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12화 (12/325)
  • 12화. 악연과의 만남 (3)

    세기의 대결이라 불렸던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대결에서 오고 간 판돈이 수천억을 훌쩍 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무지막지한 판돈을 뒷배로 삼은 복싱 경기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어떤 경기는 도박꾼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흘러, 소수의 사람이 모든 판돈을 휩쓸어 간 경우도 다반사다.

    난 그때마다 장난스럽게 탄식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저곳에 돈을 걸었다면 순식간에 많은 돈을 벌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그런 탄식이, 단순히 스쳐 가는 바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진짜 도박은 그렇다고 하고. 다른 도박은 또 뭐야?”

    “뭐긴. 본격적으로 마피아들이 할 만한 일을 해야지.”

    “마피아들?”

    “단순히 화진파를 점령했다고 해서, 대한민국 전체를 잡을 수 있는 건 아니야. 내부의 힘보다 외부의 힘이 더 대단해. 천성 그룹도 외부적인 힘에는 저항하지 못하잖아.”

    외부의 힘이란 곧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압박하는 힘을 뜻한다.

    “그러니까 네 말은, 다른 나라의 마피아들까지 손을 보겠다?”

    “그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 아니냐? 한국에서 제왕이 되는 게 아니라, 전 세계의 황제가 되는 일이니까.”

    내가 말해 놓고도 참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그림이다. 연욱이도 그 많은 세력을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곧 있으면 우리나라는 조직폭력배들이 대부분 분해돼서 힘을 잃지만, 외국 마피아들은 정권을 움직일 만큼 거대해진다. 그놈들까지 갖겠다는 건 욕심이야.”

    미국, 러시아, 중국, 멕시코 그리고 각 유럽에 속한 나라 중 마피아가 정권에 깊숙이 관여하는 곳이 생각보다 상당히 많다.

    이 마피아들이 가진 힘을 내가 빼앗을 수만 있다면 전 세계를 주무를 영향력이 생기게 된다.

    “이건 나중에, 차차 말하도록 하자.”

    “그래. 너무 거대해서 말하는 것도 벅차다.”

    일단 이 이야기는 여기서 접었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것부터 해치워야 할 때다.

    “그런데 해외 도박은 어떻게 할 거냐? 지금 시대가 80년도인 건 알지? 미국에 전화 거는 것도 힘든 시절이야.”

    일제강점기 시절에 통치 목적으로 설치된 국제 통화망은 이용도가 높지 않아, 활성화가 잘 되어 있지 않았다.

    1983년에 국제 자동 전화(ISD)가 들어서면서, 한국도 국제 전화에 슬슬 발동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한참 멀었다. 버튼 하나 눌러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자유롭게 통화하기까지는 말이다.

    “생각해 둔 게 있어.”

    “그려.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이제 그만 일어날게. 공부 열심히 하고.”

    “가게? 좀만 더 있다 가지?”

    “시간이 별로 없어. 화진파에 가서 여의도 일도 상의해야 하고.”

    “하긴. 나도 애들한테 연락 넣어 보지 뭐.”

    “고맙다.”

    “나중에 몇천 배로 갚게 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흐흐.”

    “꼭 그래라.”

    지금이야 먼지 묻은 돈을 함부로 연욱에게 쥐여 줄 순 없지만, 돈세탁이 가능할 정도의 힘이 생기면 정말 몇천, 몇만 배로 저 녀석에게 갚아 줄 생각이다.

    그러려면 하루라도 더 빨리 힘을 키워야 한다.

    * * *

    “여의도?”

    갑자기 찾아와서 하는 얘기가 여의도이니, 황규혁은 당혹감이 앞선 듯 보였다.

    “예. 여의도에 있는 재범파와 양양파를 밀어 버린다면, 그 구역을 화진파가 손에 넣을 수 있게 됩니다.”

    “그걸 누가 몰라? 그 둘이 버티고 있는 걸 무슨 수로 밀어내?”

    영남파처럼 재범파와 양양파가 소규모 조직이 아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 둘이 손을 잡는다면 능히 삼대 조직 중 하나에 대항할 힘을 가지게 된다.

    지금의 화진파로서는 그 둘을 감당할 힘이 없다. 황규혁은 그걸 지적하는 것이었다.

    “방법이 있다면 힘을 빌려주실 겁니까?”

    “방법이 있어?”

    “예.”

    “어떤 방법?”

    “어부지리입니다.”

    “어부지리?”

    황규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두 새끼가 진탕 나게 싸우고 나면, 그때 둘 다 잡자?”

    다행히 말을 쉽게 알아듣는 사람이다.

    “예, 맞습니다.”

    “근데 그 둘이 언제 싸우는지를 모르잖아.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계속 애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대기만 탈 순 없는 노릇이고.”

    “영등포에 있는 조직원들을 데리고 갈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일이 끝나면 형님께서 정리만 해 주십시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정리라니?”

    황규혁의 얼빠진 표정을 보는 것에 점점 재미가 붙는다. 하지만 이렇게 넋만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사람이 날 도와줘야 여의도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군부 세력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도움을 달란 뜻입니다.”

    “뭐?”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가? 답답하긴 했지만,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지금 여의도 상황이 어떤지는 황규혁의 관심 사항이 아닐 것이다.

    영남파를 제거한 이후로 오성파에서 점점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고 들었다. 당연히 그곳에 신경이 집중되어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설명해 줘야겠다.

    “간단히 설명을 해 드리자면….”

    “형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때 조직원 하나가 노크를 하는 바람에 흐름이 깨져버렸다.

    “들어와.”

    황규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조직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언뜻 봐도 황규혁보다 나이가 많은 듯 보였지만, 그의 앞에서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성일환 형님께서 오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성일환? 꽤 익숙한 이름이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그래? 잘됐네. 그렇지 않아도 이놈을 언제 인사시켜드려야 하나 고민했는데.”

    황규혁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자. 이 이야기를 나랑 나누는 것보단 형님과 나누는 게 훨씬 더 좋을 것 같다. 들어보니까 정권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으니까.”

    황규혁보다 높은 사람이 오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풀어진 저 표정을 보니 황규혁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일 것이다.

    차츰 성일환에 대한 기억이 살아났다.

    황규혁의 빠른 승진을 경계하지 않는 위치의 인물, 성일환.

    화진파 대보스 권용일의 오른팔이자 그의 친위대장!

    화진파 고급간부 중 하나로, 훗날 화진 그룹에서도 계열사 사장직을 맡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권용일이 화진 그룹을 다스릴 때는, 성일환의 힘도 막강했다. 하지만 권용일이 죽고 난 뒤에는 가마솥에 삶아지는 사냥개 꼴이 된다.

    토사구팽을 당하는 전형적인 비운의 인물이다.

    * * *

    “네가 황규혁이를 구워삶은 놈이구나.”

    성일환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오랜 동네 아저씨 같은 구수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랄까?

    황규혁도 그렇고, 성일환도 그렇고.

    이 둘은 아무래도 조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같았다. 하지만 이런 겉모습만으로는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겉으로는 선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연쇄 살인마들도 겉모습만 보면 멀쩡하게 생겼다. 이웃 주민들도 사람이 참했다고, 절대 살인을 저지를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종종 말을 하지 않던가?

    이놈이나 저놈이나 결국 사회를 악으로 물들게 만드는 쓰레기들이다. 하지만 그토록 혐오하던 이 세계에 내가 발을 담갔으니, 참 알다가도 모를 세상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형님. 김태산이라고 합니다.”

    “그래. 듣던 대로 싹퉁머리는 있구만.”

    성일환은 내 등을 몇 번 토닥이며 황규혁의 인도에 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 앉아 내게 잔을 하나 건넸다.

    “술은?”

    나도 모르게 손이 가려고 하다 멈칫했다.

    “괜찮습니다.”

    술 때문에 죽은 목숨이다. 더는 음주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젠장. 금주를 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병에 담긴 술이 여전히 탐스럽게만 보였다.

    “이번에 고생이 참 많았다고 들었다. 아직 고등학생밖에 되지 않은 놈이 벌써 조폭 생활하려니 빡새지?”

    “아닙니다. 천천히 배워 나갈 생각입니다.”

    성일환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애가 아니고 애늙은이였네. 한창 피가 끓어오를 나이이긴 한데, 그걸 잘 조절할 줄 아는 것 같아. 네가 돌아서 갑자기 이 조직, 저 조직을 다 찌르고 다니면 큰일이거든. 황규혁이가 그거 뒤처리하려면 말이야, 하하.”

    성일환의 농담에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황규혁이 난처한 얼굴빛을 띠자, 그는 내가 또 무슨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 보였다.

    “뭐야? 왜 이렇게 분위기가 썰렁해?”

    “형님…. 아니지. 태산, 네가 직접 설명해 드려라.”

    방금 전까지 푸근해 보였던 성일환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날 탐색하듯 살피며 물었다.

    “그래. 우리 유능한 막내가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실까?”

    말투도 바뀐 것으로 보아하니, 막내에 불과한 내가 또 버릇없이 앞으로 나서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난 여의도에 있는 재범파와 양양파를 몰아내고 화진파가 그곳을 점령하자는 제안을 건넸다.

    “흠-.”

    성일환의 첫 반응은 침묵이었다. 화를 내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생각을 해 볼 마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 게 분명하다.

    “여의도에 있는 재범파와 양양파에 대한 건 어디서 들은 거냐?”

    “워낙 연합이 크다 보니 들어오는 정보량도 상당합니다.”

    “하하. 그러고 보니 잠깐 잊고 있었네. 우리 막내가 잘 나가는 연합 통이란 걸 말이야.”

    비웃는 건지, 아니면 칭찬을 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적의를 갖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내가 말이야. 여기 황규혁이와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좀 했었어. 영남파 일을 잘 끝내면 전적으로 지원을 하라고 . 그런데 이렇게 빨리 작업 칠 줄은 몰랐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영영 화진파가 여의도로 진출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많은 조직이 여의도를 눈여겨보고 있다. 그만큼 탐스럽기 그지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 정부와 대기업이 칼을 갈고 나오면 아무리 조직들이 날뛴다고 한들, 저 두 세력에게는 날아다니는 파리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왜 여의도를 갖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여의도에 발을 들일 수 있어.”

    물론, 먼 훗날 화진파가 그룹으로 탈바꿈해서 건물 몇 개를 여의도에 놓게 된다. 하지만 성일환은 그저 건물을 올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 조직을 정복하는 것처럼, 정복자답게 여의도라는 노른자를 손아귀에 넣고 싶어 한다.

    “맞습니다. 언제든지 가능하시겠죠. 하지만 최소한의 피해로 여의도를 얻는 게 더 이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재범파와 양양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 둘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니?”

    “두 조직을 제거하는 건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곱게 보고 있을 리 없는 현 정부가 문제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처리를 해 주십시오.”

    재범파와 양양파가 천성 그룹 손에 작살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 정부였다.

    아마 천성 그룹이 돈다발을 안겨 줬을 거다. 또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던 두 조직을 천성 그룹이 정리해 준다고 하니, 정부로서는 쌍수 들고 환영했을 가능성이 크다.

    “내게 단도리를 해 달라?”

    “화진파에서도 군 정부와 줄이 닿는 데가 몇몇 있지 않습니까?”

    직설적인 내 물음에 성일환은 안색을 굳혔다.

    군부에 연줄이 있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굳이 새삼스럽게?

    좀 잘 나간다는 조직 중에서 군부와 연을 맺지 않는 놈들이 멍청한 게 아니겠는가? 지금은 이름 그대로 무인 시대이니 말이다.

    내가 이런 것도 모르는 병신이라고 생각했다면, 성일환은 나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해야 할 것이다.

    “조직이 커지기 위해서는 정부와 연줄을 만들어 놓는 게 당연한 순서 아닙니까?”

    “뭐…. 그렇긴 하지.”

    성일환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의 눈빛에 여전히 담겨 있는 의아함을 풀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사람들도 대충 눈치는 채고 있습니다. 군부에 줄이 닿지 않는다면 조직이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것을요.”

    “너, 고등학생이 맞긴 하냐? 어린놈이 별 걸 다 알고 있는구만. 근데 군바리 이야기는 왜 나온 거지?”

    설마 이 인간도 황규혁처럼 여의도 상황을 모르는 건가? 이렇게 되면 삑사리인데. 조금 더 설명해 줘 볼까?

    “군부가 여의도를 곱게 보지 않고 있습니다. 각 대기업도 차례로 여의도에 발을 넣고 있지요. 그놈들이 재범파와 양양파를 곱게 볼 리 있을까요?”

    성일환이 여의도에 엉킨 실타래를 보지 못했다면 이 문제를 이 사람과 나눠서는 안 된다. 이 사람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에게 제안해야 한다는 건데.

    벌써 골이 아파진다. 이 사람보다 높은 사람을 찾자면 화진파의 대부 권용일이지 않은가?

    “하…, 그냥 날범이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짱구를 잘 굴리네.”

    “정부와 대기업들이 두 조직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우리 유능한 막내, 설마 내가 노땅 깡패 새끼라고 무시하는 건 아니지?”

    다행이다.

    농담 어조로 말하는 것을 보니, 이 남자는 여의도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역시, 이 문제에 관해서는 황규혁보다 성일환이 훨씬 나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