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악연과의 만남 (5)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정부와 쇼부만 잘 본다면야 나쁠 건 없지.”
지금은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할 때다. 대기업들도 정부의 명령이라면 일단 엎드려 보지 않던가?
“그런데 일환아. 이거, 시간 싸움이다. 네가 천성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해.”
“천성이요?”
천성이란 말에 성일환은 움찔거렸다. 대한민국 삼대 조직이면 모를까, 천성은 껄끄러운 상대다. 이들의 힘은 주먹이 아닌, 돈이 아니던가?
주먹보다 돈이 더 무서울 때가 많다. 그것도 엄청난 양의 돈이라면 말이다.
“천성 놈들이 여의도를 넘보고 있다는 소리가 있어. 그놈들도 이미 정부에 약을 쳐 놓은 거 같아. 자기들이 두 조직을 박살 낸 다음에 여의도를 먹으려는 거겠지. 정부는 눈감아 주고.”
천성 그룹이 움직였다면 상당한 돈다발이 정부에 흘러갔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천성 그룹이 여의도에서 무슨 짓을 해도 정부는 못 본 척한다는 소리인데….
생각보다 강적이 나타난 것 같아 성일환은 꼬리를 내렸다.
“다른 놈들도 아니고, 천성이면… 이거 물릴까요?”
“떽! 화진파가 그런 놈들에게 언제 꼬리 내리는 거 봤어!?”
“그렇지만 큰 형님, 상대는 일개 조직이 아니고 천성입니다. 그놈들이 뿌린 돈이라면 발가락이라도 핥을 놈들이 널렸단 말입니다.”
천성이 가진 자금력은 거대 조직들을 수월히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대단하다. 이들에게는 화진파가 그저 일개 나부랭이들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이 권용일의 승리욕을 자극한 것일까, 아니면 무시를 받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던 것일까.
“한번 해 봐.”
“혀, 형님.”
“그 두 버러지 같은 놈들 깨끗하게 밀어 버리고, 천성도 감히 우리 나와바리에 손대지 못하게 잘 단도리 해 보라고.”
아뿔싸. 이 영감, 눈빛이 달라진 걸 보니, 천성이란 적과 싸우는 것 자체가 피를 끓게 한 것 같았다.
“천성이 정부에 듬뿍 돈을 안겨 줬을 텐데요. 그러다가 정부와 시비라도….”
정부와 충돌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없다. 지금 정부는 국민을 향해 총탄을 쏠 만큼 무자비하다.
하물며 조직폭력배들에게 그 짓 못 하겠는가?
“괜찮아. 어차피 정부도 이번 일은 나 몰라라 할 거야.”
그러나 정부가 나설 일이 없고, 그저 모른 척하고 상황을 방관하기만 한다면?
“정부한테 돈 좀 안겨 주면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우리가 천성만큼 주지는 못해도, 예의상으로라도 좀 안겨줘. 그럼 이번 일에 크게 터치하진 않을 거야.”
권용일이 이렇게 확신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절대 이유 없이 감정적으로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성일환이 잘 알고 있었다.
“그놈들도 많이 바쁜가 봅니다.”
“바쁘지. 거리에 있는 젊은것들 막아내고, 머리털 빠지는 영감들까지 상대해야 하니까.”
여의도를 세세하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나라가 혼란스럽고, 정부는 그 혼란을 막느라 급급하다.
“그래도 결국 군독 놈들 승리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힘없는 국민은 총구를 들이민 군대를 이기지 못한다. 광주에서 벌어진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성일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개미들이 한 곳에 모이면 그것을 사뿐히 지르밟는 게 군권이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권용일은 한심하다는 듯 성일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이 형광등 쪼다야.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느냐. 쪽수에는 장사가 없다고! 나라님들이 아무리 저래봐야, 진짜 개돼지가 화가 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거야. 명심해라!”
권용일은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이 사람이 예측한 건 언제나 귀신 같이 맞아 떨어졌다.
“…알겠습니다, 형님.”
이 사람은 설마 정부의 붕괴를 예측하는 것인가? 성일환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정말 이 군 정부가 끝장날까?
“그런데 천성 그룹과 충돌하는 건 아무래도 좀 께름칙합니다.”
“그놈들 행동이 깡패보다 더 하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사업 하는 놈들이야. 주먹질은 다른 놈들에게 맡기겠지.”
“그럼, 우리 힘으로 그놈들까지 다 밀어내자는 말씀이시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화진파의 힘을 제대로 보여 줘. 대한민국 삼대 조직에 아직 들진 못했다고는 해도, 그놈들에게 절대 꿀리지 않는다는 걸 천성에게도 알려 줄 필요가 있지.”
“그래도 나중을 생각하신다면….”
“시끄러워! 이럴 때 기가 팍 죽으면, 다음에도 어깨 못 펴는 거야. 그리고 오히려 천성이 우릴 도와주는 거다. 여의도에 달라붙어 있는 쓰레기들을 한곳에 모아 정리할 기회는 주는 거니까.”
천성을 무서워하지 않는 건가. 그러나 권용일의 말대로 여의도에 붙어 있는 찌꺼기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판단력 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사람이 아니던가?
“알겠습니다. 형님 말씀대로 해 보겠습니다.”
“어때? 피가 좀 끓는 것 같지 않냐?”
“형님은 여전하십니다. 제가 건강 걱정할 필요가 없겠네요. 근데 저도 피가 좀 끓긴 합니다. 흐흐.”
주먹질하는 조직들 보다 훨씬 더 거대한 조직과 싸우는 일이다. 성일환도 오랜만에 전투 기질이 발동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 태산인가 뭔가 하는 놈. 다음에 한 번 데려와. 꽤 재밌는 놈 같은데.”
“하하.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권용일이 누군가를 점지해서 직접 얼굴을 보겠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당돌한 꼬맹이 놈이 이 남자의 마음에 든 것이다.
“그건 면상을 직접 봐야 알겠지. 그리고 네가 나라 놈들하고 잘 얘기하도록 해.”
“예. 돈 좀 쓰고 오겠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돈 안 줘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냥 예의상 주는 거라 생각해. 용돈 정도로.”
너무 많이 줄 필요는 없다는 소리였다.
성일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그럼, 또 찾아뵙겠습니다.”
“밖에서 그만 뻘짓 하고 그냥 들어와서 나랑 바둑이나 둬.”
“하하. 제가 남몰래 바둑 선생이랑 연습 중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지랄.”
서로 편한 상대처럼 농담을 주고받긴 했지만, 성일환은 권용일에게 더 없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그에게는 새로운 지표를 보여주는 선장이자, 자신이 꼭 붙잡아야 할 든든한 줄이 아니던가?
* * *
“똥줄 타냐?”
5월 29일.
재범파와 양양파를 노릴 수 있는 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천성 그룹도 여러 조직을 모아, 그 둘을 솎아 버릴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젠장. 이렇게 나가리인가.”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성일환도 손을 턴 것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화진파가 바보도 아니고, 천성 그룹이 관여하고 있다는 걸 알면 꼬리를 내리지 않을까?”
연욱이는 내 속을 긁어 놓는 게 재밌는지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얄밉긴 하지만, 이놈 말이 틀렸다고는 볼 수가 없다.
천성이 나선다는 걸 알면 화진파도 부담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더군다나 권용일은 화진파를 조직형 기업으로 만들려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1, 2위 자리를 다투고 있는 천성에게 밉보일 짓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쩌지? 그냥 내가 애들을 모아서 천성이랑 거하게 한판 떠야 하나?”
“미친놈. 어린 애들 다 저승길로 보내고 싶냐? 이번 일은 그냥 덮어. 욕심이 지나치면 다친다.”
아깝다. 여의도를 이렇게 놓치는 건가.
그곳을 내 거점으로 삼아 세력을 키우려 했더니.
“여, 여기 태산이네 반이지?”
“예, 선생님.”
“태산이는 저쪽에 있어요.”
내 이름이 들리자, 저절로 시선이 교실문 쪽으로 돌려졌다. 거기에는 학주가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 태산아. 지금 밖에… 누가 널 찾아왔다.”
“예? 누가요?”
학주는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그게 어깨에 힘 좀 주는 사람들 같던데.”
어깨에 힘주고 다는 사람들?
설마….
난 내 번뜩이는 직감이 맞을 것으로 생각했다.
“교문 앞에 있는 거죠?”
“그, 그래.”
어지간히 겁먹은 것을 보니, 머릿수가 꽤 된다는 건데.
이 정도 인원을 동원할 사람이라면 성일환밖에 없다. 아니라면 다른 조직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건데….
일단 나가봐야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이 가 줄까?”
연욱이도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야. 아무래도 성일환 같은데.”
“성일환이 여기까지 찾아왔을까? 그냥 널 부르면 되는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걸 아는 거겠지.”
“그려. 일단 얼른 나가 봐. 내가 위에서 지켜보고 있을게. 혹시라도 허튼짓 하는 놈들이라면 애들 다 끌고 나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렇게 든든한 지원군도 있으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쪽 학생들이 모두 날 잘 따라 줘서 다행이다.
난 겁에 질린 채 밖에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학주를 뒤로 하고 정문 쪽으로 나갔다.
과연 날 불러낸 사람의 위치를 보여 주듯, 검은 차량 세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하다.”
내가 정문 앞에 도착하자, 가운데 있는 차량의 창문이 내려갔다. 그러자 성일환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닙니다. 이렇게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부르셔도 되는데….”
“그냥 내가 널 찾아오는 게 빠르지. 일단 타라. 오늘 수업은 빼도 괜찮겠지? 부담이 된다 싶으면 내가 여기 교장한테 말해 놓을까?”
“괜찮습니다. 어차피 수업도 거의 끝날 때였습니다.”
일이 급했는지 성일환은 내가 차에 타기 무섭게 본론을 꺼냈다.
“큰 형님께도 허락을 받아 놨다. 정부와도 이야기 끝났고.”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시일이 조금 걸렸던 건가?
“그런데 문제는, 이번 일에 천성이 연관되어 있다는 거야. 그놈들도 재범파와 양양파를 노리고 있어.”
“그렇습니까?”
“….”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시큰둥하게 반응을 했다. 그냥 좀 놀라는 척이라도 해 줄 걸 그랬나?
성일환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냐?”
“예?”
“천성이 끼어든다는 거.”
“아뇨. 그런 것까진 몰랐습니다.”
“꼭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반응하던데.”
“그냥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뿐입니다.”
성일환은 입을 꾹 다문 채 날카로운 눈빛을 띠었다.
“상대가 천성이야. 일개 조폭이 아니고.”
“차라리 잘된 일 아닙니까?”
“뭐? 어째서?”
“천성이라면 분명 여의도에 찌꺼기처럼 붙어 있는 조직들을 한곳에 모았을 거로 생각합니다. 다른 조직에서도 인원을 빌렸겠지요. 이번 기회에 한 번에 청소할 수 있습니다.”
내 대답에 성일환은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나, 큰 형님이나 생각하는 건 판박이네.”
권용일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건가?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조금 미묘했다.
“이번 일이 꽤 개판이다. 정부 눈치도 봐야 하고,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건 돈 지랄 잘하는 놈이고.”
“피가 끓는다고 해야 할까요? 다 죽은 놈들 족치는 것보단 이게 훨씬 나은데요?”
“하하하!”
결국 성일환은 박장대소까지 했다. 이게 저렇게 웃을 일만은 아닐 텐데?
“난 놈이구나, 난 놈. 넌 완전 이쪽 사람이야. 어떻게 말 한마디를 해도 우리 형님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지.”
이번에도 내가 권용일과 똑같은 소리를 했다니. 그 영감도 피가 끓긴 끓는가 보군.
“좋아. 이번 일은 전적으로 너한테 맡긴다. 원래 형님께서는 내게 맡긴다고 하셨지만, 내 독단이다. 책임도 내가 질 테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괜찮으시겠습니까? 저, 한 번 밟으면 멈추지 않고 달려갑니다.”
“브레이크는 없다는 거지?”
“일이 끝나면 저절로 엔진이 꺼질 겁니다.”
“좋네. 그게 우리 화진파 스타일이지, 뭐.”
성일환이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화끈할 때는 화끈한 사람이란 건가?
내게는 쌍수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화진파에서 인원 20명만 지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20명이라-. 지금 다들 바쁘긴 하지만, 황규혁이랑 잘 손발 맞춰서 해 봐.”
황규혁이 지원군으로 나선다면야 나로서도 나쁘지 않다. 재범파와 양양파를 쓸어버린 다음에, 천성에서 보낸 조직원을 제압하려면 황규혁의 순발력이 필요하다.
“예. 그럼 저도 애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몇 명까지 생각해 놓고 있어? 설마 300명을 다 동원할 건 아니지?”
“그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할 것 같진 않습니다. 다만, 천성 그룹이 보낸 조직원들을 압살시키려면 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이왕 붙는 거 제대로 붙어 봐. 그놈들 덤비지도 못할 만큼의 머릿수라면 제깟 놈들이 어쩌겠어?”
“예, 알겠습니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다.
권용일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조직 내에서도 이 일에 불만을 품을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성일환은 내게 전권을 맡긴다고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황규혁이나 나나 너한테 면목이 없다. 우리 애들을 전부 데려다 쓰는 것도 아니고, 네가 아직 다 크지도 않은 고등학생들을 모아 여의도를 치겠다고 하니….”
성일환의 처지에서 보면 쪽팔릴 만한 일이긴 하다. 이제 갓 들어온 막내, 그것도 고등학생에 불과한 어린놈한테 지원 병력을 받고 있으니까.
“아닙니다. 조직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게 기쁠 뿐입니다.”
“그렇게 말해 주면 나야 고맙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내가 여의도를 노리는 건 너희들을 위한 게 아니다. 너희들은 그저 내 앞에 레드카펫을 깔아 주면 된다.
난 그 카펫 위를 당당히 걸어 여의도에 묻혀 있는 돈다발을 터는 일만 남았다.
땡전 한 푼도 이놈들에게 넘겨 줄 생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