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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레벨업-198화 (198/200)
  • < 제니퍼 >

    제니퍼의 마력 파동에 왜곡과 [환영살포]는 깨졌지만, 가디언스를 감추고 있던 은폐와 왜곡은 깨지지 않았다.

    그저 단순한 은폐와 왜곡의 장을 쓴 게 아니라 거기에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반사를 비롯한 몇 가지 패턴을 더 추가해서 안전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강하진은 은폐의 장 안쪽에서 제니퍼를 유심히 관찰했다.

    제니퍼를 보자마자 아쉬가 떠올랐다.

    그 느낌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저기 있는 제니퍼는 진짜 제니퍼가 아니었다. 절대로.

    ‘아쉬랑도 좀 다른데······.’

    처음에는 아쉬 느낌이 확 났는데, 계속 지켜보다 보니, 뭔가가 많이 달랐다.

    정확히는 제니퍼와 아쉬가 묘하게 뒤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융합하기라도 한 것처럼.

    강하진은 문득 라파시드의 서에 있는 융합의 장이 떠올랐다.

    만일 융합의 장을 더없이 완벽하게 펼치면, 저런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강하진이 보기에 지금 제니퍼의 모습이 딱 그랬다.

    사실 라파시드의 서 중에서 가장 숙련도가 떨어지는 것이 바로 융합의 장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얻기도 했지만, 너무 수준이 높아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잘 써먹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융합의 장이 아니었다면 라파시드의 서에 있는 다양한 패턴을 동시에 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융합의 장을 제대로 펼치지 않더라도, 그저 흉내만으로도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잠깐 지켜보는 사이 제니퍼가 괴물을 싹 정리해 버렸다.

    그동안 봐 왔던 제니퍼가 아니라는 건 그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정말 아쉬가 제니퍼와 융합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했다.

    저 정도라면 이 상대로 마주쳐선 안 된다.

    예전의 아쉬도 철저한 준비 끝에 간신히 이길 수 있었다.

    한데 만일 이렇게 아무 준비도 없는 상태로 아쉬와 마주친다면 이기는 건 고사하고 버티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제니퍼는 살아남은 디펜더스의 각성자들도 전부 처단해 버렸다.

    그리고 제이슨과 윌리엄은 그런 제니퍼를 말리지 않았다.

    아니, 말리지 못했다. 제니퍼의 분위기가 예전과 너무 달라졌기 때문이다.

    제니퍼는 한심한 눈으로 그들을 둘러봤다.

    스팬서는 그 시선에 발끈했지만, 그 역시 나서지 못했다.

    “우리가 당했어. 그 거지같은 환상에.”

    제니퍼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태도뿐 아니라 말투도 달라졌다.

    “환상에 당했다고?”

    “그래. 정확한 건 나도 본체를 잃어버려서 모르겠지만, 강렬한 기억 몇 개는 받았지.”

    그 말에 세 사람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저 제니퍼는 아쉬였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혹시나 해서 보험을 들어놓긴 했는데······ 이 몸은 역시 나랑은 잘 안 맞아. 원래의 30% 정도밖에 힘을 못 내겠어.”

    아쉬는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쓰러진 암흑용의 사체로 다가갔다.

    원래는 황수영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환상이 깨지면서 원래 모습인 암흑용으로 돌아간 것이다.

    아쉬는 암흑용의 가슴을 손으로 콱 뚫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암흑용의 심장을 뽑아냈다.

    그것은 암흑용이 가진 마력의 원천이었다.

    제니퍼는 암흑용의 심장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묘한 힘의 흐름이 생겨나더니 그녀의 몸을 감쌌다.

    암흑용의 심장에 깃든 근원의 힘이 제니퍼의 몸으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미세하게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쯧, 이렇게 했는데도 절반이 채 안 되네.”

    제니퍼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완벽하게 힘이 돌아오지 않아 짜증이 났다.

    “네가 암흑용을 유인하겠다고 간 이유가 그 심장 때문이었나?”

    제이슨의 물음에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면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일을 맡겠어? 안 그래?”

    “아쉬다운 대답이로군.”

    제니퍼가 씨익 웃었다. 겉모습만 남고 속은 아쉬가 되었지만, 여전히 매혹적인 미소였다.

    또한 제니퍼가 가진 특유의 요염한 분위기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약간 혼란스러웠다.

    “아쉬가 아니라 제니퍼야. 내가 온전한 아쉬로 보이나?”

    제이슨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난 제니퍼이기도 해. 내가 왜 계약을 넘겨받았는지 모르겠어?”

    “그건 제니퍼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이미 처음 제니퍼랑 잤을 때 몸을 빼앗을 토대를 만들어 놨어. 거기에 네 계약 따위는 조금도 필요 없었다고.”

    “그럼 대체 왜······.”

    “그래야 온전히 제니퍼의 몸을 내가 차지하게 되니까. 기껏 되살아났는데 네놈에게 끌려 다닐 수는 없잖아. 안 그래?”

    “후우. 그보다 이제 어쩔 거지?”

    지금은 저런 사소한 걸로 말다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딘가에 있을 가디언스도 찾아서 처리해야 하고, 이 안에 들어온 강하진도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르바스를 만나 협상을 벌여야 한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제니퍼는 제이슨의 물음에 피식 웃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애초에 마르바스와 쿵짝을 맞춘 건 너였잖아.”

    “네 생각을 묻는 거다. 넌 제멋대로니까. 여기서 강하진을 찾아가겠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다.”

    “나도 너랑 같이 다닐 거야. 강하진이 또 무슨 이상한 짓을 했을 줄 알고? 여기 펼친 환상, 너도 봤잖아.”

    그 말에 제이슨의 표정이 확 굳었다.

    사실 방금 겪은 일은 정말 기겁을 할 정도로 놀라웠다.

    어떻게 그런 환상을 모두가 겪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단순히 스킬이나 마력으로 해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강하진도 근원의 힘을 쓰는 건가?”

    “어쨌든 벽을 넘었으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다들 그 부분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근원의 힘은 그저 레벨을 올리고 벽을 넘는다고 해서 쓸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근원, 그러니까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힘이었다.

    시스템의 힘에서 비롯된 마력을 쓰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근원의 힘에 다가가기 어려운 법이었다.

    근원의 힘을 쓰려면 그와 관련된 특별한 비법을 통해 오랜 시간 수련해야만 한다.

    한데 지구에 던전이 열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근원의 힘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이건 그들의 상식 안에서는 절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제니퍼가 주위를 슥 둘러보며 말했다.

    “혹시 모르지. 이 근처에 또 이상한 짓을 해놓고 숨어 있는지도.”

    그렇게 말하던 제니퍼가 어딘가를 빤히 노려봤다.

    “왜 그래?”

    “저쪽이 좀 이상해서.”

    “이상하다고?”

    제이슨은 제니퍼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아예 제이슨은 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하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반면 왜곡과 은폐의 장을 통해 숨어 있던 강하진은 정말 깜짝 놀랐다.

    방금 제니퍼는 틀림없이 이쪽을 꿰뚫어봤다.

    아주 명확하게 본 건 아니지만 제니퍼의 감각 어딘가에 이쪽이 걸린 건 분명했다.

    “천천히 후퇴합니다. 제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정확히 지시한 거리만큼만 움직여야 합니다.”

    강하진의 말에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방금 제니퍼가 싸우는 모습을 봤기에 저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저렇게 강한 자들이 왜 그동안은 그렇게 소극적으로 움직였을까요?”

    김지혜는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나 강한 자들이라면 그동안 충분히 다양한 방법으로 가디언스에 대항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한 사람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저기 제니퍼는 진짜 제니퍼가 아니라 다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라고요?”

    김지혜는 다른 사람이라는 말에 몇 번이나 제니퍼를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전혀 다른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강하진이 한 말이니 당연히 맞을 거라고 일단 믿었다.

    어쨌든 지금은 조심해서 물러나야만 한다. 저들과 싸우면 아마 이 중에서 최소한 절반 이상은 죽어나갈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전멸을 면치 못할지도 모른다.

    김지혜는 강하진을 힐끗 쳐다봤다.

    ‘설마 마스터도 저 사람에게 안 되는 걸까?’

    김지혜는 강하진이 정말로 강하다는 걸 안다. 아마 가디언스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이 동시에 덤벼도 강하진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왠지 강하진이 저 제니퍼라는 사람과 싸우면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쪽입니다.”

    강하진의 말에 김지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천천히 지시에 따라 그곳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강하진이 쉴 새 없이 펼치는 은폐와 왜곡의 길을 따라 입구 쪽으로 이동했다.

    * * *

    강하진은 김지혜를 비롯한 가디언스를 입구 쪽으로 보낸 다음, 자신은 다시 안쪽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맹렬히 반대했지만, 디펜더스가 강하진의 은폐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시켜준 다음, 홀로 빠져나왔다.

    강하진이 다시 나온 이유는 제니퍼의 상태가 계속 마음에 밟혔기 때문이다.

    왠지 좀 더 관찰하면 뭔가 중요한 걸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라파시드의 서에 대한 수준이 획기적으로 올라갈지 모른다.

    그동안 강하진을 숱한 위기에서 구해준 것이 바로 라파시드의 서였다.

    그건 어찌 보면 과거의 지구가 강하진에게 남겨준 선물과도 같았다.

    강하진은 다시 원래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내내 라파시드의 서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과 성찰에 빠졌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강하진의 감각을 무언가가 건드렸다.

    이건 아쉬와 싸울 때 여러 번 경험했던 느낌이었다.

    강하진은 걸음을 멈추고 은폐와 왜곡의 장을 펼쳤다.

    지금 이쪽으로 아쉬의 존재감을 가진 자, 즉, 제니퍼가 다가오고 있었다.

    서두른 덕분에 제니퍼가 도착하기 전에 은폐와 왜곡의 장을 제법 잘 펼칠 수 있었다.

    제니퍼는 강하진 근처에 와서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다른 디펜더스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따로 움직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안 봐도 뻔했다. 제니퍼가 이쪽으로 가겠다고 우겼을 것이 분명하다.

    반면 제이슨을 비롯한 디펜더스는 여기서 할 일이 있을 테고.

    ‘마르바스를 만나려는 거겠지.’

    마르바스의 미궁이 완성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아직까지는 그들을 좀 방치해도 괜찮으리라.

    강하진은 이왕 이렇게 된 것 좀 더 가까이에서 제니퍼를 충분히 관찰해 보기로 했다.

    강하진은 제니퍼 바로 앞까지 갔다.

    은폐와 왜곡의 장이 허용하는 범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제니퍼의 온몸을 찬찬히 훑어봤다.

    정말 기묘했다.

    제니퍼라고 생각하고 보면 제니퍼로 보였고, 아쉬라고 생각하고 보면 아쉬로 보였다.

    강하진은 좀 더 깊이 있게 제니퍼를 살폈다.

    겉으로 흐르는 느낌과 마력만 보지 않고 더 깊숙한 곳에 있는 근원의 힘을 파악했다.

    제니퍼는 가만히 서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녀의 위치는 강하진 바로 앞이었다.

    다만 왜곡과 은폐의 장 때문에 그녀의 눈에는 그저 허허벌판이 쫙 펼쳐진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실제로 강하진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겨도 절대 강하진과 부딪히지 않을 것이다. 공간 자체가 왜곡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엉뚱한 곳을 찾던 제니퍼가 갑자기 강하진을 똑바로 바라봤다.

    마치 정말로 왜곡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여기가 굉장히 의심스러운데?”

    제니퍼는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녀의 손이 강하진 바로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강하진은 그런데도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저대로는 절대 자신에게 닿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왜곡의 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니퍼가 근원의 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조금씩 제니퍼의 손이 강하진과 가까워졌다.

    하지만 강하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제니퍼를 관찰했다.

    한 걸음만 더 나가면 뭔가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데 그 무언가는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니퍼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맺혔다.

    “잡았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손이 강하진의 옷깃을 꽉 쥐었다.

    왜곡의 장을 뚫은 것이다.

    아직 은폐는 뚫지 못했기에 눈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왜곡을 뚫고 강하진을 잡았으니 은폐야 어찌 되건 상관없었다.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강하진은 여전히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제니퍼는 강하진의 옷깃을 쥔 채 근원의 힘을 끌어올렸다.

    파창!

    확실히 목표를 쥐고 있어서 그런지 은폐와 왜곡의 장을 깨뜨리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주변의 공간이 유리 깨지듯 깨졌고, 강하진의 모습이 드러났다.

    제니퍼는 바로 코앞에 서 있는 강하진을 보고서는 눈을 반짝였다.

    “이렇게 앞에 있었는데도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니. 정말 사기적인 기술이야. 그거 나한테도 알려줄 수 있나?”

    강하진은 대답하지 않고 제니퍼를 가만히 쳐다봤다.

    “본체가 소멸해서 기억이 명확하지 않은데, 그거 날 봉인했던 거 맞지? 혹시 그 봉인도 지금 쓴 거랑 비슷한 기술인가? 그럼 그것도 알려줄 수 있지? 응?”

    제니퍼는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되찾는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는 모든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도 괜히 아플 필요 없잖아? 그냥 깔끔하게 끝내자고. 고통 없이 한 방에 죽으면 너도 좋잖아. 안 그래?”

    강하진이 그 물음에 한 대답은 전혀 엉뚱한 거였다.

    “드디어 닿았다.”

    제니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닿았다니, 뭐가 닿았단 말인가. 설마 자신이 잡고 있는 이 옷깃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그 순간, 제니퍼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갑자기 강하진의 온몸에 근원의 힘이 꽉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힘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라파시드의 서는 애초부터 패턴을 깔아서 마법진처럼 쓰는 수법이 아니었어. 그러니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처럼 불편할 수밖에.”

    자신과 맞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잘못 쓰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건 마법진이 아니라 수련법이었다.

    여기에 큰 도움이 된 것은, 예전 아마존에서 보물지도를 통해 얻은 풍운신공이었다.

    그동안은 풍운신공을 익히고도 그저 싸움에 응용할 생각만 했다.

    하지만 풍운신공은 좀 더 근원적인 무공이자 수련법이었다.

    근원의 힘을 다룰 수 있는 무공이었다.

    라파시드의 서와는 관계가 없었지만, 근원의 힘을 다룰 수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동안 풍운신공을 꾸준히 수련한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었다.

    강하진은 라파시드의 서가 하나로 융합되는 걸 느끼며 앞에 서 있는 제니퍼를 담담히 쳐다봤다.

    라파시드의 서의 마지막, 융합의 장은 나머지 아홉 개의 장을 하나로 모아 몸에 융합시키는 역할을 했다.

    라파시드의 서는 인간이 다룰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이었다. 그 힘을 조율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풍운신공이었다.

    강하진은 풍운신공을 이용해 라파시드의 서를 몸에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보물지도를 팔았던 그 노인이 본 미래의 한 장면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을까?

    강하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풍운신공이 아니었다면 지금 라파시드의 서를 온전히 얻지 못했을 것이고, 틀림없이 제니퍼에게 죽었을 테니까.

    강하진의 시선을 받은 제니퍼가 화들짝 놀라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지금의 강하진을 함부로 대적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도주를 선택했다. 곧장 돌아서서 냅다 달렸다.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분명히 강하진을 등지고 달렸는데, 어느새 자신이 강하진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이것이 바로 왜곡의 힘이었다.

    꽈득!

    강하진이 제니퍼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말도 안 돼!”

    제니퍼가 발악하듯 외쳤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그동안 쌓고 간직했던 근원의 힘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에 있던 마력까지 싹 사라져 버렸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제니퍼가 멍하니 주저앉아 강하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머리카락 끝에서부터 서서히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온몸이 사라질 때까지 제니퍼는 끝까지 강하진을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너무 어이없이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보니 강하진의 몸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직 제대로 근원의 힘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방금은 무리해서 벌인 일이었다.

    그래서 허무했다.

    지더라도 이렇게 간단히는 아니었을 텐데. 아니, 어쩌면 이길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제니퍼는 그 표정을 남기고 소멸해 버렸다.

    강하진은 끝까지 담담함을 유지한 채 서 있었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몸에 들끓는 근원의 힘을 차분히 안정시키고 몸과 조화를 시켜야 했으니까.

    그렇게 강하진의 몸에 라파시드의 서가 차근차근 융합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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