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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16화 (16/325)
  • 16화. 악연과의 만남 (7)

    현 정권이 진보 진영의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백기를 들었다는 건, 솔직히 나도 정말인지 아닌지 확신할 순 없다. 하지만 그 효과가 대단했다는 건 부정 못 할 사실이다.

    서로 죽고 못 살 것만 같았던 두 영웅이 눈앞에 놓인 왕좌를 보고는 동료에게 총질을 해 대지 않았던가?

    그 덕분에 보수 정당은 어부지리를 통해 차기 정권을 문제없이 양도받았다.

    언뜻 들어보면 허황되기 그지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권용일은 나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흠-.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게 언제쯤 일어날 것 같으냐?”

    “아직 현 정부에 호흡기가 달려 있긴 하지만, 2년은 못 넘길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2년이라….”

    미국도 한국의 사태를 점점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다. 나중에 그들은 그렇게 독재를 계속 한다면 한미 동맹을 파기하겠다는 협박까지 한다.

    그들이 현 정부에 결정타를 날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딱 2년이다. 그동안 화진파가 더 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

    그 준비란, 과연 어느 줄에 타서 줄타기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기업이 대기업으로 크려면 정부와 더러운 계약을 맺고 가야 하는 게 법칙이다. 정부 도움 없이 스스로 크는 대기업은 없으니까.

    “허허. 이거야 원.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맞다. 이런 얘기나 하러 온 게 아니다. 그리고 내 말은 아직 허황한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떡밥을 좀 뿌려 줘야 나중에 저 양반이 내 말을 신뢰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번 여의도 일은 한번 잘해 봐. 나라님들도 방해 못 하게 단도리를 잘해 놨으니까.”

    정부와 흥정을 보게 한 건 어디까지나 보험이었다. 딱히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진 않았다. 이미 정부는 천성 그룹에게 입막음을 당했을 것이다.

    “실망하게 해드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뭐, 어차피 네가 가진 애들로 벌이는 일이니까.”

    내가 가진 애들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을 보니, 만약 무슨 문제라도 생기게 되면 모든 책임을 내게 돌리려는 것처럼 들렸다.

    하긴, 이쪽 세계가 다 그렇고 그런 곳이 아니던가?

    “그래서 31일이라고?”

    “예. 31일에 재범파가 먼저 공격을 한다고 합니다. 이미 천성 쪽에서도 정보를 가졌는지, 준비를 마친 상태라고 합니다.”

    “천성에 대한 정보는 또 어디서 들은 겐지….”

    아차차. 괜히 천성 이야기를 꺼낸 건가. 그래도 크게 의심 어린 눈길을 보내는 것 같진 않다.

    “아무튼, 또 좋은 정보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

    언제든 말하라는 건, 언제든 만나러 와도 좋다는 허락이었다.

    “예, 큰 형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 건가.

    고작 차 한 잔만 마시고 가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그런데 말이야.”

    슬슬 일어날 준비를 하려고 하는데, 권용일이 다시 운을 뗐다.

    “솔직히 난 네가 화진파를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 네 욕심 때문이겠지.”

    “…예?”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잠시 넋두리를 잃은 내 모습을 보고는 권용일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일환이한테 그랬다며? 조직에서 이쁨받으려고 그렇게 빡새게 하는 거라고.”

    난 애써 부끄러운 척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야 저도 인정을 받을 테니까요.”

    권용일은 잔에 있던 차를 술인 것처럼 한꺼번에 들이키더니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녀석아. 그런 음흉한 속내가 다 보이는 연기는 그만해라.”

    뭐지? 이 사람은 마치 내 속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이럴 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까?

    그냥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웃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정색을 해야 할까.

    둘 중 뭐를 할지 결정하기도 전에 권용일이 치고 들어왔다.

    “욕심이다.”

    “…?”

    “네가 그랬지? 보수 쪽 놈들이 진보한테 먹잇감을 던져 줄 거라고. 그런데 그러는 이유가 뭐겠어?”

    보수가 진보에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던져 준 진짜 이유는 하나다. 항복이 아닌, 내분 작전이다.

    “그놈들이 착한 척하며 속에 꼭꼭 감추고 있던 욕심을 만천하에 드러내려는 거야.”

    저 번뜩이는 안광처럼, 참 날카로운 판단이었다.

    두 번 다시 올 것 같지도 않은 호기에 진보가 차기 정권을 놓친 건, 어디까지나 왕이 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지 않던가?

    “너도 그쪽이다. 결국, 네가 이렇게 일을 벌이는 건 다 욕심 때문이야. 그런 걸 야망이라고도 하지.”

    “….”

    정곡을 찔렸다고나 해야 할까. 완전히 내 속내를 읽은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팩트를 드러낸 건 맞았다.

    “네가 연합이란 걸 키웠다고 들었을 때 알았지. 네놈 욕심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연합 내에서도 규정을 만들어 철저히 관리를 한다고 들었다. 그런 놈은 꼼꼼한 게 아니야. 더 큰 그림을 보고 있는 거지. 그런 놈일수록 가진 욕심은 엄청나다.”

    “…큰 형님께서는 이런 욕심을 달갑게 보시지 않습니까?”

    하지 말아야 할 소리를 하고 말았다. 이건 마치 당신 말이 맞는다는 걸 확인시켜 주는 꼴이 아닌가?

    저 사람이 먼저 진지하게 나와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된 것 같았다.

    “네 욕심이 향하는 곳이 과연 어딘지 나는 모른다. 이 화진파일 수도 있고, 다른 곳일 수도 있지.”

    이런. 저렇게나 사람을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자칫 잘못하면 화진파를 손아귀에 넣기도 전에 권용일에게 숙청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네가 내 자리를 노리든 말든, 상관 안 해. 내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하나다. 과연 내 조직이 어디까지 클 수 있느냐지.”

    하지만 이런 반응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내가 이 조직을 노리고 있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오직 이 조직의 성장만을 바라보겠다는 건가?

    “대기업들은 조선 시대 왕들처럼 대대로 기업을 물려주고 있어. 제 자식새끼들이 잘난 거 하나도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난 능력을 중시하는 사람이야. 내 아들놈들이 미련하면 다른 놈한테 조직을 맡기는 게 훨씬 나.”

    서양 문화에서는 자식들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자식에게 가문의 일을 물려준다. 그리고 모두 그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생각의 틀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하지만 웃긴 건, 이게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잘도 제 자식에게 화진 그룹을 맡기지 않았던가?

    그럼, 왜 당신 첫째 아들한테 그룹을 물려주었냐고 물어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물론, 승계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나도 자세히 모른다. 어쩌면 첫째 아들이 권용일의 뜻에 따르지 않고, 강제로 권좌를 강탈한 것일 수도 있다.

    “난 욕심이란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남자가 정복욕이 있어야지. 모든 것을 다 정복해서 깃발을 꽂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정복이라.

    이 남자는 어쩌면 자신의 가족을 신경 쓰기보다는, 자신의 조직이 더 넓게 뻗어 나가는 걸 원하는 것 같았다.

    화진파가 커질 수만 있다면 이 조직의 수장이 누가 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건가?

    “난 네 욕심이 나쁘지 않다. 네 욕심 덕분에 우리 조직이 더 크고 있지 않냐? 물론, 욕심이 너무 앞서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건 알아 둬라.”

    왜 이런 말을 내게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경계를 하라고 말하는 것인지,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큰 형님. 앞으로도 조직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또, 또! 입에 발린 소리 하고 있어.”

    “진심입니다.”

    “아무튼, 조만간 또 보자. 다른 놈들은 내 얘기를 못 알아 처먹어서 답답한데, 넌 좀 알아듣는 것 같으니까.”

    “감사합니다, 큰 형님.”

    난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오늘 수확물은 아주 컸다.

    권용일이란 사람과 인연을 만들었고, 그에게 강렬한 인상도 심어 주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으니, 금상첨화다.

    “가면서 일환이 보고 안에 들어오라고 해.”

    “예, 큰 형님.”

    난 조용히 문을 닫고 집무실 밖을 나와 일 층으로 내려갔다. 성일환은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중이었다.

    “형님.”

    “어, 왔구나. 그래. 큰 형님 인상이 좀 험하시지?”

    내 어깨를 치면서 눈을 찡긋 이는 성일환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 오히려 좋았습니다. 고급스러운 차도 한 잔 주셨고요.”

    “응? 차를 주셨다고?”

    “예. 차 맛이 아주 좋던데요? 그런 차는 처음 마셔봤습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성일환의 눈빛이 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아차, 차가 꽤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나 본데….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성일환은 내 어깨를 다시 치며 과장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고생했다. 일단 밖에 차 대기시켰으니까, 먼저 서울로 올라가. 가서 할 일도 많을 텐데.”

    “알겠습니다, 형님. 그리고 큰 형님께서 잠깐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래. 내일 보자. 최종 확인 작업은 해야지.”

    최종 확인 작업이란, 여의도를 칠 수 있는 군대가 다 마련이 되었는지 확인하겠다는 뜻이었다.

    “예, 형님.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난 성일환에게 인사를 하고 별장 밖으로 나왔다.

    이미 차량 기사는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는지, 바로 시동을 걸었다.

    난 제자리에서 별장을 빙 둘러보았다.

    앞으로 이곳에 자주 올 것 같다.

    * * *

    “형님. 성일환입니다.”

    “어, 들어와.”

    성일환은 안에 들어가 상 위에 있는 두 개의 찻잔을 보며 불퉁거렸다.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차까지 주시고.”

    “왜, 샘나냐?”

    “제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 저한테도 차를 주시는 건 드물지 않습니까?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이상, 차를 따라 주지 않으시잖아요.”

    권용일은 참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다.

    만나는 상대에 따라 건네주는 음료가 달라진다.

    마음에 안 들면 아무것도 안 주고, 조금 흥미가 생기면 겉치레로 물을 한 잔 준다. 거기서 좀 더 나가면 술을 주는데, 자신이 아끼는 찻잔인지라 정말 흥미가 당기지 않는 한 찻잔은 내놓지 않는다.

    성일환은 그런 권용일의 버릇을 아는 터라, 농담 반 질투 반으로 말한 것이었다.

    “그놈… 한번 잘 키워 봐.”

    “예?”

    “뭐, 모자란 네놈이 오히려 그놈한테 안 먹히면 다행이겠다만.”

    황규혁 이후로, 누군가를 잘 키워 보라는 말은 오랜만이었다.

    “하하. 그렇게 마음에 드신 겁니까? 이거, 예상외인데요?”

    “통찰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놈이다. 보는 시야가 넓어. 배짱도 있고. 네가 옆에서 잘 도와줘라. 오랜만에 왕건이 하나 나올 것 같으니까.”

    성일환은 지금 이 남자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만큼 김태산이란 꼬마가 마음에 든 것일까?

    설마, 이 냉혈한이 저 정도로 그 녀석을 좋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늙은이의 장단이나 좀 맞춰 줄 거로 생각했는데.

    “여의도 일이 끝나면, 거기를 한번 맡게 해 봐.”

    “예? 그, 그건 너무 갑작스럽지 않을까요? 내부에서도 불만이 나올지 모릅니다.”

    이 정도까지 그 꼬마를 밀어주는 것인가?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한 녀석에게 여의도를 다 넘겨준다는 건 너무 성급한 판단 같았다.

    “불만 있다는 새끼들은 다 오라고 해. 그놈들이 여의도에서 하는 게 뭐가 있다고! 하여튼, 다 놀고먹을 줄만 알지. 그 핏덩이도 전투적으로 나오는데, 다른 놈들은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성일환은 입을 꾹 다물었다.

    “태산이 그놈이 거느린 똘마니만 해도 몇백이라며, 핏덩이기는 하지만 그걸 그 버러지들이 다 상대할 수 있다고 하나? 지들 밥값이나 하라고 해.”

    권용일은 항상 능력을 중시하는 사람 아니던가?

    짬이라는 건 다 엿이나 먹으라는 식으로, 능력이 좋은 사람은 무조건 위로 올려 준다.

    김태산 덕분에 죄 없는 노땅들만 욕을 먹게 생겼다. 그건 성일환도 포함일 수도 있으니, 그는 조용히 권용일의 한탄을 듣고만 있었다.

    그래도 여의도를 맡기라니.

    내부 불만은 모두 성일환이 잠재워야 했다.

    영등포를 맡아 보라고 황규혁을 그곳에 던져 놓았을 때도, 임원들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들을 또 달래줘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벌써 몸이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 * *

    5월 31일.

    드디어 거사를 치를 날이 왔다.

    이미 내 명령에 따라 150명의 학생이 집결했다. 이놈들 인상을 보니, 절반 정도는 고등학생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삭아있었다.

    다 죽어가고 있는 재범파와 양양파를 쓸어버린 다음, 이 150명을 내세워 천성 그룹이 보낸 조직들과 대치를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분명 우리가 고등학생인 것을 모를 것이고, 화진파에서 보낸 150명의 조폭이라고 생각할 터. 이 정도의 머릿수면 확실한 기선제압을 할 수 있다.

    검사 시절 때에도 이 정도로 많은 인원을 투입해 본 적은 없었다. 감정의 고조 때문인지 나도 살짝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연욱도 막상 150명이란 숫자를 한곳에 모아 보니, 장관이 꽤 괜찮았나 보다.

    “애들한테 상황은 다 말해 줬지?”

    “어. 조폭 잡으러 간다니까 다들 난리다. 쫄지 않아서 다행이지.”

    무려 150명에 달하는 숫자이니, 상대해야 할 적이 조폭이라는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럼,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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