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원 괴물 2 >
강하진은 일본에 있었다.
일본에도 당연히 차원괴물이 잔뜩 나타났다. 하지만 강하진이 일본에 있는 건, 꼭 차원괴물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이번에 준비를 어찌나 철저히 잘 했는지, 강하진이 나설 일이 아예 없었다.
유일하게 이번 계획에서 방치된 곳이 일본이었는데, 일본 역시 기존에 있던 가디언스 거점도시에 사는 각성자들이 아주 훌륭하게 차원괴물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강하진은 눈에 띄는 차원괴물을 잡으면서 레벨업에 열중했다.
또한 혹시 있을지 모를 아쉬의 습격에 대비했다.
차원괴물이 나타난 초기에 간신히 두 번째 벽을 넘을 수 있었다.
아쉬를 상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맞춘 것이다.
강하진은 의도적으로 백호와 따로 움직였다.
백호 역시 벽을 두 번이나 넘은 괴물이기에 아주 강력했지만, 정작 아쉬와 싸울 때는 도움이 되지 못할 공산이 컸다.
현재 백호는 가디언스 거점도시 근처를 맴돌면서 혹시라도 위협이 될 만한 괴물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차원괴물이 위험한 이유는 수가 많고 강한 것도 있지만, 그놈들을 상대하느라 상당수 던전을 방치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차하는 순간 던전들이 순차적으로 터지면서 큰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백호를 동원해 그런 일을 막는 것이다.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차원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한 준비가 너무 과했기에 여력을 던전으로 돌리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차근차근 안정시킨 다음에는 세 번째 재앙을 막을 준비로 이을 계획이었다.
강하진이 현재 있는 위치는 가디언스 거점도시에서 3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사실 가디언스 거점도시보다 영국 쪽 기지가 더 가까운 위치였다.
굳이 그곳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돌연변이 괴물이 가장 많은 곳이고, 제법 멀리 있는 괴물들이 이쪽으로 끊임없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냥 포인트였다.
여기로 괴물들이 모여드는 건 이곳에 있는 유적 때문이었다.
일본에 남은 몇 안 되는 유적 중 하나였는데, 당연히 시스템에 편입시켰다.
[마력 저장소]
[양질의 마력을 저장해 놓는 창고. 이곳에 저장한 마력을 이용해 환수를 사육할 수 있다.]
환수라는 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일종의 괴물이라고 보면 된다.
이곳의 마력은 괴물들에게 상당히 먹음직스러운 먹이였다. 그래서 이 마력을 노리고 괴물들이 다가오는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 온다고 해서 마력을 먹을 수는 없었다.
시스템의 힘이 마력을 보호하고 있으니까.
어쨌든 강하진은 그렇게 모여드는 괴물들을 처리하면서 착실히 레벨을 올렸다.
차원괴물이 나타난 첫 날에만 차원괴물을 상대했고, 그 이후로는 계속 여기에서 괴물을 사냥했다.
가끔 차원괴물이 다가올 때도 있었지만, 사실 그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
여기서 지내기 시작한 지도 벌써 사흘이나 지났다.
전 세계를 덮친 차원괴물의 수가 조금씩 줄어들면서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차원을 찢고 나타나는 차원괴물의 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부터는 더 이상 차원괴물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미 나온 차원괴물만 상대하면 되니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차원괴물은 다 없어질 테니까.
물론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수를 줄여둬야 군열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가디언스는 끝까지 차원괴물을 찾아 싸울 것이다.
강하진은 저 멀리서 우르르 몰려드는 괴물을 향해 크게 검을 휘둘렀다.
꽈르릉!
검의 궤적을 따라 거대한 벼락이 초승달 모양으로 생겨나더니 쫙 퍼져나가며 괴물들을 덮쳤다.
이제 숨 쉬듯 자연스럽게 전격을 다룰 수 있었다. 숙련도가 거의 끝에 도달한 것이다.
이보다 더 숙련도를 높이면 전뇌화 직전 단계에 이르게 된다.
전뇌화가 된다는 건 벼락 그 자체가 된다는 뜻이니 숙련도만으로는 거기까지 도달할 수 없었다.
벼락을 뒤집어 쓴 괴물들은 대부분 새까맣게 타서 쓰러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벼락을 견디고 남은 괴물들이 있었다.
강한 놈만 살아남은 것이다.
강하진은 기계적으로 검을 휘둘러 그놈들을 처리했다.
서걱! 서걱! 서걱!
검격 한 번에 괴물 한 마리가 어김없이 쓰러졌다.
그렇게 괴물의 파도를 한 차례 처리했을 때, 무언가가 강하진은 자신의 감각을 슬쩍 건드리고 빠져나갔다.
‘왔군.’
일부러 감각을 건드린 건 아닐 것이다. 아마 방심이 낳은 결과이리라.
설마 강하진이 이 정도로 강해졌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또한 이 근처에 강하진이 미리 설치해 놓은 라파시드의 패턴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을 테고.
강하진은 차분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아쉬는 지금까지 강하진이 본 그 누구보다 강하다. 마르바스를 제외하고.
물론 마르바스와 아쉬 중에 누가 더 강한지는 모른다. 아직 그 둘을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오르지 못했으니까.
아무튼 아쉬든 마르바스든 지금의 강하진이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건 확실했다.
그러니 그들과 싸우려면 무슨 짓이든 할 각오를 다져야 한다. 지금 강하진이 그러고 있듯이.
“이미 들킨 거 알면서 계속 숨어 있을 건가?”
강하진의 말에 저 멀리 무너진 건물 잔해 뒤에서 아쉬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 왜 이렇게 강해진 거지?”
아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강하진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리고 10미터쯤 거리를 두고 서서 강하진을 유심히 살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알겠네. 내 손가락이랑 팔을 없앤 게 너라는 걸. 그때 느낌으로는 내 팔보다 좀 못했던 거 같은데······ 이렇게 보니 그건 아니네?”
아쉬가 피식 웃었다.
“그동안 레벨 좀 올린 모양이네? 벽도 하나 넘고. 이야, 제법이야.”
아쉬는 강하진을 가만히 살펴봤다. 혹시나 자신이 놓친 게 있지 않을까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별 거 없었다. 아주 가소로웠다.
“데리고 다닌다던 고양이는 놓고 온 모양이지? 왜? 나랑 싸우다 죽을까봐?”
강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보니 혼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더 드는군.”
아쉬의 표정이 묘해졌다. 강하진이 한 말에서 왠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 나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렇다면?”
아쉬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함정도 좀 마련하고?”
“그래.”
강하진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니 아쉬가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왜, 그냥 덤비려니 무서웠어?”
강하진은 이번에도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렇게 미리 준비했지. 네 분신들이랑 싸우는 것도 버거웠거든.”
아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세심히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함정이라면 뭐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하다못해 지원군이라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아, 그건가? 지구에 있다던 전자장비? 무슨 폭탄 같은 걸 준비한 건가?’
아쉬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지구에서 쓴다던 강력한 폭탄이나 미사일에 대해서는 이미 직접 경험을 해봤다.
그런 걸로는 절대 자신을 다치게 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마력으로 온몸이 꽉 채워진 아쉬에게 마력조차 담기지 않은 폭탄의 파괴력은 아무 의미가 없었으니까.
“내가 확실히 말해주는데, 분신이랑 날 비교할 생각은 하지 마. 분신은 내 발끝에도 못 미치니까. 기준을 거기에 두면 아예 가늠조차 할 수 없다는 뜻이야.”
강하진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쯤은 예상했다. 아마 마르바스보다도 강할지 모르지.”
그 말에 아쉬의 표정이 묘해졌다.
“너······ 마르바스를 알아?”
강하진이 피식 웃었다.
“왜? 내가 알면 안 되는 건가?”
아쉬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 힌트야 곳곳에 널려 있으니까. 운이 좋으면 한두 개 정도 못 얻을 건 없지. 그래도······ 그래도 이건 좀 놀라운데?”
아쉬는 그렇게 말하며 강하진에게 한 발 다가갔다.
막대한 압력이 몰려왔다.
강하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이 한 걸음만으로도 아쉬가 얼마나 강한 놈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함정으로 과연 저놈을 잡을 수 있을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끝났다.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이제 남은 건 직진뿐이었다.
우우웅.
강하진이 촘촘히 그리고 아주 넓게 깔아 놓은 라파시드의 패턴이 은은히 진동하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워낙 광범위하고 복잡하게 깔아 놓았는지라 작동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리 펼칠 수는 없었다.
아쉬가 이 안에 들어온 이후에 펼쳐야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다.
라파시드의 패턴이 일으키는 진동 때문에 아쉬도 지금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쉬는 고개만 한 번 갸웃거렸을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사실 가장 확실한 답은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아쉬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일단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위협이 있다고 해도 눈앞에 있는 강하진을 놓고 그냥 가기 싫었다.
강하진을 보자마자 새끼손가락이 끊어질 듯 아팠다. 또한 팔이 뽑히는 것처럼 아팠다.
고통으로 인해 일어난 분노가 자연스럽게 아쉬의 머리를 꽉 채웠다.
“쉽게는 안 죽인다. 고맙지?”
아쉬가 그렇게 말하며 한 발 더 다가갔다.
훨씬 더 강력한 압력이 몰아쳤다. 강하진은 일단 버텼다.
“일단 손가락을 하나하나 다 부러뜨리고 뽑아 버릴 거야. 그 다음에 팔다리를 하나씩 뽑고.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충분히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할 테니까.”
아쉬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의 웃음에 어린 광기가 주변의 마력을 미친 듯이 뒤흔들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랫동안 살아 있게 되는 거지. 어때? 고맙지 않아?”
강하진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압력이 훨씬 줄어들었다.
“아무 말이나 막 내뱉는다고 그게 진짜 말이 되는 게 아니야. 가끔은 말인 줄 알고 쓰레기를 뱉기도 하니까. 지금 너처럼.”
“하! 이 새끼, 똥오줌 못 가리네. 그따위 말로 날 도발해봐야 괴로운 건 너야.”
아쉬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달려들었다.
꽈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강하진이 미리 준비해 둔 마력폭탄이 터진 것이다.
그냥 마력폭탄이 아니라 무려 8단계 마석을 이용해서 특별히 제작한 마력폭탄이었다.
그걸 감춰두고 있다가 아쉬가 달려드는 찰나에 맞춰서 터트린 것이다.
아쉬는 그 엄청난 폭발에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정신없이 충격을 해소했다.
하지만 그 폭탄으로도 아쉬를 다치게 하지 못했다.
물론 약간의 체력을 깎아내긴 했지만.
“깜짝이야. 준비한 게 이거였어?”
아쉬는 정말 깜짝 놀랐다. 마력폭탄이 설치된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의 감각을 속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아쉬의 눈빛 깊은 곳에 불안감이 깃들었다.
어쩌면 이 함정의 본질을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한 게 아닐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한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저놈만 잡으면 되는데.”
아쉬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강하진을 노려봤다.
“숨긴 폭탄 또 있으면 다 터트려 봐. 방금 것보다 두 배 정도 강하면 효과가 좀 있을 것 같은데.”
상대가 서두르길 원했다. 그래서 가진 패를 몽땅 뒤집게 하고 싶었다.
그래야 변수 없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테니까.
강하진은 그런 아쉬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아쉬는 바짝 긴장해서 모든 감각을 활짝 열었다.
그 순간 발 바로 아래쪽에서 기묘한 감각이 잡혔다.
“이런!”
아쉬가 다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발밑에 폭탄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폭발은 아쉬가 피한 곳에서 일어났다.
꽈아아아아앙!
마력이 가득 담긴 화염이 아쉬를 덮쳤다.
쩌저저저저저정!
아쉬는 마력을 일으켜 화염을 막아냈다. 이가 갈릴 정도로 강력한 폭탄이었다.
정말로 처음 터진 폭탄의 두 배 위력이었다.
꽈아아아앙!
꽈아아아앙!
아쉬가 발을 디디는 곳마다 폭탄이 터졌다. 대체 폭탄을 몇 개나 설치했단 말인가.
아쉬는 마력을 뿜어내 폭발의 충격을 해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라파시드의 패턴이 완벽하게 작동하는 그 순간을 말이다.
강하진은 천천히 그곳을 벗어났다.
마지막으로 남은 마력폭탄을 일제히 터트리면서.
꽈과과과과과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