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15화 (15/325)

15화. 악연과의 만남 (6)

계획했던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걸 알려 주려고 성일환이 직접 학교까지 찾아온 게 아니었다.

“여기는….”

서울에서 차를 타고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곳은 천안이었다. 이곳에 성일환이 나를 태우고 왔다는 건 무슨 뜻이겠는가?

“널 만나보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시다.”

화진파의 실질적인 이인자가 말을 높일 정도의 사람이라면 단 한 사람뿐이다.

“성격이 불같은 분이시긴 하지만, 차가울 땐 누구보다도 차가우신 분이야. 냉철한 분이시지. 이야기를 나눠 보면 너도 배우는 게 많을 거다.”

“…혹시 큰 형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큰 형님을 뵈러 온 거다.”

역시나!

화진파의 대부, 화진 그룹의 초대 회장 권용일을 드디어 만나 보는 것인가.

쓰레기들을 한곳에 모아 거대한 기업으로 만들어 버린 권용일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아무리 대기업 회장이라고는 하지만, 시작은 깡패였다. 그래 봐야 거기서 거기가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사람만큼은 다르다.

그냥 쓰레기로 치부하기에는 세상에 보여 준 능력이 너무 뛰어나다.

왠지 모르게 나도 기대가 되면서 한편으로는 긴장도 되었다. 이런 기분은 참 오랜만이다.

“이런 시골에 큰 형님이 계시는 게 좀 이상하긴 하지?”

천안이 급속도로 발전을 하기 시작한 건 1990년대부터다. 지금은 촌구석이라고 불릴 만큼 개발이 더딘 상태였다. 하지만 화진 그룹은 이 촌구석에 대기업들을 끌어모아 공업 도시로 만들었다.

화진 그룹을 크게 만들어 준 건설업. 그 꽃을 피우는 곳이 바로 이곳 천안이라는 것이다.

차에서 내리자, 허허벌판에 만들어진 고급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

3층 높이로 만들어져 있는 이 별장 주변에는 밭과 논이 고요한 풍경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시골의 구수한 냄새가 나는 곳이랄까.

권용일은 이런 시골 취향을 좋아하는 사람이려나.

별장 안에 들어가니, 경호원들부터 시작해 제초 작업을 하는 사람들과 음식을 만들고 있는 가정부들이 보였다.

그들은 조용히 성일환에게 고개를 잠깐 숙일 뿐, 다시 본연의 일을 하며 우리에게 신경을 껐다.

“형님. 성일환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다른 조직원은 모두 별장 밖에 놔두고, 나와 성일환만 안으로 들어가 2층에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방 하나가 전부였는데, 아무래도 이곳이 권용일의 개인 집무실 같았다.

“들어와.”

조금씩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음을 느꼈다.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첫 만남이었지만, 과연 그가 나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데려왔습니다.”

“그려, 수고했다. 나가 봐.”

성일환도 합석할 줄 알았더니, 권용일은 나와 독대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안녕하십니까, 큰 형님. 김태산이라고 합니다.”

환갑이란 나이가 무색하게 권용일의 얼굴에는 혈색이 돌고 있었다.

권용일은 호랑이 얼굴을 하고 있다고 했던가.

과연 그 말이 틀리지 않은 듯싶다. 누가 저 얼굴을 환갑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아직도 팔팔한 호랑이 기운이 몸 안에서 흘러넘치고 있음을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리 와서 앉아라.”

나는 권용일의 손짓에 따라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훑어봤다. 나도 그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인물은 좋구나.”

첫 마디는 그냥 흔히들 할 수 있는 칭찬이었다.

“감사합니다, 큰 형님.”

“나한테 철없는 막둥이가 하나 있는데, 그 녀석이 널 보면 아주 좋아하겠어. 어때? 우리 딸도 꽤 반반하거든.”

권용일에게는 막내딸 하나가 있다.

나보다 3살 많던가?

그 여자는 지금 미국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권용일이 죽은 뒤 막내딸은 그룹 일에 일체 상관도 하지 않은 터라, 내 관심 사항 밖이었다.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형님.”

“허허. 그래그래. 나중에 기회 되면 한번 만나봐.”

“예, 형님.”

시답잖은 이야기는 이제 여기서 끝났다.

슬슬 본격적으로 저 사람과 얘기를 나눌 차례였다.

“네가 우리 식구가 되면서 빡새게 일하고 있다는 건 많이 들었다. 욕 좀 보고 있다고 하던데.”

“아닙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대답은 최대한 겸손하게 했다. 괜히 내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잘난 척을 해서는 안 된다.

예상대로 권용일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랑이 얼굴에 어울리지도 않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일환이가 다짜고짜 찾아와서 여의도 얘기를 꺼냈을 때 궁금했지. 어떤 놈이, 콩알만 한 그놈 간땡이를 부풀어 놓았는지.”

“그건….”

“질책하는 게 아니야. 지금처럼 정부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렸을 때, 재빨리 치고 빠지기 좋은 기회지. 기특한 생각이다.”

연이은 시위로 인해 정부가 바쁘다는 걸 말한 것이었다. 그 덕분에 나도 여의도에 발을 걸칠 기회를 잡지 않았는가?

“재범파와 양양파가 곧 있으면 큰 전쟁을 벌인다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건, 나한테도 넘어오지도 않은 정보가 어떻게 네 손에 들어갔냐는 건데….”

이런. 이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난 그저 미래를 알고 있을 뿐이었는데, 아직 이 정보가 권용일 귀에 들어가지 않았던 건가?

“주제에도 맞지 않는 연합회장을 하고 있다 보니, 이 소식 저 소식을 듣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 없이, 그냥 간단하게 말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괜히 둘러대다가는 쓸데없는 의심만 산다.

“그래? 그거참, 유용한 정보처구나. 앞으로 나도 좀 이용을 해 보자. 네 덕분에 내 정보통 일을 하고 있던 놈들이 다 잘려나갔거든.”

그 사람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다. 중요한 정보가 있다는 명분으로 권용일과 자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황규혁도 그렇고, 성일환도 그렇고. 두 놈 다 지금 이 상황이 쪽팔릴 거다. 다른 애들도 아니고, 새파랗게 어린 핏덩이들 긁어모아 일을 벌여야 하니, 가오가 상하긴 할 거야.”

당연히 부끄러워해야지. 그래야 여의도를 가진 이후에도 내게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도와줄 때 생색낼 수 있을 정도로 화끈하게 도와줘야 그 은혜를 잊지 않는다.

이 영감은 내게 고맙다는 말과 주의하라는 말을 섞어서 해 주는 것이었다.

“제가 너무 버릇없게 보였을까요?”

“그놈들은 너한테 완전히 빠졌어. 문제는 다른 놈들이지.”

다른 놈들이라는 건 화진파에 있는 다른 간부들을 말하는 것인가?

“너무 튀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괜찮아. 어차피 세상은 무한 경쟁 시대야. 잘난 놈이 잘 나가는 게 당연한 일이지.”

무한 경쟁 시대.

틀린 말이 아니다.

세상은 결국, 누가 먼저 정점에 올라섰는가를 두고 판단한다.

옛날 권용일이 인터뷰를 했을 때, 무한 경쟁 시대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시대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총성 없는 전쟁이 전 세계에 빗발칠 거라고.

그래서인지 권용일은 회사 경영을 단순히 나이로 하지 않고, 능력을 바탕으로 했다.

그저 짬을 더 먹었다고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아닌, 그동안 보여 준 성과와 능력을 보았다. 즉, 나이와 상관없이 자리를 올려 준다는 것이었다.

“난, 능력을 보는 사람이야. 네가 고등학생이든, 다 늙은 노땅이든 상관 안 해. 결과가 좋다면 내가 전적으로 지원을 해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날뛰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렷다?

“그 말씀은 과정은 상관하지 않으신다는 겁니까?”

“허허. 말귀가 빠른 놈이라 마음에 드는구먼.”

결과만 좋다면 과정은 아무래도 괜찮다. 대신, 그 과정에서 일어난 먼지를 뒤집어쓰는 건 권용일이 아니다. 그 과정을 일으킨 장본인이거나, 혹은 대리인일 것이다.

모든 대기업의 수법 아니던가?

대장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오리발을 내밀고, 그들이 내세운 대리인만 법의 심판을 받는다.

거지 같은 시스템이긴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유용한 방편이 될 것이다.

“아무튼, 꽤 똘똘한 놈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가볍게 얼굴이나 보려고 부른 거니까, 부담 갖지 마.”

“저는 큰 형님을 뵌 것만으로 영광입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녀석. 그렇게 안 생겼는데, 혀가 번지르르하네.”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권용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고급스러운 청자 느낌이 물씬 나는 찻잔을 내 앞에 두었다.

“내가 나이가 있어서 요즘 차를 가까이하거든. 혹시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 갖다 달라고 할까?”

“아닙니다. 저도 술은 입에 대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이거 한 번 마셔 봐. 젊은 놈 입에 맞을진 모르겠다만.”

한가하게 티타임이나 즐기려 온 건 아니지만, 난 권용일의 권유에 따라 잔에 담긴 차를 천천히 음미했다.

생각보다 차 맛이 매우 뛰어났다.

“어때?”

“이런 차는 처음입니다. 정말 맛이 깊은데요?”

“네가 18살밖에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차 맛이 깊은지 어떻게 알아?”

“하하. 그렇긴 하지만, 차 맛이 아주 좋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 자꾸 마시다 보니까 이게 술보다 더 땡기더라고.”

뜨뜻한 차 덕분에 조금은 무거웠던 분위기가 녹아드는 것 같았다. 그러다 상 위에 있는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점점 심각할 수준으로 치닫는 전국 시위 현장이 신문 1면을 차지했다.

처음에는 정부도 언론을 통제하느라 애를 먹었을 텐데, 지금은 포기한 것 같았다. 저렇게 버젓이 정부를 비난하는 기사가 오를 정도이니.

“요즘 난리도 아니지?”

내 시선을 눈치챈 것일까.

권용일과의 이야기 방향이 다른 곳으로 틀어졌다.

“예. 이러다가는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참여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넌,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냐?”

대학생, 직장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 거리에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 양반은 내 통찰력을 확인하고 싶은 건가? 그냥 물어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도 이 사람의 생각이 궁금했다.

“결국 백기를 들지 않을까요?”

“총탄으로 무장한 군인들이야. 광주에서 있었던 일 못 들었냐?”

“총알보다 강한 게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군인이 포탄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단결한 국민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권용일의 덤덤했던 표정이 순간 꿈틀거리며 조금 놀란 얼굴빛을 띠었다.

“내 밑에 있는 애들은 정부가 이길 거라고 하던데, 너는 아닌가 보다?”

내가 미래를 알지 못했다면 나도 현 정부의 승리를 점쳤을 것이다. 누가 봐도 정부의 힘은 압도적이라는 것을 알지 않던가? 하지만 정부에 깊숙이 관련된 사람들은 지금쯤 답이 나왔을 거다.

이 정부가 오래 가지 못할 것임을.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는 차선책을 마련해야 함을 말이다.

“큰 형님께서도 현 정부가 국민들을 짓밟고 이 나라를 계속 통치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난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여러 군데에서 정보를 얻는 거지. 그럼, 너는 이 정부가 끝장나고 진보 진영 애들이 다음 정권을 가져간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 양반.

분명 자신도 생각해 둔 바가 있을 텐데, 속마음을 철저히 숨긴다. 절대 자신의 의견을 내놓지 않고,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을 하겠다는 건가?

“제가 만약에 현 정부의 대통령이라면 말입니다. 이 정부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건 대충 눈치챘을 겁니다. 그렇다면 살 구멍을 만들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한층 더 흥미롭게 바뀐 권용일의 얼굴을 보니, 뭔가 기분이 짜릿하기까지 했다.

“재밌는 놈일세. 그래서?”

“차기 정권을 생각할 것 같습니다. 차기 정권에도 보수가 힘을 잡아야, 대통령은 파란 집에서 내려와도 등 따스하게 살 수 있으니까요.”

“차기 정권을 위해 일선에 물러난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살길을 찾는 겁니다. 지금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 바보가 아닙니다. 군권을 이용한 건 맞지만, 순식간에 나라를 휘어잡은 사람들이니까요.”

쿠데타가 말은 쉽지,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철저한 계획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나라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미국도 있다. 이들까지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보통을 넘는 머리가 아니면 거사를 일으키기 힘들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게, 검이나 총을 든 장군들이 모두 멍청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나, 별을 머리 위에 단 사람들이다. 그들이 음흉하면 음흉했지, 절대 멍청하진 않다.

그들은 어디에 줄을 대야 살 수 있는지 귀신같이 아는 사람들이니까.

“흐음-.”

다른 사람들이라면 내 이야기를 듣고 코웃음을 쳤을 거다. 하지만 권용일은 심사숙고하는 모습을 보이며 콧등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현 정부가 무너지면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진보 세력이 정권을 잡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이 양반도 현 정부가 무너지면 차기 정권은 저절로 진보 진영의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 당시에는 모두가 이렇게 생각했다.

“물론,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현 정부는 바로 그걸 약점으로 이용하겠지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약점이라니?”

“지금 정부가 백기를 들고 항복을 한다고 하면, 이제 전쟁이 벌어지는 건 보수 정당이 아닌 진보 정당입니다. 그들은 서로 왕위에 오르기 위해, 생사를 같이 한 동료들의 등 뒤로 비수를 꽂을 겁니다.”

“오늘의 동료가 내일의 적이 된다?”

“예. 정부가 던져 준 왕좌를 그들이 순순히 서로 양보하며 나눠 가지려고 할까요? 그들은 결국 정치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권용일은 꽤 충격이 컸는지 잠깐이지만 멍한 얼굴을 보였다.

지금은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내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걸 몇 년 만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만약에 정말 현 정부가 백기를 들게 되면, 그건 진짜 항복이 아니라는 거구나.”

“예. 이이제이하는 셈이지요.”

오랑캐를 오랑캐로 물리친다는 전략.

현 정부는 이 방법으로 차기 정권까지 꿀꺽 삼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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