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청렴함이 곧 정의?
“어휴. 정말 녹슬지를 않으시네요. 지금 당장 프로로 데뷔하신다고 해도 제가 말릴 수가 없겠습니다.”
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관장은 매트를 내리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손에 감긴 글러브를 벗겨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 있으면 나이 오십 먹을 사람한테, 그게 무슨 망발이야.”
“아닙니다, 검사장님. 제가 키우고 있는 애들도 검사장님한테는 상대가 안 될 겁니다.”
“어허. 검사장이라니. 지금은 그냥 검사야.”
“그래도 새해에는 검사장 직함을 다실 것 아닙니까? 하하하. 아니지. 검사장은 이미 하셨으니, 이제 총장님 아닙니까?”
역시 말은 참기름 바른 듯 번드르르하게 잘하는 사람이다.
“참, 사람하고는. 어떻게 그런 입을 가지고 복싱 관장을 할 생각을 했어? 회사 들어갔으면 부장 자리는 그냥 떼 놓은 당상일 텐데.”
아부도 어색하지 않게 잘 한다는 칭찬이었다. 관장은 부끄러운 척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젊은 날 주먹 잘못 쓴 대가겠지요.”
관장의 대답이 좀 쓰게 다가왔다. 이게 우리나라 권투의 현실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결코 세계무대에서 버틸 순 없다. 그 밑에서 선수들의 간까지 빼먹는 놈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런 일 없도록 내가 잘 봐 줄게. 우리 프로 선수 애들 뒤통수치는 놈들 있으면 다 말해. 내가 다 손 봐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검사님.”
관장은 진심으로 우러러 나오는 감사를 표했다.
대한민국 검사가 뒤를 봐준다고 하니, 관장으로서는 더없이 고마울 것이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검사님. 또 뵙겠습니다.”
“그래. 내일 또 시간 나는 대로 올게. 나중에 새해 되면 술이나 한잔하자고, 김 관장.”
“예. 내년에는 검사장님으로 불러드리면 되겠죠?”
“거참 사람. 끝까지.”
몇 번을 들어도 싫지 않은 말이 아부라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관장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굽힌 허리를 다시 들 줄 몰랐다. 내가 이 체육관에서 가장 큰 스폰서 역할을 하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행동일 것이다.
더군다나 내 동생은 동양 미들급 챔피언이었다. 조금만 더 빨리 동생이 복싱을 시작하고, 집안의 여유가 있었다면 그 녀석은 세계로 뻗어 나가 승승장구했을 텐데… 참 아쉽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무슨 미련을 둘까?
이제 앞으로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내년에는 검사장이라-.”
2016년 9월. 곧 있으면 2017년이 다가온다.
지금은 대검찰청 검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곧 고등검찰 검사장 직함을 달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로 위는 검찰총장이다.
내가 직접 고안한 썩은 사회의 악을 쳐낼 계획들은 2017년이 되면 바로 시작될 것이고, 그것을 발판으로 더 높이 올라갈 희망이 생겼다.
이날을 위해 내가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했던가?
부당한 거래로 승진을 거듭하는 동기들을 보며 나는 대한민국의 정의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나의 신의를 지켰다.
[저는 대한민국 검사입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2008년에 제정된 검사의 선서다.
난 이 선서를 되새기며 날마다 내게 다가오는 어둠의 손들을 뿌리쳐 냈다.
동기들을 비롯해 후배들까지 세상을 살 줄 모른다며 나를 손가락질했지만, 난 대한민국의 정의를 지키고자 모든 힘을 다했다.
그리고 이렇게 봄날이 오는 건가?
대한민국의 정의가 점점 살아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나도 동생처럼 파이터 기질이 넘쳐서 그런지, 처음에는 운동 쪽을 생각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스포츠 세계가 얼마나 썩었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걱정하며 방황하다 나의 평생 멘토로 삼게 된 담임 선생님을 만나 검사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정의로운 사도가 되자.
그것이 나의 시작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공부도 정말 열심히 해야 했고, 피 터지게 공부해서 대한민국 최고라고 불리는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공부가 끝이 아니었다. 깡패 놈들을 잡으려면 직접 현장에서 뛰어야 했다.
원래 경찰들과 형사들만 칼부림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싸우는 줄 알았더니, 검사도 얄짤없다.
정말 그 쓰레기들을 잡고 싶은 마음에 나도 현장에 직접 뛰어들었고, 경찰들 사이에서는 싸움꾼 검사라며 유명세를 떨쳤다.
비록 내 나이가 49세지만, 젊은 날 열정은 아직 식을 줄을 몰랐다.
지금은 조폭들이 기업형 조폭이라고 해서 회사를 줄줄이 세우는 바람에, 예전처럼 패싸움 현장을 검거하는 일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점점 시대가 스마트하게 변하다 보니, 조폭들도 머리를 쓴다. 그러다 보니 이놈들을 잡기가 더욱 까다로워졌다.
기업형 조폭.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현대 조폭의 거대화된 현실이었다.
물론 깊숙이 파고들지 않는 이상, 어떤 곳이 조폭으로 시작한 기업인지 일반인들은 알 수가 없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브랜드 이미지가 곧 수익으로 창출된다는 것을 알기에, 여러 기업형 조폭들이 철저한 이미지 세탁을 했기 때문이다.
“검사님.”
“응?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엘리베이터 밖을 나오자, 검찰총장의 비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니, 그럼 전화를 하면 될 일이잖아.”
“워낙 급한 일이라 직접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기에 검찰총장이 비서까지 보냈을까?
비서는 앞서가 고급 세단에 시동을 걸었다.
길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당연히 내게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
이런 눈길은 썩 달갑지가 않다.
억대 고급 외제 세단에, 비서가 따라다니는 사람.
흔히들 말하는 성공한 사람을, 그들은 부러움과 질투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 차량까지 보내시다니. 정말 많이 급하신 모양이구먼. 근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항상 이 시간마다 체육관에 오시지 않습니까? 검찰청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하. 그런가? 내가 좀 딱딱하게 살긴 하지.”
내 농담에 답을 하진 않았지만, 저 비서도 내가 참 나이에 맞지 않게 산다고 눈빛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난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 머리를 푹신한 쿠션에 기대었다. 이런 안락함을 느끼기 위해 그동안 거쳐 온 험난한 세월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딜 가더라도 명함을 슬쩍 꺼내 보여주면, 모두 나를 우러러보기에 바쁘다.
[대검찰청 검사 김태산.]
검찰 직급을 따지자면 대검찰청 검사는 공무원 기준으로 차관급이다. 검찰청 안에서 가지는 힘이 대단하다는 것. 물론, 대검찰청으로 가기까지 참 험난한 여정을 지나왔다.
사실, 내가 대검찰청에 들어간 건 얼마 안 되었다. 원래 속해 있던 곳은 촌구석 검찰청이었는데, 대통령의 레임덕이 시작되면서 여론이 점점 보수에서 진보로 쏠렸다.
부패로 난장판이 된 정권에 분노한 국민들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한 것.
자연스럽게 검은돈을 받지 않고 청렴하게 살아온 검사들이 하나둘 귀양에서 돌아와 대검찰청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도 그중 하나에 속했고, 여론도 청렴한 검사들을 원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높여 주는 중이었다.
이제야 깨끗한 정의의 세계가 구현되는 것인가?
난 이 나라에 일어나는 변화에 더없이 큰 기쁨을 만끽했다.
검사들에게 손을 뻗는 것은 정치인들도 있지만, 대기업들 수가 훨씬 많았다.
검은돈을 주면서 뒤를 봐달라는 그들의 제안.
난 이걸 받지 않은 대가로 촌구석에 박혀야 했다. 그리고 선배, 동기, 후배들을 가리지 않고 멸시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혼자 깨끗한 척을 한다면서.
하지만 이제 썩은 검사들의 시대는 끝났다. 청렴한 검사의 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요즘 천성 그룹은 어떻게 돌아가?”
총장실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남았기에 나는 지루한 시간을 대신해 비서의 보고를 들었다.
“천성 그룹의 후계자 싸움이 점점 과열된다고 합니다.”
“아직도?”
천성 그룹의 이강찬 회장이 2014년 심장발작을 일으켜 쓰러지면서, 대한민국 1위 기업 천성 그룹의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언론에서는 이강찬 회장이 VIP 병실에서 재활 치료를 받으며 가끔 휠체어도 타고 다닌다는 소리가 가끔 나오지만, 진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이미 이강찬 회장이 죽었다는 찌라시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추세다.
“독한 놈들. 이미 끝난 거 아니었어? 이영재 그놈이 다 넘겨받았잖아?”
“예. 그렇기는 한데, 이영재가 아직 부회장이지 않습니까? 둘째 딸과 막내딸이 힘을 합치고, 화진 그룹까지 끌어들이는 중이라고 합니다.”
이강찬 회장은 이미 큰 아들 이영재에게 기업을 물려주기로 결심을 했는지, 십 년 전부터 꾸준히 지분을 큰아들에게 넘겼다. 어마어마한 상속세를 피하고자 편법을 쓴 건 덤이었다.
아들이 좀 더 있었다면 이영재와 경쟁을 벌이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들은 이영재 하나뿐이었다.
더군다나 장남이니 이강찬 회장도 별 수 없이 장남에게 모든 것을 넘겨 준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밑에 있는 딸들이 이런 상황을 곱게 봐 줄 리 없다. 고작 딸이라는 이유로 후계자 구도에서 밀려난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른 건 또 없어?”
“SG 그룹 큰 손주가 이번에 또 대형 사고를 쳤나 봅니다. 마약에, 강간까지. 지금 SG 그룹 전략팀이 바쁘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또 그놈인가? 아비나 아들이나 하여튼, 하루를 그냥 넘기는 법이 없는 구제불능인 놈들이다.
“잘들 하는 짓이다. 미련한 놈들. 조만간 내가 애들한테 똑똑히 못을 박아 줘야겠네. 더 이상 대기업 뒤를 봐 주지 말라고.”
이 나라에 여러 기업형 조폭들이 있지만, 천성 그룹을 비롯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을 보면 차라리 저놈들이 더 조폭스러웠다.
특히 총수의 자제 중 사고 치지 않은 놈이 손에 꼽을 정도고, 살인, 갈취, 협박, 납치 등등 그놈들이 저지른 중범죄를 나열하자면 입만 아플 것이다.
또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이 뭐가 이쁘다고 총수들은 막대한 돈을 이용해 자식이 싸지른 똥을 치워준다.
그럼 좀 반성하는 기미라도 보여야 하는데, 이놈들은 본성 자체가 썩은 건지, 아니면 돈으로 못할 것이 없다는 걸 아는 건지 또 범죄를 저지르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차라리 조폭이라면 말도 안 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조폭은 민간인들에게 함부로 주먹질도 못 한다. 자칫 잘못하면 조직 전체가 경찰에게 탈탈 털려 분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나와바리라고 해서 구역을 정해 조직들끼리 싸움도 했지만, 지금 그랬다가는 모두 경찰, 검찰에게 차례로 두드려 맞아 감옥에서 썩어야 한다.
그래서 요즘 조폭은 조폭도 아니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대기업은 다르다.
민간인을 죽이든 패든 그들은 돈으로 경찰과 검찰을 움직여 아무 일도 없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 대기업에서 만든 경호업체는 겉으로만 경호업체지, 실상은 군대나 다름이 없다. 대다수 특전사 출신으로 살인, 납치, 협박을 가리지 않고 돈만 주면 뭐든 한다.
정말이지 지독할 만큼 대기업은 철저하게 자신들만의 제국을 만든 것이었다.
* * *
“어서 와.”
“예, 총장님. 찾으셨습니까?”
총장실에 와보니 초대된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고검장 다섯 명과 대검 차장도 와 있었다.
차례로 인사를 하려 했지만, 일이 급한 총장은 나를 바로 앉혔다. 그리고 보고서 하나를 내 앞에 툭 던졌다.
“이건….”
“천성 그룹이 기어코 다 된 밥에 재를 뿌렸다.”
총장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는 보고서 위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글자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최영일 게이트 수사 방향 보고서]
내가 3년 전부터 차근차근 쌓아온 수사 보고서다. 그런데 천성 그룹 이야기가 나오자 조금 불안해졌다.
한 페이지씩 넘기면서 점점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간쯤 페이지를 넘겼을 때 하마터면 시발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이건 수사 방향을 정한 천성 그룹의 일방적인 명령이었다. 그것도 지독한 협박을 섞은.
최영일 게이트란 대한민국 역사상 전례 없는 국정농단 사건이 될 것이다. 난 이 조사 자료들을 수년 전부터 모아왔고, 이제 터트릴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
“그 딸년들이 아주 칼을 갈았어. 부회장 이영재를 완전히 날려 버릴 셈이야. 이거 터지면 진짜 구속될지도 몰라.”
나보다도 먼저 천성 그룹이 이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들은 최영일 게이트의 중심에 있는 놈들이다. 이 사건이 공개되면 천성 그룹은 크게 흔들린다.
하지만 이놈들은 이 사건을 후계자 구도를 위해 써먹으려고 한다. 천성그룹 부회장 이영재를 쫓아내기 위해 둘째와 셋째 딸들이 서로 합심한 작품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영재와 깊숙이 관련되어 있는 최영일 게이트를 폭로해 나라를 뒤집는 것.
이미 모든 언론사가 터트릴 신호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너무 억지스럽다고? 천만에.
대한민국이 망해도 천성 그룹은 망하지 않는다. 그들이 벌이는 후계자 전쟁은 이 나라의 대통령조차도 날려 버릴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다.
이 정도 폭격이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그냥 넘기긴 힘들 것이다. 문제는 천성 그룹이 검찰청까지 건드리고 있었다.
난 이를 앙다물며 중얼거렸다.
“돈 봉투 잔치라니….”
돈 봉투 잔치라고 해서 서울지검장과 검찰국장이 민정수석에게서 받은 돈을 특수 활동비라는 명목으로 검찰청 내부에 뿌린 비리였다.
또한, 내게 익명의 투서들을 무더기로 보냈던 건 모두 천성 그룹에서 꾸민 짓이었다.
한 번 파고들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내 성정을 아는 것인지, 놈들은 날 이용하고자 마음을 먹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사건이 터지면 검찰청 내부도 폭파된다.
돈 봉투가 다 어디서 나왔겠는가? 천성 그룹을 비롯한 여러 대기업을 통해서 나왔다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다.
천성 그룹은 이 빌미를 이용해 대통령과 비선 실세들을 모두 날려 버릴 셈이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수사를 하지 않을 경우 검찰도 날려 버리겠다는 협박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총장님께서는 모르셨던 일입니까?”
나는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총장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랐다.”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는가? 저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특수 활동비라는 명목으로 밑의 애들에게 돈을 뿌리는 건 관례처럼 있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이 정도 액수는 도를 넘어섰다.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지뢰를 사방에 깔아 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고검장님들께서도 모르셨고요? 차장님께서도?”
난 경멸 섞인 눈빛을 띠며 불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쳐다보았다.
그들은 내 눈초리를 피하며 애써 헛기침을 터트렸다.
더러운 새끼들.
저놈들은 이보다 더한 액수를 챙긴 게 틀림없다. 그게 폭탄으로 돌아올 줄도 모른 채 말이다.
잠시 긴 침묵이 총장실 안에 감돌았다.
무겁게 운을 뗀 것은 총장이었다.
“이건 천성 그룹이 우리한테 협박을 하는 거야. 자기들 말을 따라서 수사 방향을 잡으라는 거지.”
천성 그룹이 원하는 건 하나다. 이미 그들도 최영일 게이트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 사건을 터트리려는 것은 순전히 지금의 황제를 몰아내고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검찰청에 뿌린 돈으로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방패를 세우고, 표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칼로 쓰기 위해서 말이다.
“설마, 우리 검찰이 그 정도의 협박에 무너지는 겁니까?”
내 물음에 총장은 말없이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다른 검사장들도 비슷한 눈길이었다.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뒷돈을 받지 않은 사람은 나 혼자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 사건의 핵심을 파고든 사람이 바로 나였다.
“이거 터지면 검찰청 전체가 날아가. 알고 있지? 네 밑에 있는 애들 다 죽이고 싶어?”
“이런 더러운 돈을 받은 놈들이라면 더는 제 새끼들이 아닙니다. 총장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린 검사입니다. 대기업의 머슴이 아니고요.”
도발적인 나의 대답에 검사장들이 하나 둘 이빨을 드러낸다.
“어허! 이 사람이 지금 총장님께 못하는 말이 없구만!”
“그래. 지금 다 같이 죽자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 개새끼들이 끝까지.
하마터면 욕설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일단 김태산 검사만 남고, 다들 나가 봐.”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총장은 모두 밖으로 쫓아내고 나와 단둘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태산아.”
이 양반은 끊었던 담배까지 꺼내 입에 물었다.
“유도리 있게 살자.”
융통성을 좀 가지라는 총장의 말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총장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총장님께서 이러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저를 촌구석으로 귀양 보내셨던 분이 다시 대검에 부르실 때 그러셨지요? 정의를 구현하자고.”
물론, 총장이 날 부른 것은 아니었다. 이것도 분명 천성 그룹이 사건의 핵심을 들고 있는 내게 힘을 실어 준 다음에 써먹기 위한 것이리라.
내가 이렇게까지 저돌적으로 나올 줄은 그놈들도 아마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영재를 쫓아내려고 그것들이 화진 그룹까지 끌어들였어. 거기다가 천성 그룹에 있는 이사들도 이미 합심을 했고. 그놈들은 널 칼로 쓰려고 작정한 거야. 그래서 네가 대검에 온 거고.”
아예 속내를 다 드러내는 총장이었다. 자신이 대기업의 머슴 노릇을 했다는 걸 밝히는 꼴이었다.
천성 그룹이 조폭 출신인 화진 그룹을 끌어들였다는 건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협박이었다.
“그놈들은 제가 칼을 대통령 쪽에만 휘두르길 바라는 것이군요.”
“그래. 너만큼 끈질긴 놈이 없으니까, 최영일 게이트를 수사하도록 힘을 실어 준 거야. 하지만 네가 대기업에까지 칼춤을 추려고 하면 그놈들이 가만있겠어?”
“잘됐네요. 그놈들 뒤통수를 이번에 제대로 치게 생겼습니다.”
“야, 김태산!!”
참다못한 총장이 결국 언성을 높였다.
“똑바로 생각해. 네가 칼 뽑는 순간, 검찰까지 다 날아가!”
“그건 총장님도 포함이겠지요?”
“….”
침묵은 곧 긍정을 뜻한다. 난 더 할 말이 없었다. 내 칼의 방향은 이미 정해졌고, 비틀 생각은 없다.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총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총장의 마지막 말이 나를 찌른다.
“후회하지 않겠냐?”
후회? 이제까지 후회할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항상 나 스스로 떳떳 하고자 노력했으니까.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검사장들에게 한 마디 던졌다.
“여기서 이럴 시간 있으십니까?”
각자 살길을 찾아보라는 경고였다. 물론, 전쟁이 시작되면 난 저들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다.
검사장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하나둘 발 빠르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