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예쁨 받을 짓 (6)
적들이 어디에 매복하고 있는지만 알고 있으면 상대하기가 매우 쉬워진다. 왜냐하면, 상대는 자신들이 공격을 당할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황규혁은 매복해 있던 영남파 조직원들을 모두 정리하고, 사무실에 기절해 있던 영남파 보스 고영남까지 사로잡았다.
물론, 고영남의 운명이 그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대충 예상은 간다. 어디 바다에 던져 놓았거나 아니면 어느 산자락에 잘 묻어 두었을 것이다.
후환이 될 만한 놈을 살려 둘 순 없지 않은가?
“좀 아깝긴 하지만….”
고영남에게 빼앗은 돈에서 일부를 떼어 가방에 넣었다.
황규혁이 내 돈은 뺏을 생각이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소소하게 액수를 좀 채워 주면, 서로 갈등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난 가방을 챙기고 영등포로 향했다.
내 덕분에 황규혁이 목숨을 빌어먹은 거나 다름이 없지만, 앞으로 그 남자에게 받을 도움이 참 많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미리 돈을 먹여 놓아야 한다.
날 도와주면 줄수록 주머니가 두둑해진다는 걸 가르쳐 줘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나이트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다가왔다.
“황규혁 형님을 뵈러 왔습니다.”
“아, 잠깐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난 직원의 말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사방에서 불편한 눈초리가 느껴진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슬렁거리던 조직원들이 나를 힐끔 쳐다보며 쑥덕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아무런 해코지가 없기에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기어코 한 놈이 불을 지폈다.
“고생이란 고생은 우리가 다 했잖아. 저 새끼는 뭔데 우리 위에서 떵떵거리고 있어?”
“저놈도 우리 식구라면서? 그런데 왜 우리한테는 인사도 안 하고 형님만 계속 따로 만나는 거야?”
저놈들 눈에는 내가 버릇없는 하룻강아지로 보였던 걸까?
하긴. 내가 저놈들에게 인사를 한 적이 없긴 하다. 그렇다고 인사를 하자니, 내 서열조차 정확히 파악이 안 된다.
일단은 막내니까, 인사를 해야 하나 싶다가도 저런 쓰레기들에게 인사를 하자니. 자괴감이….
그래. 그냥 무시하자. 저러다가 말겠지.
나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말한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저놈들한테 고개 숙일 생각은 없다.
“야. 이름이 뭐라고 했지?”
그냥 저기서 말만 했으면 나도 조용히 있었을 텐데, 결국 한 놈이 다가와 내 어깨를 건드렸다.
“김태산.”
“김태산? 몇 살인데?”
“열여덟 살.”
“열여덟? 아직 거기에 털도 다 안 자라겠네? 그런 새끼가 어째 말이 짧다?”
대놓고 시비를 걸고 있군. 그냥 좋게 말해서 끝내자. 이런 놈들이랑 실랑이 벌일 시간이 어디에 있다고.
“그쪽이 먼저 짧게 했으니까, 나도 짧게 대답이 나가지.”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 말이 툭 튀어나가고 말았다. 그 순간, 내 앞에 있던 놈이나 주변 놈들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처음에는 날 놀려 먹으려고 했던 거 같은데, 지금은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것처럼 분위기가 살벌했다.
“지금 뭐라고 했냐? 먼저 짧게 했으니까, 나도 짧게 대답을 해?”
“형님이 막내라고 오냐오냐해 주니까, 간덩이가 쳐 부었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이젠 세 놈이 날 둘러싸고 있었다. 하여튼, 이놈의 입이 방정이다.
회귀 전에는 깡패 새끼들을 인간 취급도 안 해주고, 쉴 틈 없이 갈구기만 했다. 그런데 이런 놈들이 감히 내 앞에서 껄렁대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성질대로 나갔다.
어떡하지?
여기서라도 좋게 말하면 잘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일어나봐, 이 새끼야. 너 같은 새끼는….”
뻐억-!
하지만 이번에도 내 불같은 성질을 이기지 못했다. 하필이면 한 놈이 내 머리채를 붙잡는 바람에 주먹이 나가고야 만 것이다.
결국, 겁도 없이 내 머리채를 잡았던 놈은 턱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히트 포인트를 제대로 가격했으니, 당분간 일어서진 못할 거다.
“이런 좀만 한 새끼가!”
그 옆에 있던 흥분한 조직원 두 명이 동시에 내게 달려들었다.
젠장. 이래서 좋게좋게 말하려고 했던 건데, 이렇게 되면 정말 끝을 봐야 하지 않은가?
회귀 전에도, 검사질 하면서 살갗이 다 벗겨질 정도로 깡패들과 싸웠다. 그리고 회귀한 후에도 쟁쟁한 실력자들과 싸워온 사람이 바로 나다.
내 동생 태혁이처럼 엄청난 괴물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놈들 눈에는 괴물처럼 보일 자신이 있다.
“이 개새… 컥!”
콰직-!
아무리 화진파 조직원들이라고 해도, 세 놈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 아닌가?
세 놈이 쓰러지자, 지켜보고 있던 다른 조직원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저놈들은 각자 품 안에 손을 넣더니, 칼과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래. 주먹으로 할 생각은 없다는 거지?
이곳은 고등학생이 치고받고 싸우는 곳이 아니다.
칼부림이 난무하는 조폭의 세계가 아닌가?
정정당당함이란 단어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상대가 열여덟 밖에 안 되는 핏덩이라고 해도.
그냥 간단하게 가방이나 주려고 왔던 건데, 설마 일이 이렇게 번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애초에 내가 밉보일 행동을 한 게 잘못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하게 될 줄이야.
내게 있는 무기라고 해 봤자 이 돈 가방밖에 없다.
“그만 조용히 끝냅시다. 여기서 칼부림해 봤자 피차 손해일 텐데?”
이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말을 꺼내봤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디 끝까지 가 보자는 건가?
“그래. 들어와라. 끝장을 보자, 개새끼들아.”
막상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자, 겁이 나기보다는 피가 끓는다. 역시, 나도 태혁이처럼 천생 싸움꾼이다.
이놈들 머릿수가 열 명.
한 명이 먼저 달려들면, 그놈 목을 먼저 부러뜨리고 칼을 빼앗는다. 나 혼자만 연장 없이 싸우는 건 불리하지 않은가?
여기서 죽을 순 없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쉽게 죽을 목숨도 아니다. 그럴 목숨이었다면 이렇게 죽었다 살아나지도 않았을 거다.
그래. 한 놈. 딱 한 놈만 먼저 와라. 그럼, 여기 있는 놈들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다.
내 몸에도 구멍 몇 개쯤 나기야 하겠지만, 난 절대 죽지 않는다.
절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 뜻대로 한 놈이 먼저 달려드는 찰나에, 황규혁이 고성을 지르며 나타났다.
타이밍이 참으로 절묘했다.
그는 빠르게 눈을 굴려 상황을 판단하는 듯 보였다.
“뭐야? 같은 식구들끼리 누가 칼 꺼내고 이 지랄을 떨라고 했어?”
아무도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황규혁은 내 앞에 쓰러져 있는 세 놈을 발로 툭툭 차더니, 기가 찬 목소리로 말했다.
“잘하는 짓이다. 새끼들이 고등학생한테 발리기나 하고. 거기다가 너희들은 연장 들고 쪽수로…. 됐다. 말하는 내가 다 쪽팔리네.”
조직원들의 자존심을 뭉개는 어투였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황규혁한테 감히 말대꾸하지 않았다. 역시, 황규혁이라는 건가?
분위기가 이렇게 계속 얼어붙어 있으면 안 된다. 좋은 뜻으로 온 것이니, 끝도 좋게 끝나야 하지 않겠는가?
“제 잘못입니다, 형님. 제가 막내인데, 버릇없이 인사를 드리지 않아서….”
“인사? 누가 누구한테? 네가 얘네들한테?”
황규혁은 조직원들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하다. 오히려 저놈들이 너한테 인사를 해야지.”
어랍쇼? 이건 봐라?
“네가 그 많은 연합원을 이끄는 것도 있고, 이번 영남파 일로 공을 세운 것도 있잖아. 적어도 영등포에서는 네 서열이 바로 내 밑이야.”
그는 내게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두 번째라는 거지.”
황규혁의 말대로 적어도 이곳 영등포에서만큼은 내 서열이 두 번째란 말인가?
내가 가진 연합 규모를 참작해서 서열을 조금 높여 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바로 이인자까지 끌어 올려 준다고?
“우리 조직은 짬으로 서열을 정하는 게 아니다. 실력이 있다면 이런 핏덩이도 이인자가 될 수 있고, 일인자가 될 수도 있다. 그게 바로 오야지의 명령이다.”
화진파 대보스 권용일의 명령이 바로 이런 것인가?
능력만 된다면 나 같은 고등학생도 영등포의 이인자로 만들어 준다니.
이 조직의 성질 자체가 화끈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파격적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너희 같은 짬찌 새끼들이 감히 연장을 들이대고 있어? 그것도 내 바로 밑 서열인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서로 몰랐던 일이고, 저놈들은 충분히 내가 버릇없게 보이긴 했을 거다.
그리고 앞일을 위해서라도 그냥 여기서 좋게 마무리 짓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이런 데에서 앙금이 남게 되면 나중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황규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직원 전체가 연장을 바닥에 버려두고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그들은 지금 황규혁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머리가 향하는 곳은 황규혁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목소리가 작다!”
“죄송합니다, 형님!!”
나이트 건물이 흔들릴 것처럼 조직원들은 목이 터지라 소리쳤다.
“앞으로 행동 잘해라. 화진파 새끼들은 윗사람도 못 알아본다는 소문이 나기라도 하면 네놈들은 다 모가지야.”
황규혁은 내 어깨에 팔을 걸친 채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놈이 데리고 있는 연합원 중 일부만 끌고 와도, 너희들 쪽수가 안 돼.”
이런 게 조금 부담이 된다고나 해야 할까. 내 손이 다 오그라들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황규혁 덕분에 서열 정리가 확실히 된 것 같았다.
난 이곳 영등포에서의 이인자다.
하지만 계속 이인자로 남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 * *
“애들이 막 행동한 건 내가 대신 사과한다.”
“아닙니다, 형님. 오히려 제가 이런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황규혁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아 잔에 술을 따랐다.
“우리 애들, 좀 나대는 놈들이 있긴 하지만, 명령을 거스르는 놈은 없어. 앞으로 알아서 잘 할 거다.”
저건 내 명령도 무시하지 않을 거라는 보증이었다.
역시, 화진파는 화진파인가.
그냥 흔한 깡패 새끼들과는 좀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교육이 잘 되어 있었다니.
방금 조직원들의 행동을 보고 깨달았다. 이들은 조직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른다.
조직의 명령이란 곧 권용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들이 내게 고개를 숙이고 싶어서 숙이는 것이겠는가? 이게 다 권용일의 명령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황규혁이 어떤 말을 해도 말대꾸 하나 없이 묵묵히 듣고 있다가 내 앞에서 허리를 접은 놈들이다.
권용일이 얼마나 조직을 잘 장악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너, 싸움 좀 하더라?”
“예?”
잠깐 딴생각을 하다 황규혁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아까 네가 쓰러뜨린 그 세 명. 나름 주먹 좀 치는 놈들이거든. 근데 그렇게 쉽게 쓰러뜨릴 줄은 몰랐다.”
이 양반,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그런데도 나서지 않고 구경만 했다는 거지?
“보고 계셨습니까?”
“응? 당연하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인데.”
“그런데….”
“왜 갑자기 말렸냐고?”
“예.”
“처음에는 그냥 네 실력이 어떤가 싶어서 본 건데, 애들이 연장 드는 거 보니까 안 되겠더라고. 너도 정말 끝까지 갈 생각인 거 같았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놈들이랑 정말 끝장을 보려고 했다.
황규혁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저놈들은 지금쯤 황천길을 걷고 있었을 거다.
“우리 애들이 연장 들면 살벌해지거든. 그런데 네가 쫄지 않고 싸우려는 거 보니까, 깡도 제법 있구나 싶었지. 아무튼, 네가 운 좋게 연합을 만든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더라.”
깡이라-.
나도 참 겁 없이 살아온 사람이긴 한 거 같다. 황규혁한테 저런 소리를 들을 정도면.
“그런데 제가 정말 이곳에서 서열이 두 번째입니까?”
“그렇게 됐어. 어차피 여기는 신생 구역이라, 애들도 그렇게 짬이 높진 않아. 너처럼 실력만 있으면 누구든 금방 위로 올라갈 수가 있다는 거지.”
그랬던 것이군.
화진파가 영등포에서 자리를 잡은 게 최근 일이니, 조직원도 뉴 페이스로 채워 넣었다는 건가?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온 거냐?”
다른 이야기를 하느라,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잠깐 잊고 있었다.
“아, 사실은 이걸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난 탁자 위에 가방을 올려다 놓았다. 언뜻 봐도 이게 돈 가방이라는 걸 알 것이다.
황규혁은 손사래를 치며 가방을 내게 밀었다.
“내가 말했잖아. 이런 건 필요 없다고.”
“그래도 받아 주십시오.”
“됐어. 이번 건은 입학 선물이라고 생각해.”
“입학… 선물이요?”
“그래. 우리 화진파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얻은 전리품이잖아. 기념 삼아 가져가.”
이번에는 끝까지 권고해도 받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풍기는 뉘앙스를 보니, 다음에는 받겠다는 거 같기도 하고….
오늘은 그냥 물러야겠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어차피 네가 얻은 건데, 고맙기는 무슨.”
황규혁은 잔에 담긴 술을 입에 털어놓은 뒤 말했다.
“네가 지금은 이인자이긴 하지만, 언제 바뀔지 모른다. 그러니까 분발해.”
화끈하게 밀어준 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예. 곧 좋은 건수 물어다 오겠습니다.”
내 대답에 황규혁은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무리하진 말고. 이러다가 내가 밀리면 안 되잖아.”
글쎄. 고작 당신을 밀어내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영등포 구역 관리도 탐이 안 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단지, 난 화진파 전체를 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