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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18화 (18/325)
  • 18화. 뒤통수치기 (2)

    생각보다 그렇게 많진 않군.

    괜히 돈 가방을 다섯 개나 가져왔나.

    난 금고에 있는 현찰을 차곡차곡 가방 안에 넣었다.

    내 생각보다 그리 많진 않았지만, 액수로 따지자면 8,000만 원은 족히 넘어갔다. 거기다가 금괴까지 몇 개 들어 있었다.

    지금 시대에서 8,000만 원은 상당한 액수다. 하지만 검사 시절 때, 기백 억에 달하는 돈들을 추적하고 모두 국고에 환수시키다 보니 8,000만 원은 내게 푼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열쇠 뭉치를 보니까 다른 곳에도 금고가 있다는 건데….

    이재범, 저놈을 깨워서 알아봐야 하나.

    깨운다고 해도 제대로 말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 정도면 안 죽은 게 용하다.

    “우리도 내려가자.”

    연합 간부 녀석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내가 들고 있는 가방들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 너희들도 나눠 줄 거니까.”

    이놈들 얼굴이 확 퍼졌다.

    학생이든, 어른이든 돈 싫어하는 놈은 없다.

    밑으로 내려가 보니, 이미 상황은 다 끝난 상태였다.

    재범파 놈 중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 정도면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철저히 짓밟아 놓은 것이다.

    “웬 거냐?”

    황규혁은 내가 들고 있는 가방을 보고 고개를 살짝 주억거렸다.

    젠장. 황규혁이 나와 함께 온 건 좋았지만, 이럴 땐 부담스럽다.

    “하여튼, 돈 냄새는 잘 맡아요.”

    “드릴까요?”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새끼야.”

    말하는 어조를 보니, 돈이 목적은 아닌 것 같았다.

    “큰 형님께서 네가 뭘 하든 놔두라고 하셨어. 돈을 털든 말든, 난 상관 안 한다. 그냥 수고비라고 생각해라. 네 똘마니들 주머니도 채워 줘야지.”

    말이 좋아서 내 뒤를 봐준다는 거지, 이 여의도가 온전히 내 것일 수는 없었다. 오늘부터 이곳은 화진파의 구역이다.

    아무리 권용일이 이번에 나온 전리품을 내게 넘긴다고 해도 그냥 꿀꺽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성일환, 황규혁 그리고 권용일에게 조금씩이라도 상납을 해야 하는 게 진정한 사회생활이 아니겠는가?

    어차피 내가 화진파를 차지하는 순간, 이곳을 차지하는 것에 아무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할 거다. 그때를 위해서 지금은 수그릴 때다.

    “슬슬 올 텐데, 그 새끼들.”

    천성에서 보낸 놈들이 곧 있으면 도착할 것이다.

    재범파에게 줄곧 고개만 숙이며 살던 놈들이 아닌가? 그동안 쌓인 원한을 오늘 통쾌하게 풀 생각으로 들 떠 있을 게 분명하다.

    다른 놈도 아니고 깡패 새끼들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만큼 짜릿한 일이 또 없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놈들이 좀 늦는 것 같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황규혁이 담배 하나를 물고 반쯤 피고 있을 때였다.

    “저기다!”

    “전부 가서 엎어버려!”

    밖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찌꺼기들이 온 것이다.

    “엇?”

    열린 문을 통해 우르르 달려오던 저놈들의 얼굴이 당황으로 가득 찼다.

    분명 들어가면 반쯤 죽어 가는 재범파 녀석들을 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뭐, 뭐야?”

    저놈들 눈을 보니, 우리의 정체가 뭔지 매우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재범파인지, 아니면 천성에서 보낸 다른 조직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동자들이었다.

    “어디 꼬봉들이냐?”

    상자에 앉아 있던 황규혁이 잔뜩 무게를 실은 목소리로 녀석들에게 물었다.

    기분이 상할 만한 말투였지만, 저 중 누구도 화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서 말 한 번 잘못 내뱉었다간 쓰러져 있는 재범파 놈들 꼴이 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저, 전갈파에서 왔는데요?”

    “전갈파? 거긴 또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 새끼들이야.”

    저놈들의 울컥한 얼굴빛이 훤히 보인다.

    “전갈파가 전부야? 또 없어?”

    “….”

    전갈파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가 알기론 여러 소규모 조직을 천성이 긁어모았으니까.

    “됐다. 일단 좀 밟아 놓고 다시 말해 보지 뭐.”

    저런 놈들과 좋게 말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나 보다. 황규혁은 손을 까닥여 조직원을 움직였다.

    제대로 손맛도 느껴보지 못하고 재범파를 무너뜨린 화진파다. 그들은 이제야 제대로 날뛸 수 있게 되었다며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우리 애들도 젊은 피가 끓었는지, 내게 눈짓을 보냈다.

    화진파 솜씨를 좀 보려고 했는데, 저놈들의 기대를 저버릴 순 없겠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엎어.”

    내 연합원도 가세하면서 저 떨거지들은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몇 명은 이미 도망가 버렸고, 다른 놈들은 주저하다 파이프에 맞고 쓰러졌다.

    정리될 때까지 난 가만히 황규혁 옆에 서서 기다렸다.

    * * *

    천성 그룹 회장 이철호의 첫째 아들이자, 천성 그룹 부회장 이강혁.

    그는 자신이 천성의 차기 회장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회장 이철호는 냉철한 사람이다. 장남에게 제국을 넘겨주지 않으면 반드시 혼란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 만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언제 그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

    그래서 이번 여의도 점령 프로젝트에 이강혁은 사비까지 들여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아버지에게 여의도를 바쳐 차기 회장의 입지를 굳건히 하려는 의도였다.

    “뭐? 실패?!”

    그런데 생각지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주먹질로 생계를 이어 가는 쓰레기들이 자신의 전리품을 가로챈 것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이강혁은, 보고하던 비서실장에게 테이블 위에 있던 술잔을 던져 버렸다.

    “듣도 보도 못한 새끼들이 감히 누굴 쳐?! 넌 뭐 하는 새끼야!”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화진파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이강혁이었다.

    천성 그룹의 부회장이 그런 건달들을 자세히 알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런 미친 새끼들을 봤나! 이 새끼들이 지금 누구에게 공사 친 건지 모르는 거야?”

    관심도 없던 조직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의 계획을 망쳐버렸다.

    “경찰 놈들은 뭐하는 거야! 그런 쓰레기들이 여의도에서 그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부회장님. 저희 쪽에서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 달라고 상자까지 돌리지 않았습니까?”

    비서라는 놈이 자신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을 줄도 모른다.

    그 일을 이강혁이 모르겠는가?

    자신이 직접 지시해서 돈으로 경찰들 눈을 멀게 만들었다.

    63빌딩 완공식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게 했는데, 이건 완전 죽 쒀서 개 준 꼴이었다.

    “야, 김 실장! 내가 지금 그걸 몰라?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가서 그 새끼들 잡으라고 하는 거 아니야!”

    “아, 알겠습니다!”

    부회장이 또 던질 만한 걸 찾기 시작하자, 비서실장은 얼른 대답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저런 새끼를 비서라고 데리고 있었다니.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 겁대가리 없는 새끼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괘씸했다.

    감히 건드릴 게 없어서 천성이 침 바른 곳을 건드린단 말인가. 이놈들을 완전히 박살 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이강혁은 망설이지 않고 수화기를 들었다.

    “화진파에 대한 정보 전부 가져와! 아니! 그 새끼들이 오늘 점심에 뭘 처먹었는지까지 다 알아내서 가져오라고!”

    전략실에 명령을 내린 뒤, 그는 들고 있던 수화기도 냅다 던져 버렸다.

    도저히 화가 풀리지 않는다.

    * * *

    “고생했다.”

    “형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뭐, 난 애들하고 병풍처럼 서 있기밖에 더 했냐.”

    아니까 다행이다, 이 양반아.

    이 은혜 영원히 잊지 말길 바란다.

    영남파 때도 내가 도움을 안 줬으면 당신은 지금쯤 험한 꼴을 당하고 있었을 거야.

    “너도 한 대 필래?”

    “괜찮습니다.”

    이 사람은 담배를 참 많이도 피운다. 병에 걸려 안 죽는 게 신기할 정도. 이 사람은 나중에도 몸 건강히 잘 먹고 잘살기만 하는 거로 알고 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 다 병에 걸려 죽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는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큰 형님 만나 뵀다며?”

    이 사람 귀에도 그 이야기가 들어갔나?

    “예.”

    “영광인 줄 알아. 큰 형님, 그렇게 아무나 만나고 그러시는 분 아니야.”

    확실히 조직 내에서 권용일의 존재감은 무겁다.

    그래 봐야 깡패 두목 아니냐고 말하기에는 권용일이란 사람이 대단하긴 대단하다.

    시작은 깡패지만, 끝은 그룹 회장이지 않은가.

    깡패 새끼들을 데리고 대기업까지 세운 사람이 보통일 리 없다. 더군다나 화진파가 지금은 대한민국 삼대 조직에 들지 못한 그저 그런 조직이라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아마 황규혁 이 양반도 권용일의 진짜 면모를 모를 가능성이 크다.

    권용일은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화진파를 대한민국 최고의 조직으로 끌어 올릴 수 있다. 아직 때가 아니라서 안 하는 것뿐이다.

    이미 그 사람은 수많은 곳에 씨앗을 뿌리고, 수확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권용일을 높게 평가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천천히 가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인다.

    내가 그 사람의 행적을 검사 시절 때 면밀히 보지 못했다면, 그냥 깡패 새끼라고 무시했을 것이다.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 저도 좋았습니다.”

    “그래. 가끔 부르시면 재롱 좀 많이 떨어 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큰 형님이시지 않냐.”

    “알겠습니다.”

    높은 사람한테 잘 보이는 게 사회생활의 정석 아닌가? 이전 생에서는 이걸 못해서 뒤통수를 수십 번도 더 맞았다.

    더군다나 상대는 권용일이다.

    나조차도 이 사람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분명 어느 세력에게 스폰을 받는 것 같긴 한데, 그게 누군지 나도 파악하지 못했다.

    “아무튼, 일은 잘 끝났으니까 이만 애들 데리고 들어가. 너도 챙길 건 다 챙겼지?”

    “예. 꽤 묻어둔 게 많더라고요.”

    재범파와 양양파가 가지고 있는 구역들을 돌며 가방을 채우다 보니, 4억이 넘는 돈을 모았다.

    “받으십시오, 형님.”

    “응?”

    “좀 넣어 놨습니다.”

    황규혁은 내가 건네는 가방을 받지 않았다.

    “됐으니까, 너나 가져.

    “어차피 큰 형님과 성일환 형님께도 전달해 드릴 겁니다.”

    “형님들 가지고 계신 돈이 꽤 많다. 이런 건 그분들한텐 푼돈이야.”

    “그래도 버릇없어 보이고 싶진 않습니다. 그리고 형님께서 가장 큰 고생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계속 강요를 하자 황규혁도 결국 못 이기는 척하며 가방을 받았다.

    역시,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아, 너 들었냐?”

    “예?”

    “형님이 앞으로 여의도는 너한테 맡기라고 하시더라.”

    여의도를 내게 맡긴다?

    이건 권용일에게 듣지 못한 이야기다.

    “그럼….”

    “내가 영등포 관리하는 것처럼, 앞으로 네가 여의도 관리하면 돼. 똘마니들 충당해서 보내 주신다고 하니까, 잘해 봐. 물론, 나와바리 오야는 일환이 형님이실 거다. 그래도 실질적 관리는 너한테 맡긴다고 하니. 잘해 봐.”

    이건 성일환의 힘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권용일이 내게 날개를 달아 주는 건가.

    역시, 능력이 입증되면 팍팍 밀어주는 화끈한 스타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덥석 받을 순 없지. 약간의 밀당이 필요하다.

    “아직 전 학생인데, 갑자기 이렇게 맡기겠다고 하시면…. 형님이 맡아 주시는 게 훨씬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좋아 죽겠다는 표정 지으면서 뺑끼치지 말고.”

    “아닙니다, 형님.”

    황규혁은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도 도와줄 테니까, 네가 한번 잘 굴려 봐.”

    오늘에서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 사람은 확실히 내 편이다. 내게 어떤 가식도, 적의도 없다는 게 느껴진다.

    “형님께서 도와주신다면야 무서울 게 없겠지만 그래도 이건….”

    “그만 튕겨, 임마. 배 꼴린 새끼들 좀 있겠지만, 넌 잘 할 거야.”

    당장 황규혁을 못마땅하게 보는 간부들이 많다. 그런데 아직 고등학생인 내가 여의도를 맡는다고 하면 거품 물고 쓰러질 놈들이다.

    뭐, 딱히 그놈들이 무섭진 않다. 권용일이 내 능력을 인정해 준다면 다 찍소리도 못하고 따라야 한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수확은 단순히 돈이 아니었다.

    사실, 여의도를 어떻게 내 손아귀에 넣어서 주물러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뜻밖의 수입은 항상 땡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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