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쉬의 분신 >
수백 마리의 괴물들이 꾸역꾸역 몰려왔다.
강하진의 스킬에 의해 다가온 괴물들은 강하진과 아쉬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달려들었다.
여기까지 오게만 하면 그 뒤로는 알아서 공격했다. 그것이 괴물의 몸에 새겨진 본능이었으니까.
강하진이 괴물들을 모은 건, 아쉬를 이용해서 가디언스 거점도시로 가는 괴물의 수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괴물이 어찌나 많이 몰려오는지 강하진과 아쉬는 제대로 된 싸움을 시작하지도 못했다.
아쉬도 그걸 알지만 여기서 몸을 빼거나 이 싸움을 나중으로 미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런 것까지 모두 고려해서 적을 썰어버리는 것이 아쉬의 스타일이었다.
“너처럼 짜증나는 놈은 처음이야. 넌 진짜 내가 가만히 안 둔다. 최고의 고통을 안겨준다고 약속하지. 믿어도 좋아.”
아쉬는 그렇게 말하며 연신 검을 휘둘렀다.
근처에 다가온 괴물들이 모조리 썰려 나갔다.
벽을 넘은 괴물도 다수 있었지만, 아쉬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공격을 몇 번 더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보통은 한 번 검을 휘둘러 수십 마리의 괴물을 죽였는데, 벽을 넘은 괴물이 섞여 있으면 그놈이 공격을 막아내서 한 번에 상황을 끝내지 못했다.
아쉬는 그런 상황도 굉장히 짜증스러웠다.
그리고 그 모든 짜증은 분노로 바뀌어 강하진에게 집중되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아쉬의 시선이 강하진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강하진은 느긋하게 괴물을 상대하면서 아쉬의 빈틈을 살폈다.
이대로 계속 상황을 유지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싸워야 하고 죽여야 할 상대였다.
강하진은 예리한 시선으로 아쉬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담았다.
지금 이건 그저 괴물을 모아서 수를 줄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아쉬의 실력을 조금이라도 파악하기 위한 수였다.
‘아마 저놈도 그걸 알겠지.’
아쉬 역시 강하진의 실력을 가늠하는 중이리라. 자신의 실력은 최대한 감추면서 말이다.
하지만 강하진의 노림수는 하나가 더 있었다.
아쉬는 저렇게 괴물을 상대로 시간을 끌지 말았어야 했다.
어쨌든 먼저 달려든 것은 아쉬였다.
아쉬는 강하진의 빈틈을 보고 달려든 게 아니라 방심을 노렸다.
괴물이 아쉬의 어깨를 깨물었다. 당연히 피하고 반격했어야 하는데, 그걸 무시하고 강하진을 공격한 것이다.
아쉬는 이번 공격에 상당한 힘을 담았다. 그래서 확신했다. 분명히 효과가 있을 거라고.
콰아아아!
아쉬의 검이 강하진을 둘로 쪼개 버렸다.
“뭐야!”
아쉬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강하진을 갈랐다고 여겼는데, 실제로는 강하진의 옆을 내리친 것이다.
‘내가 착각을 했다고?’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이런 걸 착각한단 말인가.
당황한 아쉬의 귀에 강하진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힘을 감추고 있었네. 하마터면 당할 뻔했어.”
아쉬는 소리가 난 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소리뿐 아니라 기척까지 확실히 느껴졌기에 그쪽에 강하진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콰아아아!
하지만 이번에도 아쉬의 검은 그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 직후, 아쉬의 등으로 강하진의 은밀한 공격이 다가갔다.
쉬아악!
아쉬는 다급히 몸을 앞으로 굴려 검격을 피한 후, 몸을 돌리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
아쉬의 검격에는 여전히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다.
마력의 파동이 주변을 갈기갈기 찢었다.
꽈아앙!
비로소 강하진의 검과 아쉬의 검격이 충돌했다.
아쉬의 눈에 힘을 모두 해소하지 못해 주춤주춤 물러나는 강하진의 모습이 보였다.
절호의 찬스였다.
아쉬가 빛살처럼 강하진을 향해 돌진했다. 마치 한 줄기 빛이 강하진을 꿰뚫는 듯했다.
촤아아악!
하지만 정작 꿰뚫린 건 근처에 있던 괴물들이었다.
허공을 공격한 거나 다름없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아쉬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런 식의 싸움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적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너······ 뭐야. 대체 뭐냐고!”
아쉬는 그렇게 외치며 다시 강하진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공격이 빗나갈 것까지 예상해 힘을 광범위하게 뿜어냈다.
콰콰콰콰콰콰!
거대한 마력이 검에서 쏟아져 전방을 휩쓸어 버렸다.
꽈아아앙!
이번엔 분명히 손맛이 있었다. 강하진 역시 뒤로 물러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타격을 입히진 못한 게 분명했다.
아쉬는 그걸 보면서도 씨익 웃었다. 상대할 방법을 찾았으니까.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몰라도 넌 이제 끝났어.”
범위 공격을 하면 된다. 힘이 좀 들긴 하겠지만 저놈 하나 끝장낼 여력은 충분했다.
아쉬의 검에 막대한 마력이 깃들었다. 거기에는 근원의 힘까지 약간이나마 섞여 있었다.
이 공격을 강하진이 막아낸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콰아아아!
거대한 힘의 폭풍이 전방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쉬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뭐야!”
자신이 뿜어낸 힘이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아쉬는 다급히 검을 휘둘렀다.
꽈과과과과과광!
온 힘을 다했던 회심의 일격이었는지라 그걸 막아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크아아아!”
아쉬는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쏟아지는 마력의 폭풍을 찢고 잘라냈다.
그러는 아쉬의 품으로 더없이 은밀한 기척이 파고들었다.
푹!
아쉬는 가슴을 꿰뚫고 들어온 검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콰아아아아!
가슴을 파고든 검에서 날카로운 마력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것은 아쉬의 내부를 난자했다.
강하진은 어느새 뒤로 쭉 물러난 뒤였다.
아쉬는 황당함과 허탈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하하. 이거 참······.”
온몸에서 피가 줄줄 쏟아지고 있었다.
“고작 내 힘의 반도 안 되는 놈에게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줄이야.”
아쉬는 의아한 표정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한 거냐?”
강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나누는 대화가 저 아쉬의 본체에 흘러가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아쉬는 털썩 주저앉았다. 몸에서 쏟아진 피가 워낙 많아서 피부가 창백해졌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이 정도로 분신이 소멸했다고? 정말 이상한데?’
죽긴 하겠지만 이 정도로 소멸하진 않는다. 대체 어떻게 한 걸까?
“너······ 혹시 전에 싸웠던 내 분신, 태운 거냐?”
강하진은 그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쉬가 뭘 물어보는 건지 알지만 굳이 알려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저 죽이기만 한다고 끝이 아니라는 건 지난번에 경험해봐서 충분히 알고 있었다.
강하진은 아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단숨에 목을 날려 버렸다.
털썩.
아쉬가 바닥에 쓰러졌다.
강하진은 [절단]을 이용해 아쉬와 시스템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어마어마한 힘이 몰아치며 강하진의 레벨이 쭉쭉 올라갔다.
그리고 어느새 나타난 백호가 아쉬의 시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꽈드득! 꽈드득!
아쉬의 시체를 먹는 백호의 털에서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강하진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주변에 괴물이 잔뜩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 괴물들을 처리할 생각이 안 들었다.
강하진의 마음을 짐작하는지 백호가 나서서 주변 괴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강하진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기력을 회복했다.
솔직히 방금 싸움은 도박수가 통했다.
[매혹의 향]으로 괴물을 불러 시간을 끈 다음, 그 시간을 통해 라파시드의 패턴을 그렸다.
만일 아쉬가 괴물을 무시하고 곧장 강하진에게 달려들었다면 아마 뾰족한 수 없이 당했을 것이다.
아쉬는 그 정도로 강했다.
공격 한두 번 막기가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그게 고작 분신이라 이거지?’
새삼 아쉬의 본체와 싸울 일이 걱정됐다.
강하진은 힘내서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괴물을 한 마리라도 더 죽여서 레벨을 최대한 올려야 한다.
다시 강하진이 움직이자, 백호가 돌아와 아쉬의 남은 시체를 뜯어먹었다.
강하진은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여 괴물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 * *
끝이 없을 것 같던 괴물의 공세가 끝났다.
총 다섯 차례에 걸친 공세였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에, 두 번째보다 세 번째에 더욱 많고 강한 괴물이 몰려들었다.
그러다보니 갈수록 힘들었고, 피해가 없이 괴물의 공세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죽는 각성자도 생겼고, 많은 각성자가 다쳤다.
하지만 단 한 마리의 괴물도 도시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건 굉장히 의미 있는 결과였다.
가디언스의 거점도시에 사는 일반인들은 이제 이곳의 안전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물론 아예 걱정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믿음이 생겼다.
가디언스가 자신들을 반드시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김지혜는 활기차게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각성자들을 둘러보며 근처에 있던 커다란 돌에 걸터앉았다.
이번 괴물의 공세를 막으면서 도시에 쌓인 괴물 사체와 마석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막대한 돈을 벌게 될 것이다.
또한 그 돈은 이 도시를 더욱 살찌울 것이다.
‘도시가 더 성장할지도 모르겠어.’
도시가 더 커지면 괴물로부터 보호하는 건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그만큼 더 많은 각성자들이 도시로 들어올 테니 어쩌면 더 안전해질 수도 있었다.
‘다른 나라의 거점들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김지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회의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과연 다른 나라의 거점을 제대로 지켜냈을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강하진과 백호가 도시 주위를 돌면서 강력한 괴물들은 어느 정도 처리한다고 했다.
그것까지 감안하면 다른 거점이 어떻게 되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앉아 쉬고 있던 김지혜의 눈에 저 멀리서 다가오는 강하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강하진에게 다가갔다.
강하진의 몸은 괴물의 피와 체액으로 뒤덮여 있었다. 반면 강하진 옆에서 사뿐사뿐 걸어오는 백호는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마치 방금 목욕이라도 하고 온 듯했다.
‘뭐지?’
김지혜는 강하진과 백호를 볼 때 뭔가 묘한 위화감이 들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김지혜 씨. 무사하셨군요.”
강하진의 말에 김지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덕분에요. 고생 많으셨죠?”
강하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람 있는 고생이었습니다.”
정말 보람 있었다. 아쉬의 분신을 처리한 덕분에 레벨이 무지막지하게 올랐으니까.
두 번째 벽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지는 않았다.
물론 앞으로 레벨을 올리려면 웬만한 레벨의 괴물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갈 테니 그 부분은 좀 생각해 봐야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좀 달라지신 거 같아요. 마스터도······ 그리고 백호도요.”
강하진이 씨익 웃었다.
“강적 하나를 처리했거든요. 그 대가로 레벨을 좀 올렸습니다. 백호도 그렇고요.”
김지혜의 시선이 자꾸 백호에게로 향했다.
강하진의 분위기도 확실히 달라졌지만, 백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왠지······ 더 멀어진 거 같네요.”
분명히 얼마 전에는 조만간 백호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레벨이야 많이 차이나지만, 실제 강함은 레벨만큼은 아니라고 믿었다.
한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백호는 어느새 또 따라잡기 어려운 곳으로 훌쩍 도망쳤다.
“김지혜 씨도 금방일 겁니다. 벌써 이만큼이나 오셨지 않습니까.”
김지혜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그렇죠. 솔직히 여기까지 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치료사 길드에서 나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암시장에서 부스러기 마석을 팔아 연명하던 시절 말이다.
그때 강하진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김지혜는 생각도 하기 싫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 들어가서 좀 쉬겠습니다. 김지혜 씨도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두시죠. 언제 또 괴물이 몰려올지 모르는데.”
강하진은 그 말을 하고 도시로 들어갔다.
김지혜는 그런 강하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중얼거렸다.
“또······ 괴물이 몰려온다고?”
김지혜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저 멀리 폐허가 펼쳐진 곳을 바라봤다.
오늘 있었던 괴물의 공세가 바로 또 이어진다면 아마 버티기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