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에 대하여 2 >
“자, 일단 이걸 한 번 보시겠습니까?”
레나트는 거대한 지도를 펼쳤다.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이었다. 세계지도를 나라별로 잘라놓은 지도였다.
한 변의 길이가 1미터가 넘는 큰 지도가 수십 장이었다.
레나트는 아공간에 자신의 자료를 모두 담고 다녔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연구를 하고자 해서였다.
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그동안 레나트가 연구하던 자료 중 하나였다.
강하진은 각 지도를 슥 훑어봤다.
지도에는 붉은 점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었다.
“이 붉은 점은 그동안 나타났던 거대 던전의 위치입니다.”
자세히 보니 각 점마다 날짜가 기록되어 있었다.
나타난 날짜와 닫힌 날짜였다. 아직 닫히지 않은 곳은 날짜가 하나뿐이었고.
이 정도 정보를 구하는 건 가디언스에서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자, 이번엔 이걸 보시죠.”
레나트가 그 말을 하며 아공간에서 꺼낸 것은 두꺼운 노트였다.
노트를 펼쳐보자, 그 안에는 낙서와 글귀가 가득했다.
제대로 정리된 게 아니라서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무슨 의미인지 얼른 알아차릴 수도 없었다.
레나트는 강하진 옆에서 노트 위의 낙서와 글귀를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했다.
“이건 로키산맥에 있던 유적에서 발견한 글귀와 문양입니다. 그리고 이건 아마존에서 나온 거로군요. 여기 이건 일본에서 최근에 보내주신 사진에서 찾아냈습니다.”
레나트는 노트를 휙휙 넘기면서 설명했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강하진을 바라봤다.
“자, 잘 보십시오. 먼저 일본부터 시작하죠.”
일본 지도를 펼친 레나트는 손가락으로 한 군데를 짚었다.
“여기가 바로 일본에서 발견한 유적이 있는 장소입니다.”
강하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나트가 노트의 한 부분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이 글귀와 문양은 위치를 표시하는 방식입니다.”
“위치?”
“방향과 거리를 뜻하는 거죠. 자, 이 문양을 분석하면 이쪽 방향을 뜻합니다. 이 글귀는 거리를 의미합니다. 그걸 해석하면 이 지점이 됩니다.”
레나트가 손가락으로 짚은 지점에는 붉은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이거 하나만이 아닙니다.”
레나트는 그 뒤로 일본 곳곳의 거대 던전을 글귀와 문양이 가리키는 위치와 대조해 주었다.
모두 정확히 일치했다.
일본에서 끝난 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정보도 확인했다. 아직 강하진이 확인하지 않은 유적 정보들이 많았는데, 그 안에서 비슷한 형식의 문양과 글귀를 모조리 모아서 위치를 특정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위치에 거대 던전이 나타났다.
“아직 거대 던전이 없는 곳도 있었습니다만······ 이 정도면 솔직히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강하진은 신기한 눈으로 노트 속에 표시된 위치를 하나하나 확인해봤다.
정말 신기하게도 다 맞아 떨어졌다.
레나트는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이 좌표의 쓰임새는 거대 던전이 나올 지점을 예측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강하진은 또 뭐가 있을지 궁금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레나트를 쳐다봤다.
“진짜는 이겁니다.”
레나트는 이번엔 지도를 바닥에 한 장씩 내려놨다. 물론 전부 이어붙인 건 아니고 중요한 몇 개만 붙였다.
“이걸 보면 거대 던전이 이미 나타났지만, 아직 좌표 정보가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 말에 강하진의 눈이 번득였다. 뭔가가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것이다.
레나트는 그런 강하진의 표정변화를 보고는 씨익 웃었다.
“마스터도 예상하셨군요. 맞습니다. 역으로 유적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거대 던전의 위치를 통해서요.”
강하진은 신기한 표정으로 지도와 노트, 그리고 레나트를 번갈아 쳐다봤다.
레나트는 기분 좋게 웃으며 아공간에서 노트 한 권을 또 꺼냈다.
“그래서 나온 결과가 이겁니다.”
그 노트 안에는 거대 던전의 위치와 기존 유적의 좌표를 종합해서 뽑아낸, 아직 미 발견된 유적의 정보가 가득했다.
“요즘 마스터의 관심이 많은 부분은 특별히 신경을 더 썼습니다.”
레나트는 그렇게 말하며 강하진이 들고 있는 노트를 휙휙 넘기더니 한 부분을 펼쳐서 보여줬다.
“사하라······!”
“사하라에도 유적의 흔적이 남아 있더군요. 위치는 아주 딱 찍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사하라에 열린 던전의 수가 아주 적습니다.”
강하진이 고개를 들어 레나트를 쳐다봤다. 레나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남극도 그렇죠.”
강하진은 반사적으로 다시 한 번 사하라의 유적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다.
그 유적 근처에 균열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새삼 레나트를 영입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강하진은 레나트가 돌아간 후에도 그가 건네준 자료를 밤새 탐독했다.
레나트가 준 정보는 거대 던전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각 유적에서 뽑아낸 특별한 정보가 가득했다.
유적에 쓰인 고대의 언어를 어렴풋하게나마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레나트가 유일했다.
레나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해석해 가면서 각각의 유적에 있는 고대 역사의 편린을 조금씩 찾아냈다.
그리고 마치 퍼즐을 맞추듯 그걸 하나하나 조립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멸망의 역사였다.
적의 침공과 그걸 막아내는 과정, 그리고 결국 멸망에 이르렀고,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의 과정이 각 유적에 조금씩 기록되어 있었다.
레나트는 그걸 뽑아내 조각 맞추기를 한 것이고.
강하진은 그걸 읽다가 깜짝 놀랐다.
가이아라는 존재가 유적의 역사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가이아는 과거의 지구를 멸망시킨 장본인이었다.
적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자, 세상을 무너뜨려버려 적과 함께 공멸한 것이다.
과거 멸망의 역사는 거기까지였지만, 강하진은 그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 가이아는 그 뒤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존재를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 시작되는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쩌면 이 가이아라는 존재는 당시의 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진실은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가이아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현재 나타나고 있는 걸 보면, 가이아가 과거 멸망의 역사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어쩌면 각 유적들도 그냥 우연히 남은 게 아니라 가이아의 의도가 반영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레나트가 발견한 이런 규칙성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좌표를 통해 거대 던전이 나타날 위치를 미리 찍어둔다는 게 말이 돼?’
놀랍게도 그 안에는 하와이에 나타났던 거대 던전의 좌표까지 있었다.
그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강하진이 예상하기에 이 좌표들은 아마 불안정한 지점을 표시한 듯했다.
물론 그렇게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걸 통해 균열의 위치를 찾아볼 가능성이 생겼으니 나름 의미가 있었다.
강하진은 이 정보들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그러면서 가이아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생겼다.
과연 정체가 무엇이며, 무얼 원하고 있을까?
가이아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것이 뭘 의미하며, 과연 자신의 회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강하진이 예상한 시나리오는 가이아라는 존재가 시간을 되돌렸다는 것이었다.
한 번 망한 세상을 되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가장 간단한 선택은 또 세상을 멸망시키고 다시 시작하는 거 아니었을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결국 떠오르지 않았다.
* * *
세계 곳곳에 새로 나타나기 시작한 거대 던전은 상당한 불안감을 조성했다.
거대 던전은 혼자 나타나는 법이 별로 없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뉴타입 던전을 동반했다. 또한 뉴타입 던전은 일반 던전 여러 개를 동반했고.
거대 던전 하나가 나타나면 그에 딸린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던전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셈이었다.
그래서 최근 전 세계의 각성자들은 던전을 닫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덕분에 불안감은 커졌지만,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아슬아슬하지만 안전이 유지되는 건 가디언스와 디펜더스 덕분이었다.
특히 최근에는 디펜더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아쉬와 제이슨, 제니퍼가 일본에서 복귀한 뒤,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거기에 스팬서도 기존처럼 사업에만 몰두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디펜더스와 함께 던전 공략에 나섰다.
가디언스의 활약도 상당했지만, 디펜더스가 워낙 활발하게 움직이니 상대적으로 약간 위축되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강하진은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끝날 싸움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꾸준히 성장하면 된다.
가디언스는 지속적으로 인원을 확충하고 있었다.
전투병사의 수가 매일 늘어났고, 당연히 그건 각 길드원의 전투력 향상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성장하다보면 결국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이렇게 훌쩍 사하라로 떠날 수 있는 것이고.
강하진은 유적에 대한 정보를 모두 머릿속에 새긴 다음, 곧장 사하라로 향했다.
사하라에서 유적으로 의심되는 지점은 총 세 군데였다.
그저 전부 모래로 뒤덮인 곳에서 어떻게 유적을 찾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굉장히 정확한 좌표를 알고 있으니, 그 좌표만 찾아가면 그만이었다.
강하진은 내심 사하라에 있는 유적도 남극에 있던 유적, [균열조절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예상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이번에 레나트 덕분에 얻은 지식에 의하면, 균열은 아무데나 생기지 않는다. 그건 던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지식은 유적에 기록된 내용에서 유추해낸 것이다. 그러니 그 유적을 만들었던 아득한 고대에도 관련 지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균열이 생길 가능성이 높은 곳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비를 해뒀음이 분명하다.
남극에 균열조절기를 만들어 두었던 것처럼.
한데 예상 좌표를 통해 발견한 첫 번째 유적은 균열과 전혀 관계가 없는 유적이었다.
[라에스의 대결계]
[결계의 대가 라에스가 설치한 결계 발생장치. 특정한 위치에 거대한 결계를 만들어낸다. 결계는 내부 마력을 흡수해 에너지를 유지한다.]
설명만으로는 좀 모호하지만,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장치인 듯했다.
어쨌든 시스템에 편입하고, 대가로 체력과 마력을 각각 200씩 얻었다.
또한 결계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얻었는데, 의외로 그 지식이 라파시드의 서와 닿아 있었다.
덕분에 라파시드의 서에 대한 이해도가 약간 더 깊어졌다. 아마 앞으로는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강하진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두 번째 유적을 찾아갔다.
한데 놀랍게도 두 번째 유적 역시 첫 번째 유적과 마찬가지로 라에스의 대결계였다.
얻은 대가 역시 똑같았고.
강하진은 설마하는 생각에 서둘러 세 번째 유적도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 역시 같은 유적이었다.
그러니까 똑같은 유적 세 개를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어둔 것이다.
강하진은 그제야 직감이 왔다.
“이거······ 이 중심에 있는 무언가를 보호하려고 만든 장치인 거 같은데?”
강하진은 각 유적의 위치가 표시된 사하라 사막의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그 셋의 중심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대충 어디쯤인지 위치를 가늠하고 얼른 그쪽으로 움직였다.
사막에서의 이동은 원래 쉽지 않지만, 유적 세 개를 찾는 동안 강하진은 제법 거기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처음 사막에 왔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목적지 근처에 도착한 강하진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 멀리 거대한 막사가 보였다. 그리고 그 막사 주변으로 크고 작은 다양한 막사와 트럭 등이 보였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을 오가고 있었다.
목표지점을 누군가 선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