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앙과 재앙 사이 2 >
강하진은 회귀 전의 기억을 차근차근 더듬었다.
회귀 전에 일어난 재앙은 총 세 번이었다.
그 중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이번에 아주 훌륭하게 막아냈다.
회귀 전에는 이미 첫 번째 재앙이 일어나면서 세계가 혼란에 빠졌으니까.
그래서 두 번째 재앙은 제대로 막아낼 힘이 모자랐다.
그때 가디언스가 나서지 않았다면 아마 심각하게 무너졌으리라.
사실 회귀 전에 두 번째 재앙을 어찌어찌 수습할 수 있었던 건 이번과 달리 재앙과 재앙 사이의 기간이 굉장히 길었기 때문이었다.
회귀 전에는 10년에 걸쳐 일어나는 일이 이번에는 고작 몇 년 사이에 몰아서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몇 년이 뭔가 채 2년도 되지 않았다.
회귀 전에 세 번째 재앙이 일어난 건 강하진이 죽기 2년 전이었다.
세 번째 재앙이 일어나고 2년 동안의 싸움이 그 전까지 한 8년 동안의 싸움보다 훨씬 많고 치열했다.
한데 벌써 여기까지 진행이 되다니 솔직히 좀 놀라웠다.
지금 일어나려고 하는 차원괴물의 등장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재앙 사이에 일어난 이벤트 같은 사건이었다.
물론 결코 쉬운 사건은 아니었다.
상당히 많은 괴물이 차원을 찢고 지구를 공격했으니까.
그래도 솔직히 재앙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모자랐다.
차원괴물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약한 건 아니었다. 그놈 한 마리를 상대하기 위해 각성자 여럿이 힘을 모아야 했다.
문제는 수가 너무 많았다는 점이었다.
‘그때 몇 마리나 나왔지? 한······ 백만 마리쯤 됐나?’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다.
지구 전체에 그 정도 숫자가 고르게 나타났다.
단숨에 나타난 건 아니었고, 순차적으로 차원을 찢고 나타났기 때문에 수만 마리씩 매일 나타나는 식이었다.
인간의 영역에 나타난 놈들은 철저히 박멸했지만, 괴물의 영역에 나타난 놈들은 결국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차원괴물은 차원과 차원의 틈새에 살아가는 존재였기에, 실제로 지구에 온 이후 힘이 지속적으로 줄어들더니 결국 소멸해 버렸으니까.
문제는 그로인해 마르바스의 침공이 훨씬 수월해졌다는 것이었다.
차원괴물은 존재만으로 차원과 차원과의 균열을 자극했다.
물론 회귀 전에는 그런 균열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지만.
이 모든 것은 회귀 후에 새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차근차근 유추해서 정리한 내용이었다.
그러니 틀릴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강하진은 대부분 사실일 거라 믿었다. 그래야 말이 되니까.
아무튼 지금 이 불안정한 흔들림은 차원괴물이 나타날 전조가 분명했다.
‘일단······ 경고부터 해야겠어.’
강하진은 사냥을 하려다 말고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문득 회귀 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그게 차원괴물이라는 걸 알려준 사람이 제이슨이었지?’
차원괴물이 차원을 찢고 나타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도 아닌데 그놈을 자연스럽게 차원괴물이라 부르게 된 건, 제이슨 때문이었다.
제이슨이 그놈을 차원괴물이라고 명명하고 대응책을 마련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테니 인간의 영역에 있는 괴물들만 정리하면 된다고 주장했고, 강하진은 그저 그 말을 믿고 싸웠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
또한, 제이슨은 차원괴물의 약점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모자란 전력으로도 차원괴물을 수월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물론 제이슨이 알아낸 약점보다 싸움을 통해 강하진이 알아낸 새로운 약점들이 더 효과적이긴 했지만, 그 약점들 역시 제이슨이 처음 약점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알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든 회귀 전에는 아무 의문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제이슨이 차원괴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그걸 직접 겪어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놈이 살던 세상도 우리하고 똑같은 이유로 망한 게 분명해.’
도시로 향하는 강하진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런데 그걸 미리 알고 있는 놈이 과연 이걸 이용할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약점까지 알고 있는 놈이?
절대 그럴 리 없다. 아마 제이슨은 이번 일을 어떤 식으로든 이용할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둬야겠어.’
진짜 최악은 이번에 일어날 일을 키우는 것이다.
저쪽에는 아쉬라는 등급 외의 존재가 있다. 그 아쉬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아직 전혀 모른다.
그저 저쪽 세상에서 지구로 넘어오는 균열을 만들었을 거라 짐작할 뿐이다.
아쉬가 방문한 이후 남극의 균열이 커졌다고 했었다.
그러니 균열과 관련된 힘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그런 힘을 가진 놈이 차원괴물이 이쪽으로 쉽게 넘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과연 못할까?
만일 차원괴물이 쉽게 넘어올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훨씬 강해지나? 그건 상관없긴 한데······.’
약점을 알고 있으니 강해지더라도 처리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수가 늘어난다면?
‘그건 확실히 문제야.’
수가 얼마나 늘어날지 모르지만 정말 그렇게 된다면 비상 상황이다.
강하진은 이내 도시를 향해 맹렬히 달려갔다.
조금이라도 빨리 대응책을 수립해야 한다. 차원괴물의 약점을 가디언스에 전달해야 하고 말이다.
마치 직선을 쭉 그은 것처럼 강하진이 도시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뒤를 백호가 신이 나서 쫓아갔다.
* * *
강하진은 화상회의를 통해 가디언스의 주요 인물들을 모두 모았다.
그리고 거기에 황수영과 정아연까지 추가했다.
다들 갑작스러운 강하진의 회의 요청에 당황스러운 모습이 역력했다.
이 정도로 강하진이 급하게 나서는 건 뭔가 큰 사건이 터질 거라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체 이번엔 어떤 일이 벌어지려고 이러는지 벌써 걱정이 되었다.
“일단 이번 일은 비밀을 철저히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사실 대대적으로 차원괴물의 약점을 공표하고 대비하게 하면 좋지만, 그랬다간 디펜더스에서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다.
만일 이쪽에서 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 나가면 더욱 지독한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되도록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차원괴물이라는 놈이 있습니다.”
강하진은 그 말을 시작으로 차원괴물에 대해 자세히 얘기했다.
그놈들의 약점까지 세세히.
직접 싸워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아낼 수 없는 약점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그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또 당황했다.
결국 그 의문을 참지 못하고 황수영이 물었다.
-설마 그 차원괴물이라는 놈과 직접 싸워보신 거예요?
강하진은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기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싸워보고 얻은 정보입니다. 그러니 잘 기억해 두십시오.”
다들 숙연해졌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기에 저런 경험을 한단 말인가.
그들이 보는 강하진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황수영이었다.
-제발······ 자기 몸도 좀 생각하세요. 도와줄 사람 여기 널렸잖아요.
그 말에 모두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진은 그들의 마음이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회귀 전에는 생각도 못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또, 회귀 직후의 자신을 떠올리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한데 어느새 이렇게 되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고 있었고, 그들과 마음을 나누었다.
아직도 그들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는 약간 의문이 생기지만, 그건 차츰 나아질 것이다.
회귀 전에 그 정도로 거하게 뒤통수를 맞았으니 트라우마가 남는 게 당연하니까.
그래도 정말 많이 좋아졌다. 요즘은 회귀 전에 자신이 했던 일이나 행동이 과연 올바른 방향이었을까에 대한 고민과 반성도 자주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는 강하진의 모습에 다들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그 차원괴물이라는 놈이 몇 마리나 나올까요? 마스터께서 이렇게 급하게 소집할 정도면 정말 많이 나올 것 같아서 무섭네요.”
김지혜의 물음에 강하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부분을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괴물이 쏟아져 나올 수도 있습니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괴물······.”
너무 모호했다. 하지만 열심히 준비하면 그만이다. 최대한 몇 마리를 막아낼 수 있을지 상정하고 그걸 넘어설 수 있도록 힘을 키우면 되는 일 아닐까?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윤경민이 입을 열었다.
-일단 마스터의 말씀을 통해 계산을 좀 해봤습니다. 현재 우리가 가진 힘을 총동원하면, 3천만 마리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하진이 아연한 눈으로 화면 속 윤경민을 쳐다봤다.
3천만 마리라니. 자신이 생각한 스케일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회귀 전에 100만 마리 정도 나왔으니 디펜더스에서 수작을 부리면 수백만 마리 정도로 불어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순차적으로 나타나면 모를까 한꺼번에 나타나면 세상이 뒤집힐 일이니까.
한데 3천만 마리라니.
하지만 윤경민의 말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그렇다는 거고, 우리가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하면 더 많이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일단 1억 마리를 목표로 두고 준비하겠습니다.
강하진은 더 할 말이 없어서 멍하니 윤경민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런 표정을 짓는 건 강하진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윤경민과 똑같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한테 맡기세요. 무조건 해낼 테니까.
강하진은 뭐라고 더 말하지 못하고 회의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사실 천만 마리 정도로 상정하고 준비하면 충분할 것 같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뭐······ 준비 철저히 하면 좋지. 그게 나중에 자연스럽게 세 번째 재앙을 상대할 힘으로 이어질 테니까.’
그래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차원괴물에 대한 가디언스의 준비가 그날 바로 시작되었다.
아주 철저하고 은밀하게.
* * *
“페이즈 드래곤의 심장, 더 남은 거 없나?”
제이슨의 물음에 아쉬가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페이즈 드래곤의 심장이 무슨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인 줄 알아? 다 썼어. 남극에 넣은 게 마지막이야.”
“아깝군. 그게 있었으면 차원괴물을 더 많이 끌어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2천만 마리면 충분해. 우리가 나서기 전에 지구 놈들이 그걸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쉬의 자신만만한 말에 제이슨의 표정이 굳었다.
“방심하지 마. 지구에는 가디언스가 있으니까.”
“가디언스라······.”
아쉬의 눈가에 비웃음이 빙글빙글 맴돌았다.
“몇 명은 쓸 만했지, 확실히. 한······ 100명?”
그렇게 말한 아쉬가 키득키득 웃었다.
제이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이 없을 듯했다.
아쉬는 여전히 비웃음이 담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중에서 제일 위험한 놈은 딱 하나고. 그렇지?”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위험한 놈이 강하진이라는 건 분명하니까.
“그러니까 그놈 하나만 막으면 되는 거 아닌가? 너희는 차원괴물을 막아야 하니까 거기 집중하고. 그렇지?”
제이슨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가 기대하던 말이 아쉬의 입에서 나왔다.
“차원괴물이 쏟아질 때, 강하진은 내가 맡는다.”
그렇게 말하는 아쉬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맺혔다.
기대감과 살기, 흉포한 분노가 뒤섞인 섬뜩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