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악연과의 만남 (4)
“정부와 대기업들이 두 조직을 노리고 있다니요?”
우리 둘의 대화를 아직 캐치하지 못한 황규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규혁이.”
“예, 형님.”
“넌, 이 친구한테 좀 배워.”
“….”
“내가 항상 그랬지? 눈을 넓히라고 말이야. 지금 너한테 중요한 게 영등포인 건 맞지. 맞지만, 너무 한쪽에 집중했다가는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향 냄새 맡는 게 이쪽 세상이야.”
“…명심하겠습니다.”
호오. 둘이 이런 사이였단 말이지?
황규혁의 멘토는 성일환이었나?
아무런 거부감 없이 쓴소리를 받아내며 배우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니, 내 생각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누구 한쪽도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마치 스승과 제자를 보는 듯하다. 어쩌면 황규혁을 이쪽 세상에 끌어들인 게 성일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얼마 안 있으면 63빌딩 올라가는 거 알지?”
“알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방송사부터 시작해서 대기업들이 줄지어 여의도에 건물을 올리고 있다. 이거, 여의도가 대한민국 비즈니스의 중심이 되는 건 시간문제야. 증권가들도 그곳에 모이고 있고.”
성일환은 목이 탔는지 다시 잔에 술을 채운 뒤 입에 머금었다.
“두고 봐라. 이 나라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여의도를 꼭 거쳐야 하는 날이 올 거야.”
생각보다 성일환의 판단력이 날카롭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앞날을 예상하지 못하고 숙청을 당한 것을 보면, 화진파에 그만큼 인재가 많다는 뜻인가?
“63빌딩이 쪽바리를 제치고 아시아 넘버원이 되는 순간인데, 나라님이 그 두 쥐새끼가 날뛰는 걸 가만히 보겠어? 다른 나라도 아니고 쪽바리를 제치는 일이야. 쪼다 같지만, 이건 가오가 달린 일이다.”
21세기에도 크게 달라지진 않지만, 80년도 사람들이 가진 반일 감정은 엄청나다.
월드컵 우승은 못 해도 일본만큼은 이기자.
금메달은 못 따도 일본만큼은 이기자.
뭘 잘해도 일본에 지면 공동의 역적이다.
이런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세월이 흘러도 반일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아-.”
황규혁도 꽤 머리가 돌아가는 양반이라서, 금방 이해를 한 듯하다.
“정부에서 가만히 두고 보진 않겠군요.”
“그렇지. 63빌딩을 올리고 나면 세계적으로 광고도 빵빵 터뜨리는데, 거기에 건달들이 득실거린다는 얘기가 나와 봐. 그럼, 그냥 나가리야.”
63빌딩은 대대적으로 세계에 홍보할 수 있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아직은 대한민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외국인이 참 많을 때다.
그러니 해외 투자에 손을 뻗친 정부에게는 대한민국을 최대한 널리 홍보해야 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도 기회가 없는 것 아닙니까?”
황규혁도 이제야 우리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의 말처럼 여의도에서 조직들이 날뛰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 없는 정부가 아니던가?
“그래서 이 녀석이 그 빡샌 일을 내게 맡기겠다고 요구하는 게 아니겠냐?”
성일환의 말이 맞다.
나는 지금의 화진파가 군 정부와 얼마나 연을 맺고 있는지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들은 줄타기를 매우 잘했다는 것이다.
화진파 대부 권용일은 정부와의 고리를 잘 연결해, 긴장감 넘치는 줄타기를 하며 건설사를 키웠다. 그리고 화학 부문에 진출해 무기를 제조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때부터 대규모 방산 비리에 연루 되었다.
그야말로 군부 세력의 돈줄이 된다는 것.
나중에야 군부 세력이 지금처럼 권력을 휘두르진 못하지만, 방산 비리로 뒷주머니를 채우는 건 지금이나 미래나 똑같다.
이제 내가 성일환을 맞춰 줄 때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야. 정부와 관련된 일은 내가 하는 게 맞긴 하지.”
풍기는 어조를 보면, 자신이 있다는 건가?
“그런데 문제는 재범파와 양양파를 어떻게 재끼냐는 거지. 지금 우리가 당장 여의도로 쳐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잘 알고 있다.
군 정부와 손을 잡은 80년대 조직이 하는 일이 뭐겠는가?
한창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는 대학생들을 하나씩 조지는 것이다.
학생들이 거리에 나오지 못하게 학교를 압박하고, 그 무리에 있는 선동자를 색출해 협박을 일삼는 행동.
정부가 묵인하는 일이니, 그들의 피해는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이들의 불꽃은 시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화진파도 분명히 이 일에 관련이 있을 테고, 대한민국 삼대 조직도 정부의 명령에 따라 착실히 움직이고 있다.
더군다나 화진파는 지금 영등포로 압박해 온 오성파의 견제도 힘에 부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겠다고 나선 게 아니겠는가?
화진파가 쉽게 여의도를 칠 수 있었다면 이놈들에게 정보를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들을 노리는 늑대들을 경계해야 하는 때고, 내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곧 있으면 천성 그룹이 재범파와 양양파를 갈가리 찢어 놓는다. 그런 다음 당연하게도 천성은 두 조직이 관리하던 구역을 점령한다.
그들이 여의도를 강탈하기 전에, 화진파가 그 구역을 먼저 점령하게 만드는 것이 내 계획이다. 그리고 여의도는 내가 힘을 키울 수 있는 발판이 될 예정이다.
화진파의 힘이 아닌, 내가 가진 힘으로 여의도를 손에 넣는다면 화진파 내에서 내 입지는 단단해질 것이다. 그리고 날 무시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제 연합 애들을 데리고 일을 벌일 생각입니다.”
성일환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내게 되물었다.
“…진심이냐?”
처음 내 연합원들을 얘기했을 때, 황규혁은 꽤 놀란 표정을 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성일환은 침착한 얼굴이다. 고등학생들로 뭘 할 수 있겠냐는 비웃음도 보이지 않았다.
“예. 제 연합원으로 충분합니다.”
“몇 명까지 동원할 수 있는데?”
“300명입니다.”
“뭐, 뭣?”
“3, 300명!”
성일환의 깜짝 놀란 면상을 드디어 보게 되었다. 황규혁은 호들갑까지 떨며 300명이란 숫자를 중얼거렸다.
물론, 진짜 300명을 모을 생각도 없고, 그렇게 모일 거란 확신도 없다. 그냥 흔한 블러핑을 던져 본 거지만, 이 둘에게는 제대로 먹힌 듯 보였다.
전대미문의 연합이고, 세력도 상당하니 그 정도 숫자가 불가능할 거라고 보지 않는 것 같았다.
“까리하네. 그 정도면 재범파와 양양파, 그 새끼들 똥줄이 타겠어. 흐흐.”
“300명을 전부 모이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죽자살자고 싸운 뒤 이빨 빠진 두 조직을 정리하는 일에 300명까지 필요 없습니다.”
황규혁의 눈빛이 한층 진지하게 바뀌었다.
“구라까는지 알았더니, 진심이었네.”
“예?”
“여의도를 점령하겠다는 말, 진심이었어.”
진심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제까지 병신처럼 왜 떠들고 있었겠는가?
“난, 네가 젊은 혈기를 앞세워 통밥도 없이 나대는 줄 알았단 말이지. 그래서 뺑이 좀 치게 하려 했더니….”
그랬던 것이군. 그래서 반응이 좀 시큰둥했던 건가?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지셨습니까?”
“네가 말했지? 이 두 놈이 좀 있으면 진탕 다리깐다고. 다 죽어 가는 놈들을 네 연합원으로 정리하고, 난 정부와 쇼부보고…. 통밥 좀 굴려 보니까, 이거 될 것 같네.”
“그럼,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황규혁은 입을 꼭 잠근 채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예. 말씀하십시오.”
“이렇게 쌔빠지게 하는 이유가 뭐냐?”
이번에는 내가 당황할 차례인가?
하지만 저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그냥 단순하게 ‘화진파를 강탈하러 왔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글쎄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 새끼, 그게 말이….”
“제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건 아닙니다. 그냥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게 제 천성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뭔가 포부를 밝히거나, 화진파에 인정을 받고 싶다는 등의 대답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냥 열심히 한다.
이게 어른들에게는 가장 잘 먹히는 대답이다.
어린놈이 조직에서 ‘중책을 맡을 만큼의 큰 사람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는 건 버릇없어 보일 뿐이고, 성일환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어 줄 수도 있다.
남자가 포부가 있어야지! 라는 말을 어른들이 많이 하지만, 진짜 저랬다가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기어오르려 한다며 미움을 받기에 십상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고, 물은 깊을수록 소리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겸손한 건지, 아니면 음흉한 건지….”
“둘 다 아닙니다. 아직 한참 배워야 할 때입니다.”
“됐다. 네가 이빨 잘 터는 건 나도 이제 아니까. 넌 어디 가서 미움받을 일은 없겠다.”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는 오래 하고 싶지 않다. 빨리 저 남자에게서 허락이 떨어져야 한다.
“도와주실 겁니까?”
“우리 나와바리를 더 넓히겠다는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정부와 기업들의 시선이 머무르고 있는 여의도다. 후다닥 해치울 만한 곳이 아니야.”
뭘 모르는군.
천성 그룹이 단 두 시간 만에 재범파와 양양파를 박살 낸 것으로 기억한다. 서로 싸우느라 이미 다 곤죽이 된 놈들을 정리하는 데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성일환에게 정면으로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단은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줘야겠다.
“알겠습니다. 형님께서 안 된다고 하시면 저도 생각을 접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주제넘게 행동했다면 죄송합니다.”
내가 의지를 꺾는 모습을 보이자 성일환도 만족스러운 얼굴빛을 띠었다.
물론, 이대로 내가 이 먹잇감을 놓아 준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착각일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화진파가 나를 돕도록 만들 참이다.
“아냐. 너도 이제 한 식구 아니냐? 그리고 이번 일은 내 독단으로 결정해서는 안 돼. 큰 형님과 상의를 해 봐야겠다.”
큰 형님!
성일환이 말하는 큰 형님이 누구겠는가? 바로 이 화진파의 대보스 권용일이다.
권용일과 이 문제를 상의해 보겠다는 건, 그의 귀에도 내 이름이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어휴. 오늘 이 놈이랑 얘기를 나눠 보니까, 앞으로 작업 칠 날이 많아질 것 같네.”
엄살을 피우면서도 성일환은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공손히 그의 손을 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지금은 내가 허리를 숙이지만, 언젠가 당신이 내게 허리를 숙일 날이 올 것이다.
이 말을 직접 해 주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성일환을 처음 만난 것 치고는 수완이 아주 괜찮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 * *
“여의도?”
“예, 형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뿌연 연기가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음에도, 이제 노년으로 접어드는 사내. 권용일은 깊게 빨고 있던 시가를 손에서 떼 놓지 않았다.
“뜬금없이 찾아와서 하는 얘기가 여의도야? 재벌 놈들 코딱지 묻은 곳을 내가 왜?”
“재범파와 양양파가 여의도에서 자리 잡고 있는 꼬락서니를 예전부터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까?”
“재미없기는.”
흥미를 잃은 건지, 권용일은 절반밖에 피지 않은 시가를 재떨이에 비볐다.
“난 또 술이나 한잔하자고 놀러 온 줄 알았더니. 고작 한다는 게 일 이야기냐?”
“죄송합니다. 요즘 바쁘게 움직이느라, 하하하.”
“쓸데없는 겉치레는 됐다. 아무튼, 무슨 바람이 들어서 여의도를 건드리자고 그러는 거야? 거기가 벌집인지, 그냥 꿀 들어 있는 통인지 구분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여의도에 있는 두 조직을 정부와 대기업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걸 권용일이 모를 리 없다.
성일환도 잘못 들쑤셨다가는 폭탄처럼 터질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습니다. 벌집도 꽤 큰 벌집이죠. 하지만 보호복 착용하고 가리개 모자 딱, 쓴 다음에 재빨리 쑤시는 겁니다. 몇 방 물리긴 하겠지만, 수확은 꽤 되지 않겠습니까?”
권용일은 소파에 몸을 푹 묻은 채 성일환을 빤히 쳐다보았다.
“일환아.”
“예, 형님.”
“누가 바람 넣은 거야?”
“예?”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흠칫거리는 성일환을 보고 권용일은 조소를 터트렸다.
“넌 항상 안전한 길만 추구하는 놈이잖아. 난 모험을 즐기는 부류고. 그런데 네가 도박에 가까운 일을 하자고 나를 꼬시니까 물어보는 거야.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우리 성일환의 허파에 바람을 넣은 거야?”
사람을 꿰뚫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힌 사람이다.
괜히 딴소리를 했다가는 본전도 못 건진다는 것을 알기에, 성일환은 사실대로 실토했다. 이 모든 게 태산의 생각이었음을.
“김태산? 그것도 고등학생 2학년? 그리고 그 연합이란 건 또 뭐야?”
“기특한 놈 아닙니까? 식구가 되자마자 쌔빠지게 뛰는 모습이 말입니다.”
“그러게. 네 말대로 보통 놈은 아닌 것 같네. 고작 고등학교 2학년이 그런 통밥도 굴리고.”
“예. 그놈한테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저도 사실 몇 번이나 깜짝 놀랐습니다. 깡다구도 있고, 머리도 제법 씁니다. 거기다가 말도 번지르르하게 잘하는 놈입니다.”
“그래?”
성일환이 신이 난 듯 태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자, 권용일은 콧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쳐댔다.
“재밌는 놈이 왔네, 그려.”
“예. 한번 만나보시면 지루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 그 정도란 말이지?”
아직 새파랗게 어린놈이지만, 성일환이 저 정도로 칭찬을 하는 걸 보면 보통 놈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가 생기니, 저절로 갈증이 일었다.
권용일은 절반이나 남겨 두고 비빈 시가가 아깝다며 탄신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