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날개와 발톱 (2)
“저, 전부를요?”
영감님의 선포에 다들 주먹으로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전부.”
“하지만 큰 형님. 너무 이른 판단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이 꼬맹이 나이가 몇이나 된다고….”
“나이? 지금 내 앞에서 짬을 들먹여?”
지금은 왕이 말을 하는 때다. 대신들은 입을 다물고 경청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간부 중 하나는 말실수를 했음을 직감하고 고개를 숙였다.
권용일은 그런 그에게 삿대질하며 고성을 질렀다.
“그럼, 이 짬도 안 되는 어린놈의 새끼가 열심히 뛰어다닐 때 우리 황 사장은 뭐 하고 있었나? 가만히 앉아서 술만 퍼마셨어!?”
“아닙니다, 큰 형님.”
“잘 처신해서 행동해. 짬 높은 거로 어깨 펴려면 군대나 가, 이 사람들아.”
말끔히 청소된 분위기였다.
누구도 감히 권용일의 뜻에 반발하고 있지 않았다.
“능력이 없으면 그냥 손 씻고 떠나. 조직을 배신한다고 숙청이다, 뭐다. 그런 건 다 옛날 일이야. 밥이나 축내는 놈들을 쫓아내지는 못할망정….”
철저한 능력 중시의 조직.
이것이 권용일이 내세운 지침이다. 그리고 그는 그 지침에 따라 인사를 결정한다.
이 중에서 절반 이상은 내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나중에 이 절반 정도가 권용일 손에 잘려나간다는 뜻이었다.
“큰 형님 말씀이 백번 지당하십니다. 요즘 저희가 너무 불성실한 모습을 보여드린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무거운 침묵을 깨뜨린 건 이진용이었다.
그는 실실 미소를 보이며 굳은 안색을 하고 있던 간부들을 달랬다.
“자네들도 너무 딱딱하게 있진 말고. 이게 다 조직에 좋은 일 아니겠어? 여기 태산이가 이번에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데?”
“그렇기는 하지만….”
“어허. 이 사람들. 큰 형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잖아. 능력을 중시해서 사람을 다룬다고 말이야. 우리가 나이만 먹고 능력이 떨어지면 어찌 쓰겠나?”
이진용이 나서면서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층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저 친구 아니었으면 당신들 전부 감방 들어갈 신세였어. 주머니 채워 주던 것도 다 잃었을 거고. 감사 인사를 하진 못해도 앞길은 막지 말아야지.”
저 사람이 내 편을 들고 있다는 게 참 꺼림칙했다. 무슨 속셈일까? 저 독사 같은 양반이.
“큰 형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능력 있는 친구인데, 당연히 다 맡겨야죠. 그럼요.”
“허허. 우리 진용이만 말귀가 좀 열려 있네. 저놈 말이 맞아. 태산, 이놈 아니었으면 너희들은 지금쯤 짭새 새끼들한테 처맞고 있을 거다.”
권용일의 말이 맞다.
내가 귀띔을 주지 않았더라면 여기 있는 사람 중 몇몇은 경찰 손에 붙들려 취조를 받았을 것이다.
80년대 취조는 주먹으로 시작하지 않던가?
조사 중에 죽으면 나 몰라라 하고 발을 빼는 게 경찰들의 특기 중 하나다.
“해외 거래 담당하고 있는 녀석들은 지금부터 다 발을 뺀다. 인수인계는 굳이 할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이놈한테 애들 붙여서 가르칠 테니까.”
인수인계를 핑계랍시고 간부들이 내게 해코지를 할 수도 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권용일이 기초적인 작업도 건너뛰게 한 것이다.
집무실에 모인 열 명의 간부 모두 화난 얼굴을 숨기느라 급급한 것처럼 보였다.
눈가를 꿈틀거리는 이진용의 얼굴도 놓치지 않았다.
겉으로는 내 편을 들고 있겠지만, 속은 벌써 뒤집히고도 남았을 것이다.
내가 원했던 건 마약 거래뿐이었다. 하지만 권용일이 해외 거래 전부를 내게 맡겼으니, 이들 눈에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리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더는 이번 일에 왈가왈부들 하지 마. 이건 오늘로 시마이 된 거다.”
“예, 큰 형님.”
생각보다 간단하게 일이 처리됐다.
좀 더 간부들이 반항할 줄 알았더니, 권용일이 조직을 얼마나 잘 장악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에게 반항하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 상황 보고나 해 봐.”
상황 보고? 어떤 걸 말하는 거지?
“아편굴을 미리 폐쇄한 덕분에, 직접적인 피해를 본 건 없습니다. 앞으로 며칠 더 소란이 있겠지만, 곧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됩니다.”
성일환의 말을 듣고 나서 이해가 됐다.
이번 아편굴 사건으로 조직에 어떤 피해가 있는지, 보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확실해?”
“예. 짭새들도 명령받은 게 8월 1일까지라 그 전에는 다 끝낼 거라고 확인했습니다.”
경찰들도 이번 일을 빨리 마무리 지으려고 할 것이다.
그들이 쳐 놓은 그물망에 걸린 학생들을 약쟁이로 몰아 혁명의 명분을 짓밟아 놓으려는 작업이 아니었던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걸 그들도 알고 있기에 오래 끌지 않는 것이다.
“다른 조직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데?”
“오성파를 비롯해 청룡파도 피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도끼파 놈들이 입은 피해는 거의 회생 불능입니다.”
도끼파는 화진파와 라이벌 구도를 이어가던 조직이다. 내가 알기론 도끼파의 보스가 이번 아편굴 사건에 희생양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허허. 그놈들 한동안 미친 듯이 날뛰더니, 꼴좋게 되었구먼.”
“그놈들과 엮이지 않은 게 다행이었습니다.”
“오성파가 도끼파처럼 망가지진 않겠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워낙 그놈들 발이 넓어서 말이죠. 아편굴이 아니더라도 돈줄 되는 곳은 그놈들한테 많습니다.”
권용일은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면서 술로 목을 축였다.
“슬슬 그놈들도 정리할 때가 되긴 했지? 오성파 말이다.”
오성파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말에 간부들은 자세를 다시 고쳐 잡았다.
하지만 벌써?
이 영감은 지금 생각이 있는 건가?
“짭새들이 벌집을 쑤셔 놓아 준 덕분에 우리에게는 여유가 좀 생겼습니다. 이번 기회를 노리시려는 겁니까?”
“글쎄다. 진용이 네가 볼 땐 지금이 적기인 거 같냐?”
“지금 당장 오성파를 밀어 버린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지요. 다만, 타이밍을 잘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리에 날파리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아편굴을 솎아낸답시고 경찰들이 거리를 점거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조직 전쟁을 벌이게 되면 경찰의 몽둥이가 화진파로 돌아가게 된다.
“하긴. 그렇긴 하겠지. 거리가 좀 비워지면 그때 확 밀어버릴까?”
“안 될 게 있겠습니까? 약간 딸린다 싶으면 짱깨 놈들 불러서 칼질 좀 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오성파에게 없는 화진파의 강점은 바로 해외에 뻗어 있는 영향력이다.
이진용이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중국 삼합회와의 긴밀한 관계가 유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진파는 저들의 힘을 빌려 오성파를 제거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시기가 너무 빠르다.
이 새끼들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건가?
화진파가 오성파를 점령하는 건 지금이 아니다. 좀 더 있어야 한다.
이놈들이 아편굴 사건을 내 덕분에 잘 피해 가니까 딴생각을 하는 것이다.
“태산이 넌 어떻게 생각하냐?”
이 영감이 내게 의견을 묻는다는 건, 여기 있는 간부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아직 오성파를 치는 건 적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또 없을 거 같은데?”
“지금처럼 나쁜 기회가 또 없기도 하죠.”
권용일과 더불어 간부들도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번에 경찰들이 왜 아편굴 덮쳤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아시안 게임을 위한 예방책이라고 하지만, 그 속은 혁명을 외치던 학생들을 해산시키기 위한 이간책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화진파가 오성파를 몰아내겠다며 들고 일어나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가뜩이나 학생들 엿 먹이느라 손발 바쁜 경찰들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학생들 때려잡느라 바쁜 경찰이 화진파와 오성파가 벌이는 전쟁에 쏟아부을 힘이 없다면, 그다음으로 바통을 이어받는 게 어떤 세력이겠는가?
“군부가 나설 수도 있다는 게냐?”
눈치 빠른 권용일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정부는 군대 투입을 밥 먹듯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경찰이 바쁘다고 징징대면 군대가 나설 겁니다.”
“조금 억측 같은데?”
억측이라니. 당치도 않다.
난 대한민국 삼대 조직인 대룡파가 어떻게 망했는지 알고 있다.
아편굴 사건이 끝나자마자, 대룡파는 아편굴 사건으로 인한 손실을 복구하기 위해 여러 조직과 전쟁을 벌인다.
구역을 늘려서 다시 힘을 키우겠다고 머리를 쓴 건데, 아쉽게도 시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
아시안 게임으로 촉각이 곤두서있는 정부다. 더군다나 곧 있으면 판문점에서 남북 국회 회담을 위한 1차 예비 접촉이 있다.
학생들도 신경 써야 하고, 북한도 신경 쓰느라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진 군부의 코털을 대룡파가 건드는 것이다.
정부는 곧장 군대를 투입해 대룡파를 쓸어 버린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눈앞의 손실만 바라본 대룡파는 그렇게 자멸을 하게 되는 것.
완전히 몰살당하지 않는 터라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게 된다. 물론, 화진파가 그들을 꿀꺽 삼키게 되지만.
그런데 지금 화진파가 대룡파 꼴이 나려고 이런 개 짓거리를 구상하고 있다니.
절로 혀가 차졌다.
배가 부를 대로 불렀다는 건가?
“억측이 아닙니다. 지금 정부가 촉각을 세우며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게 맞습니다.”
“젊은 놈이 왜 그렇게 통이 작아? 그런 마음가짐으로 다른 일은 잘 할 수 있겠어?”
간부 중 하나가 나를 비판하고 나섰다.
저놈 얼굴을 보니, 내가 아는 놈이 아니다. 그렇다면 얼마 못 가 사라질 놈이라는 건데, 저런 걸 두고 쥐새끼가 고양이 걱정하는 꼴이라는 거다.
“죄송하지만, 전 겁 많습니다. 그리고 통이 크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통이 크면 클수록 험한 꼴 당할 날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뭐야? 이 어린놈의 새끼가 오냐오냐하고 가만히 봐줬더니.”
겨우 말대꾸 한 번 했다고 발톱을 드러낸다.
슬슬 속에 쌓인 울분을 토해내겠다는 건가?
“지금 내 앞에서 언성 높이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하지만 지금 내 옆에는 권용일이 있다. 어디서 하수인 놈 따위가 입을 나불댄단 말인가. 그것도 왕의 총애를 받는 나에게.
“죄송합니다, 큰 형님.”
권용일에게서 얻은 발언권이 아니던가? 내가 어떤 의견을 내든, 저놈들은 경청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니까 태산이, 네 말은 좀 더 두고 보자는 거냐?”
“예, 큰 형님. 분명 우리처럼 생각해서 움직이는 놈들이 있을 겁니다. 운영하던 아편굴이 깡그리 날아갔으니, 손실 복구를 하려는 조직이 있겠죠.”
“그놈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 움직이자?”
“예. 앞에 덫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덫이 없다고 판명되면 그때 움직여도 늦진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권용일은 날 빤히 쳐다보다 말했다.
“넌, 군대가 움직일 거라고 확신하는구나.”
“짭새들이 한창 바쁠 시기입니다. 그들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정부가 배려해 주는 거죠.”
학생들을 고문해서 거짓 자백을 하게 만든다. 자신들이 마약에 빠져 살았다고 말이다.
이게 경찰의 할 일이다.
토스를 받은 정부는 혁명을 외치던 학생들이 사실은 약쟁이였다고 전국에 퍼뜨릴 것이다.
“네놈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거야 원….”
고민하는 척해도 저 영감은 내 말대로 할 것이다. 이제까지 내 말 믿고 실패한 적이 없었으니까.
“오성파 일은 좀 더 나중에 얘기해 보자. 이놈 말이 꽤 그럴싸하게 들리니까.”
권용일의 결정에 간부들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들의 말이 아닌, 나 같은 꼬맹이의 말을 권용일이 순순히 따르는 걸 보고 놀라는 것이다.
하지만 권용일이 말하지 않았던가?
여긴 짬으로 올라가는 곳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능력이 중시되는 곳.
나에게는 최고로 적합한 곳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