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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38화 (38/325)
  • 38화. 계속되는 만남(1)

    “뭐야?!”

    곧 있으면 환갑을 넘길 영감님이 목청도 좋다.

    쩌렁 이는 목소리 덕분에 성일환은 몸을 들썩이며 나와 권용일의 눈치를 살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네가 천성이랑 일을 같이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내가 그럼 어이쿠 잘했다고 할 줄 알았냐?”

    “대룡파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놈아. 그냥 천천히 해. 어차피 이강혁 그 새끼가 뻘 짓 한다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이강혁이 개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멍청한 놈에게 맞고만 있는 놈이 더 병신이지 않은가.

    “예…. 뭐, 그렇긴 한데….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 있기만 하니까 안 되겠더라고요.”

    날 바라보는 권용일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주 재밌다는 듯,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였다.

    “그럼, 이게 전부 이강혁 그 새끼한테 한 방 먹이려고 하는 짓이다?”

    “저한테 또 한 방 맞으면 펄쩍펄쩍 뛰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아주 열불이 나서 미치고 팔딱 뛰겠지.”

    권용일은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상을 두드렸다.

    “네 뜻이 정 그러면 한번 해 봐.”

    “크, 큰 형님!”

    권용일의 허락이 떨어지자, 성일환이 만류하며 나섰다.

    “아무리 그래도 태산이가 천성이랑 같이 손잡고 일하는 건 좀….”

    “뭐가 어때서?”

    “그러니까 제 말은….”

    성일환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천성에서 이놈을 확 채가면 어떡하냐는 말입니다.”

    응? 난 또 뭐라고.

    마음은 알겠지만, 성일환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

    내가 처음부터 천성을 노렸다면 화진파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데 설마, 우리 영감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천성이 확 채가? 누구를, 이놈을?”

    권용일은 내 어깨를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놈이 그럴 놈이었으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어. 고작 천성에서 재벌 2세나, 3세 새끼들 뒤치다꺼리나 하며 살 수 있겠냐?”

    가끔 권용일이 저렇게 말할 때면 소름이 돋는다. 저 양반은 나를 너무 잘 아는 것 같다.

    “그런데 이철호랑 그 아들내미를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웬만하면 남의 말 듣고 사는 놈들이 아닌데 말이야.”

    권용일은 그게 궁금했는지 시가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흥미가 있을 때면 항상 시가를 피는 게 이 영감의 버릇이다.

    “가장 원하는 걸 주겠다고 했습니다.”

    “가장 원하는 거?”

    권용일과 더불어 성일환도 눈을 빛내고 있었다.

    “우리나, 천성이나 똑같습니다. 둘 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한 방을 날려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죠. 우리는 오성파에게 한 방 먹여 주기를 원하고, 천성은 금양의 콧대를 꺾어 버리길 원합니다.”

    오성파가 우리 사업장을 건드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황규혁이 우는소리를 했던 것이고, 이 영감도 아편굴 사건이 있던 뒤로 복수의 기회를 노리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네가 그 양반한테 금양을 엿 먹일 계획이라도 알려 줬다는 거냐?”

    “예. 원래는 그냥 계획만 알려 주는 거였는데, 이렇게 덤터기를 씌울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권용일은 손뼉까지 치면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그놈들한테 당한 게 그리도 고소한 건가.

    “쌤통이다, 요놈! 아주 자신만만하더니, 첫째와 셋째한테 번갈아 맞았구나!”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충분히 반성하고 있습니다.”

    “허허.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을 것 같으니까. 네놈이 토라져 있는 이 기회에 나도 거들어야 하지 않겠냐.”

    이 영감은 날 놀려 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일이 아닐까?

    “그럼, 이제 대룡파는 어떻게 되는 거냐?”

    권용일처럼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지 않은 성일환의 질문이었다.

    “선불로 대룡파는 깔끔하게 정리해 주겠다고 했으니까, 금방 연락이 오지 않을까요?”

    걱정 많은 성일환이 고개를 저었다.

    “그놈들이 약속을 잘 지키려나 모르겠다.”

    “음흉한 놈들이긴 하지만, 이런 은밀한 약속은 잘 지키는 놈들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금도 대기업이랍시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거겠죠.”

    고객과의 약속. 국민과의 약속을 대기업이 지킬 필요는 없다.

    정부와의 약속. 은밀한 청탁만 잘 들어 주면 되는 게 대기업의 생존 비법이 아닌가?

    그들의 가장 큰 고객은 국민이 아닌, 매년 200조가 넘는 돈을 굴리는 정부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네. 세상은 결국, 가장 큰 도둑이 성공하는 법이다. 명심해라.”

    “예, 형님.”

    일반 사회에서는 결코 알려 주지 않는 교훈이다.

    가장 큰 도둑이 성공하는 세상이라-.

    언제부터 이 나라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일지도….

    “그런데 확실한 거냐?”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닌텐도인가 뭔가로 금양한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말, 정말이야?”

    “예. 직격탄을 날린 순 없겠지만, 그래도 금양 그룹 회장이 전화기 정도는 던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허허.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꽤 승산이 있나 보네.”

    솔직히 말해서 닌텐도가 아니더라도 천성은 곧 금양 그룹의 실적을 처음으로 뛰어넘게 된다. 그게 86년 초에 일어나는 일이다.

    83년에 천성이 개발한 초소형 VTR을 수출하게 되면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건데, 그것을 시작으로 천성은 세계 최고의 반도체를 만드는 기업이 된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내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현재 천성 전자를 지휘하고 있는 정인재 대표다.

    천성 전자의 역사는 정인재 대표가 있을 때와 없을 때로 나뉜다고 말하지 않던가.

    지금은 아직 실적이 미미하게 보이지만, 곧 세상을 놀라게 할 때가 온다.

    “아무튼, 천성 놈들이랑 장단 좀 맞춰 주고 와. 그리고 우리 일도 해야지?”

    “해외 쪽 업무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 너 때문에 우리 애들 입이 삐죽 나와 있어. 이번에 아편굴 사건이 터지지만 않았으면 그것들이 다 들고일어났을 거다.”

    영감님이 또 엄살을 부리고 있다.

    권용일이 눈을 부릅뜨고 살아있는 한, 미치지 않고서야 그에게 반기를 들 사람은 조직 내에 없지 않은가.

    하긴, 오랫동안 미룰 수 없는 일. 나도 하루빨리 미국으로 건너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다.

    “큰 형님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이번 일을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를 짓고 돌아오겠습니다.”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대신, 단도리 잘하고 나와. 그것들이 또 잡소리 하지 않게.”

    “예, 큰 형님. 그동안 대룡파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예끼! 이놈아. 이제는 날 막 부려 먹으려는 게냐!”

    권용일은 몇 번 더 엄살을 부리다가 후딱 일을 끝내고 오라며 나를 재촉했다.

    내게 해외 업무를 전부 맡긴다고 선포를 했는데, 정작 내가 해외로 아직 나가 있지도 않고 있지 않은가?

    저 영감도 슬슬 똥줄이 타는 것이다.

    그래도 천성에서 연락이 오는 대로 대룡파를 깔끔하게 정리하겠다고 했으니, 한 시름 덜었다고 생각해야 하나?

    * * *

    “생각보다 연락을 빨리 주셨네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요.”

    바로 다음 날 이강찬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집에 또 찾아왔다. 연락을 하는 것보다는 서로 얼굴 보고 얘기하는 걸 선호하는 스타일인가?

    “좋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내 물음에 이강찬이 조금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께서는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태산 씨를 만나보고 결정을 하겠다는 분이 계십니다.”

    이철호 회장의 허락이 떨어진 마당에 어떤 놈이 감히 딴지를 걸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문득 한 사람의 이름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철호 회장에게 반발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난 모른 척하며 이강찬에게 물었다.

    “그게 혹시 어떤 분이신지….”

    “천성 전자를 맡고 계시는 정인재 대표님이십니다. 워낙 꼼꼼하게 일을 하시는 분이라, 회장님이 허락했다고 해도 쉽게 용납하시는 분이 아니라서요.”

    정인재 대표는 윤리경영의 선두주자로 나선 사람이다.

    이 사람이 지휘봉을 잡으면서부터 천성이 큰 폭으로 성장해, 마침내 금양 그룹을 뛰어 넘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면접 통보가 날아올 줄이야. 그것도 정인재 대표가 직접 보는 면접이라니.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문제는 정인재 대표님이 브레이크를 거시면 어떻게 되는 거죠?”

    “올스톱입니다. 회장님께서도 정인재 대표님의 의견을 한 번도 물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안 된다고 도장을 찍으면, 회장님도 안 된다고 똑같이 결정을 내리실 겁니다.”

    정인재 대표의 힘이 그 정도로 강하단 말인가.

    재벌 밑에서 개처럼 일하는 흔한 머슴들과는 차원이 다른 대우였다. 그만큼 이철호가 신뢰를 한다는 건데….

    앞으로 천성과 좋은 관계를 이어 가려면, 정인재 대표와 면식을 나누는 것도 썩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언제 가면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가셔도 됩니다.”

    “지금 당장이요?”

    “부담되시면 내일이나….”

    “아니요. 바로 가죠.”

    이왕 만나는 거 굳이 시간을 질질 끌 필요가 있을까.

    이강찬이 말하지 않았던가.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 * *

    “갑자기 이렇게 불러서 미안해요.”

    정인재의 첫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했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또 없긴 하지만, 이 남자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선해 보였다.

    이런 버프 덕분인지 직원들도 정인재 대표를 무서워하기보다는, 친근하게 다가간다는 인터뷰를 예전에 본 기억이 있다.

    물론, 그게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윤리경영의 최선두 주자로 달리고 있는 인물에게 딱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예. 안녕하십니까. 김태산이라고 합니다.”

    “하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회장님께서도 훌륭한 젊은 친구라고 칭찬을 하시더라고요. 누군가를 그렇게 칭찬하신 적이 거의 없던 분이라 기대가 되더군요.”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자, 일단 앉으세요. 이 실장은 잠깐 나가 있고.”

    이강찬은 공손히 인사를 올린 뒤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재벌 2세라고 해도 정인재 대표는 일반 직원 대하듯이 이강찬을 대한다. 그리고 이강찬도 그런 정인재 대표를 존중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강찬은 왜 회장이 되자마자 정인재 대표를 제일 먼저 숙청해 버린 것일까?

    “이 실장에게 들었습니다. 꽤 재밌는 소리를 했다고 하던데….”

    “닌텐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닌텐도라-. 그쪽에서 내놓은 페미컴이 벌써 2년 정도 됐죠?”

    “예. 제가 알기로는 이미 일본 시장을 점령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물론 세가가 워낙 뿌리를 내린 게 깊어서 시간이 걸릴 뿐이지, 닌텐도가 세가까지 잡아먹는 건 시간문제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학생이라고 들었는데, 국제 시장에 귀가 밝군요. 거기다가 닌텐도가 세가를 이길 거라고 꽤 확신하는 것 같은데….”

    정인재 대표 정도의 정보력이라면 닌텐도가 조금씩 일본 시장을 야금야금 먹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정도도 모른다면 저 사람 밑에서 일하고 있는 놈들이 죄다 병신이라는 뜻이다.

    여기는 천성이 아닌가?

    “물론, 확신을 하는 건 아닙니다. 현재 닌텐도의 성장세를 보면 대단하지 않습니까? 작년 대비 매출액이 열 배나 넘게 올랐습니다. 2년 전에 비하면 매출이 20배가 오른 겁니다. 그들이 내놓은 페미컴이 열풍 중이라는 증거죠.”

    “하하. 닌텐도의 매출액까지 알고 있어요? 그런 건 또 어디서 구한 건지….”

    아차. 말을 잘못 꺼냈나.

    21세기처럼 스마트폰 하나로 각 회사의 매출액을 조회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이리저리 들은 것도 많고 알아본 것도 많습니다. 그냥 때려 맞추기로 닌텐도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가요? 그럼, 다른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아, 미리 말씀해 드리겠는데 이건 우리 회사에 지원한 응시자들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제대로 면접을 보겠다는 소리군.

    어디 한 번 뭐라고 하는지 들어볼까?

    “만약 태산 씨가 현재 천성의 직원이라면, 그것도 모든 권한을 가진 천성의 대표라면 무슨 일을 하고 싶습니까?”

    “대표라면 어디 대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천성 계열사가 워낙 많다 보니, 방향도 제각각이지 않습니까?”

    “하하. 날카로운 지적이네요. 대부분 응시자는 그런 중요한 것도 묻지 않고, 허황된 소리만 늘어놓던데.”

    정인재는 한 층 더 진지한 얼굴로 내게 다시 물었다.

    “천성 전자의 대표라면, 태산 씨는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두루뭉술한 질문이다. 그렇기에 질문을 받은 응시자들도 대부분 뜬구름 잡는 소리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멍청한 대답을 할 수는 없다.

    정인재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만한 대답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아부를 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사람을 다짜고짜 불러서 강제 면접을 보게 한 놈이니, 한 대는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제가 현시점을 기준으로 천성 전자의 대표라면, 금양 그룹을 넘겠다는 허접한 목표부터 바꾸겠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설정하도록 부추긴 놈들의 옷도 다 벗겨 버릴 겁니다.”

    “뭐, 뭐라고요?”

    줄곧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 있지 않던 정인재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 버렸다.

    금양 그룹을 넘겠다는 목표는 이철호가 천성 전자를 세우면서 처음 설정한 것이고, 지금까지 정인재가 유지한 목표이기도 하니까.

    난 지금 정인재와 이철호 둘 다 허접한 목표를 세운 멍청한 놈들이라고 내리깐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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