀 전에는 포커페이스의 끝판왕이라는 소리까지 듣지 않았던가.

난 침착하게 스스로 진정시키며 정인재 대표에게 말했다.

“먼저 대표님께서 운을 띄어 주셔야죠.”

“아, 그러네요. 그럼,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만약 태산 씨께서 천성 전자의 대표라면, 어떤 것부터 하시겠습니까?”

나는 대답을 하기 전에 슬쩍 이강찬을 살폈다. 역시,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묵묵했다. 내 대답을 듣고 나서도, 계속 그렇게 뚱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 한번 보자.

난 정인재 대표에게 했던 그대로 대답했다.

“현시점을 기준으로 제가 천성 전자의 대표라면, 금양 그룹을 넘겠다는 허접한 목표부터 바꾸겠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설정하도록 부추긴 놈들의 옷도 다 벗겨 버릴 겁니다.”

정인재는 아까와는 다르게 굳은 표정 대신, 실실 입꼬리를 씰룩이고 있었다.

과연 이강찬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풉-!”

터졌다.

저번에 이철호 앞에서도 그러더니, 이번에는 정인재 대표 앞에서 저런다.

원래 저렇게 웃는 게 이강찬의 버릇이었나?

“하하하-!”

그런데 저번에는 금방 웃음을 거두더니, 이번에는 박장대소하듯 크게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정인재는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정신을 차린 이강찬은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감추었다. 정인재는 이런 이강찬의 반응이 신선했던 것 같다.

“이 실장, 네가 웃을 줄도 알고…. 이거 충격인데?”

이강찬은 조금 고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태산 씨가 사람을 꽤 웃길 줄 안다고요. 왜 대표님이 저를 부르셨는지 알 거 같습니다.”

“너도 태산 씨와 비슷한 대답을 내게 했었잖아. 금양 그룹을 넘겠다는 목표만큼 우스운 게 또 없다고.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는 건가?”

“예. 고작 금양에게 밀리고 있을 천성이 아니니까요.”

흡족한 얼굴로 정인재 대표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제가 왜 이 실장을 다시 불렀는지 아시겠죠?”

“아, 예….”

후-. 쪽팔리는군.

저 두 사람은 영영 모르겠지만, 난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이강찬의 비전을 카피해서 정인재 대표에게 대답했다는 것을.

“그럼, 계속해 주세요.”

난 이강찬의 표정을 다시 살펴봤다.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아까 전과는 달리 확실히 흥미를 드러내고 있는 표정이다.

“이강찬 실장님의 말씀대로, 천성은 고작 금양에게 끌려갈 회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금양이 천성에게 끌려갈 날이 올 겁니다. 대표님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반도체 개발로, 내년 초에는 천성이 금양을 넘을 수 있을 거라는 걸요.”

정인재 대표는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예?”

“우리 반도체 사업이 발전한 덕분에 내년 초에는 금양 그룹의 실적을 처음으로 넘을 수 있다는 걸요. 아직 회사 내부에서만 알려져 있는 내용인데….”

괜히 아는 체를 했나.

공시도 안 되어 있는 걸 뱉어버렸다. 하지만 천성이 반도체 개발을 통해 수출과 더불어 공장까지 늘렸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않은가?

“천성이 반도체 개발도 하고, 공장까지 늘였는데도 제대로 공시조차 하지 않았어요. 마치 무언가를 꼭꼭 숨기는 것처럼 말이죠. 그럼, 둘 중 하나라는 건데….”

“둘 중 하나요?”

“예. 반도체 쪽에 문제가 있어서 구린 걸 감추고 싶다거나….”

정인재 대표는 약간 비웃음 섞인 입술을 띠었다.

“아니면 금양이 최대한 늦게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도록, 일부러 정보를 느리게 흘리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어느 쪽일까요, 대표님?”

하지만 다시 안색이 확 돌변했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아직 좀 더 내 말을 들어 보겠다는 것이다.

“밝히길 좋아하는 천성이 반도체에 대한 호재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건…. 방심하고 있는 금양 그룹에게 경계심을 심어 주지 않고, 더는 따라올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간 다음에 터트리기로 작정했다.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난 정인재 대표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내 말이 틀렸다고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천성이 반도체 사업으로 금양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는 건, 내가 대학생 시절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물론, 지금은 증권맨들도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이다. 천성이 당최 밝힐 생각을 하지 않으니, 대부분 뭔가 구린 게 있나 보구나 싶어 관심을 꺼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연도 말부터 천성은 급성장하고 있는 반도체 사업을 호재로 광고하기 시작하며, 이번 기회로 천성이 금양을 완전히 눌러 버린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쏟아진다.

뒤늦게 금양이 부랴부랴 반도체 사업에 투자를 시작하지만, 천성이 시장을 꽉 잡으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난다.

자. 이제 정인재는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까?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 대답은 옳았을까?

“이거… 생각보다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셨는데요? 우리 회사 내부에서도 위치가 좀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아신 겁니까?”

정인재 대표의 반응은 긍정과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역시, 내가 제대로 된 답을 내놓은 것이다. 그저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일에 양념을 좀 추가했다는 것을 저 양반이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솔직히 궁금하긴 하다.

그렇다고 ‘사실 제가 미래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솔직히 때려 맞춘 겁니다. 대표님의 반응을 보니, 제 생각이 우연히 맞았나 보네요.”

“하하. 실컷 자신 있게 말씀하시다가 이제는 겸손까지?”

“좀 그런가요?”

“아니에요. 그런데 이 실장이 말했던 것처럼 태산 씨는 참 재밌는 분이시네요.”

정인재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잔에 담긴 물로 목을 축였다. 그러는 동안 계속 눈동자를 굴리며 나를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금양 그룹을 잡겠다는 목표를 갈아치운다면, 태산 씨는 어떤 걸 비전으로 삼고 싶으세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이강찬에게 강한 시선을 한 번 준 다음,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천성은 소니를 넘는다. 이것이 제가 천성 전자의 대표로서 내놓을 비전입니다.”

상반된 반응이 두 사람 얼굴에 나타났다.

한쪽은 허황된 소리를 한다는 얼굴. 다른 한쪽은 눈빛까지 반짝이며 흥분한 얼굴이었다.

내 예상대로 정인재 대표는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지적했다.

“소니를 넘는다, 포부가 큰 건 알겠지만…. 목표라는 건 결국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을, 과녁으로 삼는다는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내 눈동자는 정인재 대표가 아닌, 훗날 천성 그룹의 황제가 되는 이강찬에게 쏠렸다.

내가 당찬 대답을 내놓게 된 이유는 전부 이강찬 때문이지 않은가?

천성이란 왕국을 제국으로 키운 이강찬. 그는 회장에 취임하던 날 전 직원에게 당당히 선포했다.

우리 천성 전자는 소니를 넘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때 직원들 모두가 비웃었지만, 결국 천성은 소니를 뛰어넘었다. 그것도 간신히 넘은 게 아닌, 아주 가뿐히.

난 이강찬이 곧 천성 직원들에게 선포할 포부를 정인재 대표에게 그대로 전해 준 것뿐이었다. 그런데 정인재 대표보다는, 항상 공허해 보이던 이강찬의 눈빛이 초롱초롱 반짝이기 시작했다.

“저도… 태산 씨와 같은 생각입니다. 대표님께도 저번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목표는 더 이상 금양이 아니라 세계라고 말입니다.”

“예. 천성이라면 충분히 세계를 노려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왕 세계를 노릴 거라면, 현재 가전 산업에서 최고 주자인 소니를 넘겠다는 목표를 세워야죠.”

오늘은 이강찬과 장단이 잘 맞는다.

나와 이강찬의 의견에 정인재 대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어쩜 둘이 그렇게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둘이서 파트너로 같이 일하면 죽이 잘 맞을 것 같네요.”

정인재 대표는 이 대화가 조금 불편해 보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현재 세계 가전 산업에서 1순위에 올라와 있는 소니다. 그곳을 넘어야 한다고 나와 이강찬이 압박을 주고 있지 않은가.

“일단, 오늘 면접은 여기서 끝.”

여기까지 들었으면 되었다는 건가.

“합격입니까, 불합격입니까?”

“보통 이런 상황이면 태산 씨는 어떨 거 같으세요?”

“아마도….”

“경영자 입장에서 회사의 마이너스적인 부분만 강조하는 지원자는 달갑지 않은 법이지요.”

불합격이라는 건가?

하지만 난 천성의 직원이 되려고 온 게 아니다.

“직원이라면 불합격이겠지만, 파트너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겁니까?”

“글쎄요.”

도전적인 내 물음에 정인재 대표는 웃음으로 넘겼다.

“아무튼, 내부 회의를 거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내부 회의를 거쳐야 하는 면접이었으면 임원들 몇을 이 사무실에 불러 놓았을 것이다. 저건 그냥 혼자 더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리겠다는 소리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귀찮은 일 하나가 끝난 것 같았다.

이제 앞으로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는 정인재 대표 손아귀에 달렸다.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너무 깝친 건 아닐까?

* * *

김태산이 대표실 밖을 나가기 무섭게 정인재 대표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너랑 성격은 정반대이긴 한데, 생각하는 건 똑같은 거 같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 허황된 소리를 하는 것도 똑같던데?”

이강찬이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굳은 표정에서 드러나 있었다.

저건 절대 허황된 소리가 아니라고.

“이 실장이 저 친구랑 잘 지내봐.”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이강찬은 정인재 대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런 사람을 두고 난 놈이라고 하는 거야. 저 어린 나이에 몇 가지 단서들로 금방 우리 회사 내부 사정을 꿰뚫어 보고 있잖아. 솔직히 저 정도의 통찰력은 수십 년을 살아도 갖기가 힘들어.”

“그런가요?”

“그래. 이야기하는 내내 소름이 돋더라. 누가 보면 오랫동안 이 바닥에서 구른 임원인 줄 알겠어. 사물을 넓고 자세하게 볼 줄 아는 시야라면, 이번 닌텐도 일은 맡겨도 좋을 것 같다.”

이건 정인재 대표가 김태산을 쓰겠다는 허락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 순간, 이강찬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밝게 펴졌다.

“그렇게 저 사람이 마음에 들었던 거냐?”

이강찬은 급히 표정을 지웠지만,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은 지울 수가 없었다.

“옆에서 잘 지켜봐. 그리고 기회가 되면 마인드를 조금만 개조해서, 우리서 천성으로 꼭 데려와. 조폭 세계에서 썩을 인재는 절대 아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자신처럼 더 먼 미래를 바라보고 움직이는 사람.

항상 눈앞에 있는 것만 쫓고 있는 일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같은 시점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동류의 사람을 만나는 게 결코 쉽지 않다. 그것도 남들이 하지 못하는, 혹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말이다.

이강찬은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고등학생에 불과하지만, 가지고 있는 눈과 포부는 여타 천성맨들과 다르지 않은가?

그에겐 바로 저런 사람이 필요했다.

저 사람과는 몇 번이고 같이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인재 대표의 말대로 기회만 온다면, 김태산을 화진에서 천성으로 빼올 작정이었다.

일단, 좀 친해져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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