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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22화 (22/325)

22화. 진면목 (3)

“네 대답은 백 점이다. 내가 줄곧 생각해 왔던 걸 너도 똑같이 하고 있었구나. 다른 놈들은 머리에 똥만 찼던데, 네놈은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통밥을 굴리는지….”

당연하다.

난 당신이 밟고 온 길을 알고 있다. 거기다 양념 좀 추가해서 말했던 것뿐이었다.

“네 말이 백번 옳긴 하지만, 당장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성과 손을 잡으신 거 아니겠습니까? 그들을 스폰서로 내세우면 그림이 나오지 않습니까?”

“허허. 그놈 참. 네놈한테는 뭘 숨길 수가 없겠구나.”

권용일은 시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처음에는 천성이 우리 바지사장 노릇을 좀 해야겠지. 그놈들이랑 우리가 협력하면 꽤 일이 잘 풀릴 거야. 하지만 계속 천성한테 끌려다녀서는 안 돼.”

독립? 아니.

이건 천성 말고 다른 스폰서가 있다는 뜻 아닌가?

순간, 내 머릿속을 울리는 무언가가 떠올랐다.

“군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권용일이 깜짝 놀란 모습은 처음 본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신기한 녀석일세.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아맞혔는지….”

사람들은 대부분 화진 그룹이 건설사 때문에 컸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다르다.

이들이 진짜 발전할 수 있었던 건 화진 화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진 화학.

대부분의 방산 비리를 뽑아내는, 거대한 기업으로 탈바꿈한 범죄 단체다.

군부가 이들을 키워 준 것이다.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

“어떻게 알았냐? 내가 군부 쪽도 생각했다는 걸.”

“현 정권이 무너진다고 해서 군부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아직 분단국가니까요.”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나라에서 군부가 사라질 날은 없을 것이다. 즉, 방산 비리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우린 북한이라는 주적이 존재하지 않는가?

매년 수조 원이 넘는 국방비가 장성들의 주머니로 뿔뿔이 흩어진다.

그래서 이들은 남한과 북한이 항상 긴장 상태로 있기를 원한다. 그럼, 자신들의 주머니를 더 두둑이 채울 수 있을 테니까!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군부 세력들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원초적인 더러움은 바뀌지 못하지요.”

정권이 백날 바뀐다고 해도 군부에서 일어난 비리는 없앨 수가 없다.

조금 줄일 순 있어도, 뿌리째 뽑진 못한다.

“네 말이 맞다. 그래서 요즘 소련 놈들이랑 짱깨 놈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중이지. 거기 있는 놈들은 보통이 아니거든.”

소련과 중국에 있는 조폭의 힘은 대단하다.

특히 중국 삼합회는 정권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서 무기를 조달받고 기술도 이전받는 게 권용일의 목적인 것이다.

어차피 화진파는 정부와 줄을 놓는 게 아니라, 군부와 줄을 놔야 한다.

천성 그룹은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 지켜보며 베팅을 해야겠지만, 우리는 누가 과연 군부를 장악할 건지 판돈을 걸어야 한다.

대통령 정당과 연 맺는 건 그다음이다.

“아무튼, 천성과 최대한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 이번 일은 저 양반도 많이 참은 거야. 아무래도 네가 마음에 든 거 같기도 하고.”

“제가요?”

“네놈이 이상하게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단 말이지. 저 양반도 나랑 비슷해. 사람 보는 눈은 꽤 좋거든. 그러니까 저놈이랑도 잘 만나 봐.”

이철호 회장이 날 불러준다면야 좋겠지만, 과연 불러 주긴 할까?

“오랜만에 기 싸움 좀 했더니 배가 다 고프네. 국밥이나 한 그릇 할까?”

* * *

“젠장. 부럽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를 구경하던 연욱이가 잘게 투덜거렸다.

목동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나는 바로 어머니 이름으로 한 채를 구입했다.

지금이야 목동이 깡패 동네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곧 있으면 알부자들이 살게 되는 동네가 된다.

그때 오를 땅값을 생각하면 부지를 몇 개 더 사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곳 주변에 묶여 있는 그린벨트들도 시간이 지나면 차츰 풀리게 될 테니까.

“지금이라도 당장 한 채 사줄까?”

“됐다. 내 집은 내가 마련해.”

연욱이가 자존심 하나는 끝판왕이다. 남들 도움받지 않고 스스로 서겠다는 생각이 참 기특하다.

“어머니랑 동생은?”

“이따 올 거야.”

아직 어머니와 동생은 오지 않았다. 나머지 짐들을 챙겨 오느라고 늦는 모양이다.

새로 다 사드린다고 해도 말을 듣지 않으신다. 우리 어머니 절약 정신은 알아줘야 한다.

처음 아파트를 산다고 했을 때도 얼마나 반대를 하셨는지, 전교 1등을 한 성적표를 보여 드리고 나서야 허락을 받아냈다.

공부 잘하는 아들을 이기는 어머니가 없지 않은가.

“근데 여기서 시간 보내도 되냐? 여의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나 졸업할 때까진 느슨하게 해도 된다고 했어.”

“참, 편의란 편의는 다 봐 주네.”

나와 연욱이가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실례하겠습니다.”

한창 이사 중이라서 문이 열려있었는데, 양복을 차려입은 건장한 남성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뭐지?

순간 갖가지 생각들이 스쳐 갔다.

날 노리는 간부 중 하나가 똘마니들을 보낸 건가?

“누구십니까?”

“혹시 김태산 씨 되십니까?”

“예. 접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숫자는 다섯.

나와 연욱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숫자다.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저는 천성 그룹의 전략팀 실장 이상현이라고 합니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었다.

난 이 얼굴 하얀 사내가 건네는 명함을 받았다.

전략팀이라면 천성의 온갖 잔심부름을 하는 놈들이다.

“오늘 이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자 제품이 많이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예?”

“회장님께서 직접 보내시는 겁니다.”

회장님!

이철호 회장이 내 이삿날까지 신경을 쓴단 말인가?

거기다가 이런 선물 공세라니.

이렇게 드러내놓고 선물을 보낼 줄은 몰랐다.

“태, 태산아!”

하필이면 이럴 때 어머니와 동생까지 도착했다.

동생은 벌써 싸움꾼 피가 끓는지 눈빛이 변했고, 어머니는 입술까지 파르르 떠셨다.

어떤 놈들이 해코지하기 위해 왔다고 오해하신 게 틀림없다.

젠장, 여기서 동생이 사고라도 치면 큰일이다. 저놈이 한 번 정신을 놓게 되면 이 다섯 명은 죽었다고 봐야 한다.

“아-. 태산 씨 어머님 되시는군요. 안녕하십니까, 어머님. 천성 그룹 전략팀 실장 이상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 양반, 꽤 융통성이 있다.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자, 뒤에 있던 놈들도 다 같이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와 동생은 많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천성이라면 그 대기업 아닌가요?”

“맞습니다, 어머님.”

“아니, 천성에서 갑자기 왜….”

어머니는 이게 어찌 된 일이냐며 내게 눈짓을 보내셨다.

“회장님께서 태산 학생에게 신세를 진 것이 있어서, 이렇게 선물을 전달해 드리러 온 겁니다. 알아보니, 새집으로 이사를 하시기에 필요한 것이 많으실 테니까요.”

이상현은 자신의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인부들이 움직여 가전제품들을 하나둘 집 안으로 들이기 시작했다.

“냉장고는 여기가 좋을 것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머님?”

“예? 아니, 갑자기 이러시면… 어머머! 이거 이번에 새로 나온 냉장고 아니에요?”

“여기 TV도 있습니다. 이쪽에 두면 편하게 보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이상현은 순식간에 집안을 장악해 내, 허락도 없이 천성 가전제품들을 들여놓았다.

“역시, 이 제품은 어머니의 아름다움과 아주 잘 매치되는 것 같네요. 어떻습니까?”

“어머. 젊은 사람이 말도 참 예쁘게 하시네.”

말리고 싶어도, 저렇게 눈을 반짝이는 어머니를 보니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 일단 내버려 두자. 이놈이 무슨 꿍꿍이로 왔는지 알아보는 건 그다음이다.

* * *

폭풍 하나가 휘몰아치고 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텅텅 비어 있던 집안이 새로 나온 가전제품으로 가득 찼다.

어머니가 이렇게 섬세하신 분이실 줄은 나도 처음 알았다.

이상현과 상의하며 이리저리 제품들을 배치하는 모습이 참 새로웠다.

저렇게 밝으신 분인데, 그 꽃을 다 피우지 못하시고 일찍 돌아가신 게 얼마나 한이 되었던가.

내가 검사 명찰을 단 모습을 보지도 못하시고 돌아가신 그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제대로 효도도 못 해 드렸는데, 이번 생에는 남부럽지 않게 사실 수 있도록 보필할 생각이다.

이상현은 집 밖으로 나서는 때까지 어머니에게 공손함을 잃지 않았다.

영업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사람이다.

어머니는 얼마나 고마워하시는지, 아끼는 김치까지 통에 담아 건넸다.

나와 이상현은 동네 다방에 자리를 잡았다. 이놈에게 알아야 할 것도 있고, 내게 할 말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반찬이 없었는데, 이런 김치까지 받았으니 앞으로 식사 걱정은 없겠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다지만, 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집에 들어갈 시간은 있으십니까? 전략팀이신데.”

내 말에 이놈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전략팀을 좀 아시나 봅니다.”

“잘 알죠.”

대기업을 조사할 때마다 전략팀부터 턴다. 이놈들에게 가장 많은 먼지가 묻어 있으니까.

“그래요? 저희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아신단 말입니까?”

살짝 비웃는 듯한 눈빛이 보였다.

한 번, 기 좀 꺾어 줘 볼까?

“잔심부름도 하시고 우리 잘나신 3세들이 사고치는 거 수습하지 않습니까?”

“….”

너무 정곡을 찔렀나.

그래도 기선제압을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이거 어린 분이 생각보다 많이 알고 계시네요.”

“그럼, 이제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을 텐데요. 회장님께서 왜 갑자기 보내신 겁니까?”

이상현은 자세를 고쳐 잡고 말을 꺼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심부름꾼입니다. 회장님께서 태산 씨에게 호의를 보이고 계십니다.”

전략팀을 잔심부름이나 하는 놈들이라고 내리 깔아도, 이상현은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이 절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다.

전략팀에서 썩을 만한 인재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왜 저한테 그런 호의를 보내신단 말입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나이에 200명에 가까운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연합회장.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다가 이번에 여의도도 깨끗하게 밀어 버리지 않으셨나요?”

이상현은 손뼉을 치며 한 번 더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영남파 일도 있었죠?”

생각보다 이놈들 정보력이 넓다. 내 연합에 대해서도 속속히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하긴. 다른 곳도 아니고 천성이다.

우리나라에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정보를 캐가는 놈들이 아닌가.

“그런 출중한 능력이 있으신데, 굳이 화진에 있으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럼요?”

“천성을 위해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거죠.”

역시, 그냥 가벼운 스카우트 제의였나.

이철호의 뜻이라면 날 너무 우습게 본 것이고, 이놈이 독단으로 하는 짓이면 좀 맞아야 된다.

“화진에서 깡패라는 소리 듣는 것보단, 천성이라는 대기업에서 명함 박고 일하는 게 훨씬 더 좋지 않겠어요?”

이 사람은 인사과에서 일하면 안 되겠다. 사람 얻는 방법을 모른다.

“저기, 이상현 실장님.”

“예, 태산 씨.”

“제가 천성에 가면 정확히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겁니까?”

“글쎄요. 그건 회장님이 결정하실 겁니다. 제 생각에는 그분 곁에서 보필하는 일을 맡기실 것 같아요.”

이철호 회장의 수행비서가 되어 그룹을 주무르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건가?

잘만 하면 천성 그룹 회장의 오른팔이 된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저것도 다 미끼다.

“제안은 감사드리지만, 다른 곳에 선뜻 자리를 옮길 만큼 여기가 만만한 세상이 아니어서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별 탈 없으실 겁니다.”

별 탈이 없을 거라고?

무려 이철호의 아들 목숨을 가지고 협박한 권용일이다. 그가 나 하나쯤 죽이는 걸 어려워하겠는가?

이놈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그냥 막 던져 보는 건지 모르겠다.

이럴 땐 강하게 나가야 한다.

“실장님.”

“예.”

“깝치지 마세요.”

“…예?”

“그렇게 막말하시면 길 가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습니다.”

이상현의 조악한 표정이 역력하다. 내가 이렇게 저돌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을 거다.

“우리 화진파를 그냥 건달 새끼들로 보는 거, 이해합니다. 그리고 천성, 좋죠. 대기업 명함 박고 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이보세요, 김태산 씨.”

슬슬 이상현, 이놈의 성깔이 나오는 것 같다. 이럴 땐 쉬지 않고 몰아쳐야 한다.

“그런데 제가 거기 가면 뭘 할 수 있죠? 사무업? 아니면 회장님 옆에서 어깨나 주무를까요? 그것도 아니면 실장님처럼 3세들 뒤치다꺼리?”

“이봐요.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요.”

“끝까지 들으세요. 난 여의도 가면 사장 소리 듣는 사람입니다. 아직 나이는 고등학생이지만, 화진은 사람 가치를 아는 곳이에요. 능력이 있다면 나 같은 꼬맹이도 사장으로 세워 준다는 겁니다.”

“그런 곳과 비교하는 건 좀 수준이 떨어지는 것 같군요. 그리고 우리 천성도 능력을 중시합니다.”

“그래서요? 실장님은 능력이 안 돼서 여전히 그 자리 지키고 계십니까?”

“….”

이번에도 너무 팩폭이었나. 근데 어쩌겠는가?

먼저 내 성깔 건드린 건 이놈이었다.

“나이 서른쯤 되어 보이시는데, 통장에 억 단위 돈은 있으세요?”

이상현은 길게 숨을 뱉었다.

당장이라도 내게 주먹질을 할 것 같았는데, 끝까지 부글거리는 속을 억눌렀다.

무식하게 몰아붙이긴 했지만, 결론은 내야 한다. 이렇게 이 사람을 회장한테 보낼 순 없다. 그 영감이 내게 더 흥미를 갖도록 만들어야 한다.

천성이라는 이름에도, 돈에도 흔들리지 않는 심지를 보여주면 분명 이철호는 날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화부터 내겠지만, 이철호는 보통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화진은 천성의 용병 같은 존재입니다. 저도 회장님께 그런 존재가 될 겁니다.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일하는 사람. 언제 쓰다 버려도 괜찮은 사람. 그 이상으로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실장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회장님께 말씀드려 주십시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가겠다고.”

너무 엇나가는 게 아닌가 싶은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래도 이 도박은 충분히 할 만하다.

비굴하게 박쥐처럼 터를 바꾸는 것보단, 심지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인상적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일부러 이놈도 내게 이런 말을 꺼냈다는 직감이 왔다.

미끼를 던져서 살살 흔들어 보겠다는 건데, 그러기에는 네놈 실력이 부족하다.

어디서 감히 대한민국 검사였던 사람한테 심리전을 해 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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