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황제와의 만남(3)
김태산이 회장실 밖을 나가기 무섭게 이강찬이 이철호를 불렀다.
“아버지.”
이철호는 살짝 놀란 눈치를 띠었다. 이강찬이 회사에서는 한 번도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지 않던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닌텐도랑 손을 잡아 보겠다고?”
“예.”
김태산이 있을 때는 크게 관심도 드러내지 않고 있더니, 역시 고조된 감정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이런 이강찬의 모습은 매우 보기가 드문 터라, 이철호는 조금 당황하기까지 했다.
“그런 말은 김태산이 있을 때 하지 그랬냐?”
“그건….”
이철호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비웃었다.
“낯이라도 가리는 거냐? 아니면 화진파에서 나온 놈이라 꺼리는 거냐?”
이강찬은 얼굴을 살짝 굳히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철호가 자신을 완전히 꿰뚫고 있다는 기분이 든 까닭이었다.
사실, 이강찬으로서는 둘 다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구구절절 속내를 풀어 놓기도 싫었고, 화진파와 손을 잡는 것도 꺼려졌다.
화진파는 엄연히 조직폭력배이지 않은가.
그들과 손을 잡고 일해야 한다는 건 꽤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화진파가 껄끄럽다는 건 맞습니다. 그런데 김태산이란 사람과는 한 번 일을 같이해 보고 싶더군요.”
이철호는 말없이 이강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누군가와 같이 일하려는 걸 극도로 싫어하던 사람이 바로 이강찬이다. 자기 아들이기는 하나, 주변과 섞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 저 성격은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이강찬이 저 김태산에게는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강찬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일까?
자신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를 이강찬은 캐치한 것일까?
“뭐, 네가 원한다면야….”
이철호는 복잡한 마음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닌텐도와 천성이 협력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오랜만에 이강찬이 저렇게 눈을 반짝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닌텐도 쪽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이상, 이철호는 다 받아 줄 생각이었다.
이것으로 이강찬에게 가르침을 줄 수만 있다면, 수업료를 조금 비싸게 냈다고 생각하면 된다.
‘설마 게임기를 팔아봐야 얼마나 팔겠다고.’
어차피 작은 게임 산업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철호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냥 본전만 뽑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
* * *
이대로 대룡파는 물 건너간 건가.
조금 마음이 착잡하기까지 하다.
미래의 일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21세기야 게임 산업이 워낙 발전하는 통에 비전이 확실했지만, 지금은 컴퓨터 소프트웨어도 제대로 발전되지 않은 시대가 아닌가.
아무리 유려하게 설명을 해 준다고 해도, 게임 산업의 밝은 미래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이철호의 입장이었어도 개소리를 한다며 무시했을 텐데, 문전박대당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어쩔 거냐, 이제?”
연욱이는 침울해져 있는 내 모습을 보며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대룡파를 접수하겠다고 자신 있게 소리친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런데 설마 이강혁한테 뒤통수를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무리하게 닌텐도까지 끌어들여 일을 벌였던 게 아닌가?
“어쩔 수 없지. 대룡파 일은 조금 기다리는 수밖에.”
“나가리야?”
“천성이랑 또 싸울 순 없잖아.”
“저번에는 잘만 싸우더니, 왜?”
“그땐 지금이랑 다르니까. 내가 막무가내로 대룡파를 치면, 천성과는 그날로 전면전이야.”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의표를 찔렸지만, 상대가 자신들을 몰랐기에 덤벼들었다는 생각과 직접 덤비는 하룻강아지의 느낌이 말이다.
화진파에게 힘이 있다고 해도, 천성과의 전면전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 화진파는 조직폭력배고, 천성은 정부의 줄을 꽉 잡고 있는 대기업이니까.
화진과 천성의 싸움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대룡파를 깨끗하게 청소하겠다고 난리를 치더니…. 내가 너무 깝치지 말라고 했지?”
“시끄러워.”
도움도 안 되는 놈. 이럴 땐 괜찮다고, 다음에는 더 잘해 보라고 위로라도 할 것이지.
연욱이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 킬킬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오른 게 있는지 내 어깨를 살짝 치며 물었다.
“그런데… 이강찬은 어땠냐?”
“응?”
“우리 검사 시절 때, 그 집안 새끼들 취조실에 앉혀 놓는 게 꿈이었잖아. 특히 이강찬은 더 했고.”
검사 시절 때 이강찬을 비롯해 그 집안사람들을 조사하는 게 청렴한 검사들의 목표였다. 하지만 천성이라는 거대한 벽을 실감하고는 대부분 두 손 들고 포기해 버렸다.
물론 나와 연욱이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지만, 결국 칼로 물 베기라는 걸 알았다.
고검장들부터 시작해 검찰총장까지, 천성이란 이름이 나오자마자 보고서를 덮어 버린다. 이들의 자식이 해외에서 공부할 수 있는 건 천성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 덕분이지 않던가.
두드리기만 하면 돈이 나오는 복주머니를 그들이 태워 버릴 이유가 없다. 그 복주머니를 뜯어버리려고 하는 놈들을 치워 버리면 될 뿐.
“그러게. 내가 죽지 않고 쭉 살아있었다면, 정말 어쩌면 그 집 식구들을 전부 대면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근데 어떻게 됐을까?”
“뭐가?”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 죽기 전만 하더라도 국민들이 다 일어날 기세로 난리가 났었잖아.”
나도 그게 궁금하긴 하다.
과연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대통령이 제 발로 내려왔을 것 같진 않다. 그럼,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분명 탄핵소추안이 가결될 때까지 버텼을 것 같은데….
과연 탄핵 선고가 내려졌을지도 의문이다.
“뭔 상관이야.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데. 그 잘난 대통령은 네가 하면 되고.”
“…진심이냐?”
“그럼, 구라인 줄 알았냐?”
연욱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그 정도의 목표까지는 가지고 있지 않은 건가.
“아무튼, 대룡파 일도 물 건너갔으니까, 해외 나갈 준비나 해.”
“젠장. 정말 그래야 하나.”
권용일이 오성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처럼, 나도 계속 대룡파에 집착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럴 땐 쿨 하게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딩동-!
하지만 역시, 하늘은 날 버리지 않았던가.
“계십니까?”
“누구세요?”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난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여기까진 어쩐 일로….”
“김태산 씨,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이강찬이 내 집까지 직접 찾아올 줄이야.
“잠깐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예. 들어오세요.”
너무 급작스러워서 경황이 없었다. 나는 이강찬을 안으로 들여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주스 담은 잔을 가져와 그의 앞에 놓았다.
그동안 연욱이는 눈을 껌뻑이며 이강찬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무래도 이강찬을 보는 게 처음이라 신기했나 보다.
“갑자기 이렇게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람을 보내셔도 되는데….”
“혹시, 제가 갑자기 찾아와서 무례를 범한 건 아닌지….”
이강찬은 아까부터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는 연욱이를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손님이 계신 것 같은데….”
“아, 괜찮습니다. 어차피 곧 갈 거예요. 그렇지, 연욱아?”
“응? 아, 으응. 그, 그래야지.”
연욱이도 눈치가 없는 놈이 아니라서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더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않은가. 이강찬이 여기까지 직접 왔다는 건, 내 계획이 먹혀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연욱이는 집 밖을 나서면서 조용히 내 귓가에 속삭였다.
“잘 구워삶아.”
검사 시절 때는 그림자조차 구경해 보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강찬이다. 그런 사람을 여기서 보게 되었으니, 검사 때 피가 끓어오르기라도 하는 건가.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 이따 저녁에 보자.”
연욱이가 가고 난 뒤, 나는 다시 이강찬 앞에 앉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미리 연락이라도 드릴 걸 그랬군요.”
예의도 따질 줄 아는 사람이었나.
이강혁 그 새끼와는 딴판이구나.
“아닙니다. 그보다 여기까지 오셨다는 건 역시….”
“예. 저번에 말씀하셨던 것 때문에 오게 되었습니다.”
통했구나.
이강찬이 여기까지 직접 왔다는 건, 그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이철호를 설득한 것이렷다?
“닌텐도와 손을 잡기로 하신 겁니까?”
“예. 태산 씨의 조언이 꽤 그럴 듯했습니다.”
근데 뭔가 좀 불안했다.
이강찬이 고작 저걸 알려 주기 위해 여기까지 직접 찾아오진 않았을 터.
뭔가 다른 꿍꿍이가 분명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도대체 뭘까?
“그래서 말입니다, 태산 씨. 이번 일은 태산 씨가 제대로 마무리를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예?”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태산 씨가 아닙니까? 불을 지폈으니, 책임을 지셔야죠.”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혹시, 겨우 이걸로 회장님과 거래를 하려고 하신 건 아니겠죠?”
젠장. 당한 건가.
그럼 그렇지.
그 피가 어디 가겠는가.
먼저 찾아온 것도 모자라 내 앞에서 왜 예의까지 차리나 싶었다.
저건 직접 내 손으로 이 일을 마무리 지으라는 요구가 아닌가? 단순히 조언을 했다고 퉁 치려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선불 낸다 생각하고, 대룡파 일은 깔끔하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회장님도 약속하신 일입니다. 하지만 그에 합당한 결과가 없다면….”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겠군요.”
“그렇죠. 회장님은 둘째 치고, 첫째 형님이 과연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내 처음 계획은 금양 그룹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계획만 말해 주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일을 떠맡게 만들다니.
그렇다고 이강찬이 내놓은 미끼를 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이건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리고 제가 그렇게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겸양을 떨자, 이강찬은 착 가라앉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겸손하신 건지, 아니면 피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예?”
“설마, 단순히 조언만 해서 대룡파 일을 해결하려고 하셨습니까? 천성 그룹 회장님은 그렇게 녹록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긴, 나도 단순히 조언만 하는 거로는 불안하긴 했다. 그렇다고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한 내게 이번 프로젝트를 맡길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강찬이 말이다.
난 잔에 담긴 주스를 한 번에 들이켰다.
이강혁이나, 이놈이나 나한테 뒤통수를 치는 건 똑같군.
그럼, 나도 애새끼 놀음은 그만하고 진지하게 나가볼까?
가만히 맞고만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좋습니다. 대신,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이번 프로젝트…. 그러니까 닌텐도와 계약을 체결하는 것까지, 모든 지휘권을 제게 넘기실 수 있겠습니까?”
“전권을…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얼굴에 잘 드러나진 않았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꽤 당황한 것 같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전권을 달라고 했으니, 이강찬은 내가 미친놈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네 옆에서 비서처럼 어시스트나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싫으십니까?”
굳어져 있던 이강찬의 얼굴이 풀리면서 입꼬리가 씰룩였다.
“대담하시네요. 지금 제게 무슨 요구를 하신 건지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부서가 어디죠?”
“아마… 영업팀이 될 겁니다.”
“그럼, 영업팀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시면 되겠군요.”
꽤 난감하다는 얼굴이었다.
회사 일이라고는 전혀 해 보지도 않은 놈이 영업팀의 전권을 달라고 하니, 당연히 난감할 수밖에. 하지만 애초에 나를 쓰고 싶다고 뜻을 밝힌 건 이강찬이지 않은가?
“안 됩니까? 이 일을 제게 도우라 말씀하신 게 바로 실장님이잖아요. 그런데 그만한 권한도 주지 않고 어떻게 일을 하라는 겁니까?”
“….”
“제가 충분히 그 일을 잘 처리할 거라는 걸 믿기 때문에 여기까지 발걸음을 한 거 아니세요?”
도전적인 내 물음에 이강찬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공허해 보이던 그의 눈빛이 지금은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자신 있으십니까?”
“예. 자신 없었으면 이런 요구를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내 대답이 나오기 무섭게 이강찬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회장님과 전자 대표님을 설득하는 건 제 몫이겠군요.”
그리고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태산 씨.”
난 이강찬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꽤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보내기에는 좀 아쉬웠다. 내 뒤통수를 쳤으니, 속을 좀 긁어놔야 하지 않겠는가?
“급작스럽긴 하지만…. 아무튼,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기회로 금양 그룹에게 제대로 한 방을…. 아니네요. 실장님에게는 첫째 형님이신 이강혁 부회장님에게 한 방 날린다고 봐야 하나요?”
처음으로 이강찬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물론, 아주 잠깐이라서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지 의문일 정도였다.
이강찬은 희미하게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글쎄요. 하지만 태산 씨 말대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역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