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악연과의 만남 (2)
1979년 12월 12일에 일어난 군사 반란으로 인해 현 대통령이 모든 실권을 잡았다. 신군부가 대한민국을 통치하기 시작한 두 번째 무인시대, 제5공화국이었다.
또 한 번의 군사 독재에, 서울의 봄으로 시작된 민주화 운동이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비상경계령을 내렸고, 그렇게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참극이 벌어졌다.
1980년 5월 18일.
국가를 수호해야 할 국군의 총알이,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학생들과 시민들의 심장을 향해 쏘아진 사건이었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야.”
TV에서 중계하는 대학생들의 투쟁을 보며 연욱이 짧게 혀를 찼다.
아직 사회에 발을 담그지 않은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연이은 시위를 펼쳤다.
최루탄이 사방에서 터지고 공권력이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이들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것을 반복하며 군권 정부에 대항했다.
언제 봐도 이 나라의 민족성은 참 대단하다. 뭉칠 땐 화끈하게 뭉쳐서 세계를 들썩이게 만들고, 나라를 변화시킨다.
지금은 폭력에 얼룩져 공권력의 몽둥이에 맞아가며 그들도 나름 대항을 했지만, 2016년에는 촛불이라는 상징적인 칼을 뽑아 든다.
폭력이 아닌 비폭력으로 국민들의 뜻을 관철한다는 촛불의 의미, 대한민국이 얼마나 성장해 나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였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가 저렇게 몸소 싸워 정부에 대항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진작 사라졌을 것이다.
연욱이는 TV를 끄고 내게 몸을 돌렸다.
“일이 잘 끝나서 다행이다. 덕분에 화진파에서도 널 의심하지 않을 테고.”
“내가 운이 좋았지. 영남파가 그때까지 화랑 나이트를 안 칠 줄은 몰랐으니까.”
“그래도 조심해. 세상에서 제일 믿을 게 못 되는 게 바로 그 깡패 새끼들이야.”
“걱정하지 마.”
나와 연욱이가 과거에 온 지도 1년이 넘었다.
1984년 3월에 눈을 떴고, 지금은 1985년 5월.
영남파를 제거한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난 더 전진을 해야 했다.
앞으로 많은 폭풍이 이 나라를 휩쓸 것이다. 그때 무너진 세력들의 전리품을 취하는 것이 바로 내가 할 일이다.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한 걸음씩 나아간다면 우리 둘이 꿈꾸던 이상을 펼칠 날이 분명 올 것이다.
난 이미 다음 계획을 세워 놓았고, 이제 실행에 옮길 차례였다.
“여의도에 재범파와 양양파가 있는 건 알지?”
“그 두 놈이 여의도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건 나도 잘 알지. 그러다가 군부 세력한테 찢기잖아. 아니지, 군부가 아니고 천성 그룹이 그때 그놈들을 뜯어 가지 아마?”
여의도에서 세력을 넓히던 재범파와 양양파는 서로를 밀어내기 위해 하루가 멀다고 전쟁을 벌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들이 관리하는 구역의 주인이 바뀔 정도이니, 그 덕분에 여의도는 매번 시끄러운 일만 생겼다.
비록 지금 나라가 혼란스러워 군부가 시위를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다고는 하지만, 현 군부세력이 여의도에 득실거리는 폭력배들을 가만히 지켜만 보진 않을 터.
3일 뒤에 63빌딩 완공식이 있다.
역대 아시아 최고층으로 자리매김했던 일본 선샤인 60을 밀어내고 새로운 최고층의 타이틀을 63빌딩이 거머쥐게 되었다.
이건 상징적으로도 63빌딩의 완공식은 매우 중요한 행사다. 한국이 일본을 이기는 역사적인 날이 아닌가?
현재 재범파와 양양파는 여의도에 있는 상가들을 쥐고 있는 상태다. 그곳에는 사채업을 하는 사무실도 있고, 일반 음식점부터 시작해 철물점도 있다.
다방부터 주점까지 세워 자릿세를 받으며 세력을 넓히는 건데, 문제는 이놈들이 눈치가 없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삼대 조직인 청룡파, 오성파, 그리고 대룡파까지 여의도에서는 완전히 손을 뗐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미 정부에서 여의도를 발전의 핵으로 지정하고 지하철 개통부터 시작해 방송사까지 그곳에 앉혔다. 또한, 각 금융업계와 대기업들이 차례로 여의도에 들어와 열심히 건물을 올리는 중이다.
그뿐인가?
86년에는 서울 아시안 게임이 잡혀 있고, 88년도에는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행사가 유치된다.
이런 와중에 조직 폭력배들이 유흥업소를 이용해 상권을 넓히려고 하니, 정부가 나서지 않는다면 대기업들이 움직여 그들을 몰아내려 할 것이다.
여의도를 비즈니스의 메카로 만들려는 정부와 대기업의 계획을 이들이 말아 먹게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 두 놈을 한꺼번에 정리할 생각이야.”
“무슨 소리야?”
연욱이는 건성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던 법학책을 내려놓았다.
“재범파와 양양파를 동시에 잡는 거지. 화진파와 내 연합원을 모아서 말이야.”
“아서라. 너무 막 나가는 것 같다.”
“괜찮아. 재범파와 양양파가 곧 있으면 또 전쟁을 벌일 거야. 두 세력이 파탄 지경까지 가는 전쟁인 건 너도 알지?”
1985년 5월 31일.
재범파와 양양파는 정말 끝장을 보기 위해 30일 날 대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승리는 재범파가 가져간다. 문제는 다음 날 천성 그룹이 여러 조직에 돈을 뿌려, 두 조직이 여의도에 다시는 발도 붙이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 일로 재범파와 양양파가 가지고 있던 구역들은 모두 천성 그룹이 강탈하게 되는데, 이때 지휘를 맡게 되는 사람이 바로 천성 그룹 첫째 아들 이강혁이다.
천성 그룹 창업주 이철호 회장의 슬하에는 세 명의 아들들과 세 명의 딸들이 있다.
애초에 딸들은 경영권에 제외된 상태였고, 첫째 아들 이강혁, 둘째 아들 이강우, 그리고 셋째 아들 이강찬이 차기 회장 후보에 올라왔다.
물론, 승자는 셋째 이강찬이 되지만.
“나도 재범파와 양양파가 싸우는 건 알고 있어. 천성 그룹 조사할 때 알게 된 내용이니까. 그런데 천성 그룹이 나선 이상 네가 낄 자리는 없는 게 아닐까?”
천성 그룹이 두 조직을 쓸어버린 다음 얻게 된 여러 채의 건물들과 땅들은 훗날 조사 후보에 오른다. 하지만 천성이란 이름을 보자마자 고검장들이 보고서를 덮어버렸다.
지금이야 아직 천성 그룹의 힘이 정권과 더불어 검찰청에도 크게 닿지 않는다고 하지만, 세월이 조금 흐르면 천성 그룹의 장학생들이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을 정복하기에 이른다.
이래서 대한민국의 실권자는 천성 그룹 회장 이강찬이라는 말이 은연중에 나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들이 발톱을 키우는 단계다. 그들 마음대로 검찰청을 주무를 수 있는 때가 아니라는 것.
내가 이때를 노려 화진파를 등에 업고 양양파와 재범파를 동시에 잡게 된다면, 조직에서의 내 입지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더군다나 두 조직이 여의도에 심어 놓은 돈이 상당하지 않겠는가? 그 돈들을 내 곳간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다.
“재범파와 양양파를 화진파가 점령하게 되면 천성 그룹에서도 섣불리 움직이진 못할 거야. 그리고 군 정부에 돈을 찔러 넣어서라도 여의도를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면 돼.”
“말이야 쉽지. 천성이 거길 쉽게 포기하진 않을 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까 부탁 좀 하자. 우리 연합에서 애들 좀 불러 모아 줘. 다 죽어가는 놈들 때려잡는 거니까, 애들이 험한 꼴을 당할 일은 없을 거야.”
“쳇. 재미는 네가 다 보겠다 이거지?”
“넌 검사가 될 사람인데, 벌써 이런 일에 나서면 안 되잖아.”
다행히 연욱이도 더는 반대를 하진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꽤 괜찮은 방법이라 여겼을 것이다.
다 죽어가는 놈들을 치는 일인데, 오합지졸에 불과한 고등학생들이라도 그놈들에겐 무시무시한 하이에나 떼처럼 보일 것이다.
늙을 대로 늙어 힘없이 절뚝이는 사자를 잡아먹는 하이에나 떼가 바로 나와 연합원들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너, 계속 그렇게 남의 주머니를 털면서 돈을 벌 참이냐?”
“무슨 소리야?”
“이번 영남파에서 빼 온 돈도 그렇고, 재범파와 양양파에 뿌려진 돈들도 네가 뺏을 생각 아니었어?”
역시, 이놈은 나를 알아도 너무 잘 안다. 하지만 내가 단지 그런 걸로만 돈을 벌 생각이라면, 우리가 세워 둔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진다.
수억 원으로 이뤄질 수 있는 계획이 아니다. 적어도 몇조 원은 주춧돌로 삼아야 가능성이 보인다.
“그놈들한테서 턴 돈은 다 시드머니지. 본 게임은 다른 거로 해야 하지 않겠어?”
나와 연욱이는 어떤 주식이 곧 오르고, 또 어떤 주식이 주가 조작에 개입되어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저번 생에서는 검은돈을 받지 않고 겁도 없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대기업을 건드렸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귀양 생활을 전전해야 했다. 금융업부터 시작해 다양한 분야에서 검사 질을 해왔다.
그땐 참 고달픈 생활이었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역시, 인생사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참으로 옳다.
“곧 있으면 현 대통령이 물러나고, 차기 보수 정권에서 대통령이 당선이 되잖아. 그때 개발되는 땅도 있고, 테마주처럼 급등하는 주식들도 많으니까.”
“땅? 분당 말하는 거냐?”
“그래.”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분당이 개발 도시로 뽑혀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는다. 하지만 거긴 내가 건드릴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쪽은 건드리고 싶지 않다. 보수 정당 애들 중에서 공적 세운 놈들끼리 나눠 갖는 땅인데, 우리가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보복을 당할 수도 있어.”
아직 땅 투기를 할 때가 아니다.
주식도 마찬가지다.
주가 조작이야 워낙 정치권 인물들이 개입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적절한 시기를 찾지 않는 한 발을 담그지 않는 게 좋다.
“그럼, 그 잘난 시드 머니로 어떻게 돈을 벌려고?”
“넌 어떻게 할 것 같은데?”
“나? 글쎄. 나라면 외국에 자회사라도 하나 차려서 역 투자를 할 것 같기도 한데.”
역투자라-.
이놈이 꽤 머리를 굴리긴 했다.
“예로 들자면?”
“사실 외국 기업은 나도 빠삭하게 알지 못해. 그냥 우리가 흔히 아는 대기업들에 미리 투자를 하는 거지. 마이크로소프트도 있고, 애플도 있고. 뭐, 파고들면 꽤 많잖아?”
물론, 훗날 전 세계로 발을 뻗치는 외국 대기업에 투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단기간에 큰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직 상장을 하지 않은 기업을 찾는 게 좋다.
그렇다고 그들을 찾아가서 돈을 투자하기에는 내 시드 머니가 많이 부족하다.
지금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방법은 이미 생각해 두었다.
음흉한 입꼬리가 내 얼굴에서 춤을 추자, 그것을 발견한 연욱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너, 이미 다른 방법을 생각해 둔 거지?”
“맞아. 주식 투자도 좋은 방법이긴 한데, 나는 이제 너처럼 청렴한 사람이 아니잖아.”
잠시 밝아졌던 연욱의 안색이 금방 어두워졌다.
“정상적인, 그러니까 합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겠다는 뜻이 아니었네.”
“맞아. 넌 합법적으로 돈을 벌어야 하지만, 난 이제 그럴 필요 없어. 화진파와 손을 잡고 영남파를 제거하면서, 나는 이미 악의 길로 들어선 거야. 예전에 청렴했던 검사 김태산이 아니고.”
“태산아. 지금이라도 우리….”
“그만.”
난 손을 들어 연욱의 입을 막았다. 여전히 저 녀석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에 확신이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이미 우린 50년 동안 청렴한 길을 걸어왔어. 그리고 그 결과가 어땠는지 알지? 세상 사람들은 진실과 정의가 가장 위대하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린 경험했잖아. 승자가 모든 걸 갖는 거야. 우리 몸에 먼지와 피를 묻히지 않는 이상 승자가 될 순 없어.”
“….”
“걱정하지 마. 모든 먼지와 오물은 내가 다 뒤집어쓴다. 넌 예전처럼 청렴한 검사가 되도록 해. 네 뒤는 내가 봐 줄 거니까.”
연욱이는 한동안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자신은 후방에 남고 친구인 나를 치열한 전방에 보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운 탓일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 두 사람은 평생 청렴함을 강조하며 살아온 대한민국에 보기 드문 검사였다.
이렇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불법을 저지르는 건 아무래도 연욱이에겐 큰 짐처럼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침묵이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이미 칼은 뽑았고 무라도 베어야 직성이 풀리는 게 칼잡이들의 특징이다.
“좋아. 그래서 네가 생각해 둔 방법이 뭔데?”
“도박.”
“응?”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연욱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재차 되물었다.
“도박이라니?”
“1997년에 뭐가 오는지 너도 알잖아.”
6.25 전쟁 이후로 대한민국을 강타하는 초대형 태풍.
아시아 전역을 휩쓸어 버리는 그 사건을 어찌 연욱이 잊을 수 있을까?
“국내에서 돈을 버는 게 아니고 외국에서 벌겠다?”
“그래. 어차피 곧 있으면 다 휴지 조각될 돈들로 뭘 하겠어. 지금부터라도 달러를 모아 둬야지.”
연욱이는 앉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길게 침음을 흘렸다.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자기 생각보다 훨씬 더 크다는 걸 알아차린 것일까?
“네가 말한 도박이 도대체 뭐야? 진짜 도박을 말하는 거야, 아니면 비유적으로 말한 거야?”
“둘 다. 진짜 도박도 할 거고, 도박 같은 일도 벌일 생각이다.”
“진짜 도박?”
“내가 휴가 때 라스베가스에 몇 번 다녀온 거 기억하지?”
“잘 알지.”
“그럼, 그때 내가 왜 갔는지도 알겠네.”
“그거야 네가 워낙 권투를 좋아해서 경기 관람하려고… 아, 설마?”
연욱이는 그제야 내 말뜻을 헤아렸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이제 보니 그 방법이 있었네.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했냐?”
난 다시 음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내가 권투 경기 볼 때마다 그랬잖아. 내가 미국 사람이었으면 진작 도박왕이 됐을 거라고.”
하루에도 수백억이 왔다 갔다 하는 스포츠 도박판.
미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스포츠가 바로 복싱이다. 단지 경기가 재밌기 때문이 아니라, 메인 이벤트에 걸린 판돈이 어마어마한 까닭이다.
그리고 난 광적으로 복싱을 사랑하던 사람으로서 앞으로 펼쳐질 명경기들과 그 경기들의 결과를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전생에서 농담 삼아 말했던 도박왕이라는 허황한 꿈을,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