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옥문이 열리다 2 >
‘저건 진짜 미친놈이야.’
제니퍼는 괴물들을 상대로 날뛰는 아쉬를 힐끗 쳐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정확히는 아쉬가 아니라 아쉬의 분신이었지만, 어차피 아쉬와 똑같은 놈이었다. 힘만 조금 모자랄 뿐.
아쉬는 괴물들을 상대로 맹활약 중이었다.
하지만 진짜 아쉬의 힘에 비하면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제니퍼는 짜증이 좀 난 상태였다.
아직 그녀의 힘은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았다. 혈백호와 계약이 끊어진 여파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래서 무리하면 안 되는데, 어쩔 수 없이 여기에 오게 되었다. 상황을 이해했으니까.
한데 아쉬 저 미친놈은 그런 것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니 팔뚝으로 만든 그 강력한 분신을 가디언스 쪽으로 보낸 거 아니겠는가.
그런 강력한 놈이 여기 있었다면 피해를 지금보다 훨씬 더 줄일 수 있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만만치 않네.’
제니퍼는 스페인 기지의 상황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막아내긴 막아내겠지만, 이 기지를 과연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렇게 피해가 큰데 굳이 여길 유지해야 할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아쉬를 깨워서 페이즈 드래곤의 심장조각을 넣어 균열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더 크게 확장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 균열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물론 예전보다야 나았지만, 아마 앞으로 일본처럼 불안정한 지역이 또 나타나긴 어려울 것이다.
이곳 일본은 각성자들에게는 굉장히 소중한 사냥터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반드시 지켜야 한다.
새삼 짜증이 났다. 원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이렇게 고생할 일도, 고민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균열이 안정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물론 이젠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만, 딱히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일단 디펜더스의 서포터들을 동원해서 유적을 찾고 있었다. 물론 어떤 유적이 과거에 망한 시스템의 흔적인지 알 수 없으니 최대한 많은 유적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걸 어떻게 할 건지는 일단 유적부터 확보한 다음 해결할 문제였다.
유적을 다 부숴버리든, 아니면 그 안에서 답을 찾든.
일단 눈에 보이는 괴물들은 다 처리했다.
제니퍼는 들끓는 마력을 안정시키며 차분히 심호흡을 했다.
아쉬가 제니퍼에게 다가갔다.
“너, 너무 약해진 거 아냐? 왜 이렇게 힘을 못 써?”
비웃음이 약간 담긴 어조였다. 하지만 제니퍼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할 생각이 없었다.
아쉬는 안 건드리는 게 정답인 놈이다.
제니퍼가 대꾸하지 않자, 아쉬가 피식 웃었다.
“계약이 끊어졌다더니, 그 때문인가? 하여튼 칠칠치 못한 건 여전하군.”
제니퍼가 발끈한 표정으로 아쉬를 노려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너 정도라면 얼마든지 놀아줄 테니 생각 있으면 언제든 말해.”
“하아.”
제니퍼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힘, 되찾아야 하지 않겠어?”
이어진 아쉬의 말에 제니퍼가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바라봤다.
“너 계약 끊어진 이후로 줄어든 힘이 돌아오지 않지? 레벨도 더 이상 안 오르고. 아니야?”
제니퍼가 굳은 표정으로 아쉬를 노려봤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자, 어때? 생각 있어?”
없던 생각도 나게 할 정도로 유혹적인 말이었다. 제니퍼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의 눈빛이 음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리고 그 눈빛 깊숙한 곳에서 음험함이 번득였다.
물론 제니퍼는 그것까지 보지는 못했다.
제니퍼의 어깨를 거칠게 감싼 아쉬가 막사 쪽으로 걸어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는 가디언스의 거점도시가 있는 방향을 노려봤다.
“하, 이거 진짜······.”
제니퍼가 의아한 표정으로 아쉬를 바라봤다.
아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휘휘 젓고는 다시 제니퍼에게 집중했다.
더 급한 건 이쪽이었으니까.
* * *
가디언스의 거점도시에 머무는 각성자들은 첫 번째 괴물의 공격을 아주 가뿐하게 막아냈다.
물론 100명의 가디언스가 가장 큰 활약을 하긴 했지만, 다른 각성자들의 성과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그동안 꾸준히 사냥을 하고 경험을 쌓으면서 일본에 오기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아무리 100명이나 되는 강자가 있다고 해도 사방에서 몰려오는 괴물을 그들이 전부 맡을 수는 없었다.
어찌되었건 빈 곳이 나오기 마련이었는데, 그 빈 자리를 다른 각성자들이 아주 훌륭하게 메웠다.
거점도시를 완벽하게 지켜낼 수 있었던 건 그런 각성자와 가디언스의 힘도 중요했지만, 강하진과 백호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하진과 백호는 이곳으로 오는 괴물 중에서 벽을 넘은 강력한 놈들만 골라서 사냥했다.
물론 거점도시에 닿기 전에 멀찍이서 사냥했기에 도시의 각성자들이 그런 괴물을 마주칠 일은 없었다.
강하진은 그렇게 괴물을 사냥하면서 틈나는 대로 버프까지 걸어주었다.
그러니 괴물의 공격을 막아내는 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공격을 잘 막아냈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강하진은 도시가 보이는 곳에 앉아 백호와 함께 쉬고 있었다.
그러면서 태블릿으로 현재 일본의 상황을 수시로 확인했다.
위성을 통해 확인하기도 하고, 명인혁과 윤경민이 틈날 때마다 보내주는 보고서도 읽었다.
“결국 영국이랑 스페인만 남았네.”
나머지 세 군데 거점은 첫 번째 괴물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미리 포기한 나라는 피해라도 줄일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각성자들의 피해가 상당했다.
영국과 스페인이 남은 이유는 디펜더스 때문이었는데, 윤경민은 그 두 거점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영상을 확보해서 보내주었다.
“휘유, 대단하네.”
강하진은 그걸 보고 크게 감탄했다.
역시 제이슨은 명불허전이었다. 회귀 전에 세계 최고 레벨의 사나이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물론 지금 싸우는 모습을 보니 회귀 전에 강하진이 알고 있던 제이슨보다 훨씬 강했다.
그건 제니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아쉬라는 존재는 정말 대단했다.
“이것도 분신이겠지?”
강하진의 말에 옆에서 함께 영상을 지켜보던 백호가 뺨을 비볐다.
어떤 것이 아쉬의 본체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제이슨과 함께 있는 놈이 본체였다.
그놈이 훨씬 더 강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영국 쪽 거점이 스페인 쪽보다 피해가 덜했다.
“두 번째 괴물 무리가 곧 올 텐데, 과연 그것까지 막아낼 수 있으려나?”
제이슨과 제니퍼, 아쉬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무리 대단한 괴물이 몰려온다고 해도 저들은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만 살아남아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른 각성자들이 전부 죽어버리면 거점으로써의 역할을 못할 텐데.
사람들이 사라지고 며칠만 방치되어도 그곳은 괴물이 장악해 버릴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쌓아야 하는 것이다.
그걸 과연 영국이나 스페인 정부가 흔쾌히 허가해 줄까?
“슬슬 두 번째가 시작될 모양이네.”
테블릿을 통해 위성 촬영 영상을 확인한 강하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으로 몰려오는 어마어마한 수의 괴물들이 보였다.
“백호, 가자.”
강하진이 달려가자, 백호가 그 뒤를 따라갔다.
백호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더니 이내 강하진을 쭉 앞질러 나갔다.
그리고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거대한 괴물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었다.
벽을 넘은 괴물이었다.
강하진은 벽을 넘은 다른 괴물을 찾아서 달려갔다.
얼핏 보이는 놈만 해도 다섯이나 있었다.
확실히 일본이 이상하긴 이상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벽을 넘은 괴물을 거의 찾을 수 없는데 유독 일본에만 많이 나타나니 말이다.
포식을 통해 벽을 넘은 괴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애초부터 벽을 넘은 채 던전에서 나온 괴물도 제법 많았다.
지금 달려오는 괴물들이 바로 그랬다.
강하진은 일단 백호가 맡지 않은 네 마리 괴물을 향해 각각 공격을 던졌다.
꽈르르릉!
낙뢰를 비롯해 다양한 스킬이 괴물들에게 작렬했다.
그렇게 어그로를 끌어 괴물들의 시선을 집중한 강하진은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괴물을 향해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꽈과과광!
괴물이 검을 막으면서 강렬한 폭음이 울렸다. 그리고 충격파와 함께 마력폭풍이 일어나 주변을 휩쓸었다.
변변치 않은 괴물들이 거기에 휩쓸려 죽거나 다쳤다.
그리고 그렇게 공격을 받은 괴물들이 또 강하진에게 달려들었다.
강하진은 되도록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많은 괴물의 어그로를 끌어냈다.
여기서 최대한 잡아줘야 나중에 거점도시에서 싸우는 각성자들이 조금이라도 안전할 테니까.
강하진의 검에 괴물들이 하나둘 목숨을 잃었다.
백호 역시 처음 공격하던 괴물을 죽이고 두 번째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게 벽을 넘은 네 마리 괴물을 죽이고 마지막 하나가 남았을 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섬뜩한 느낌이 강하진을 덮쳤다.
강하진은 괴물에게 휘두르려던 검을 비틀어 방향을 바꿨다. 그러면서 거기에 더욱 많은 힘과 마력을 담았다.
꽈아아아앙!
엄청난 폭발과 함께 마력폭풍이 주변을 휩쓸었다.
강하진은 강한 충격 때문에 뒤로 쭉 물러나야만 했다.
그리고 검을 들고 표표히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쉬?”
나타난 사람은 아쉬였다. 예전처럼 벌거벗고 있는 게 아니라 제대로 옷을 차려 입었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예전의 벌거벗은 아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했다.
‘그때랑은 많이 다른데?’
더 강해진 건 둘째 치고, 그때보다 훨씬 생동감이 넘쳤다.
솔직히 그때는 인간 같은 느낌보다는 인형 같은 느낌이 더 강했으니까.
“이렇게 보니까 확실히 알겠네.”
아쉬의 미소가 음험해졌다.
“그 표정, 마음에 안 들어. 어설픈 분신 하나 이겼다고 진짜 날 이긴 것 같아?”
아쉬가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짜증과 함께 휙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강한 마력이 검에서 뿜어져 나오며 주변 괴물들을 쫙 갈라버렸다.
수십 마리 괴물들이 그 일검에 두 동강 났다.
“귀찮은 날파리 좀 정리했는데, 어때? 제법 볼 만하지?”
아쉬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강하진에게 다가갔다.
“저기 있는 고양이도 불러. 너 혼자서는 안 되잖아. 안 그래?”
강하진은 백호를 힐끗 쳐다봤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계약 관계이기 때문에 생각을 전하는 것 정도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백호가 강하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휙 사라졌다.
“어라? 저놈 뭐야? 설마 주인 내버려 두고 도망치는 거야? 무슨 이런 어설픈 계약 관계가 다 있어?”
강하진은 아쉬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백호는 백호대로 할 일이 있었다. 이제 강하진은 저 아쉬의 분신 때문에 괴물과 싸울 수 없게 되었으니, 그 빈 자리를 백호가 메워줘야 한다.
강하진이 아쉬를 향해 검을 겨눴다.
예전보다 훨씬 강한 아쉬였지만, 그건 강하진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아쉬의 분신과 싸우면서 아쉬의 전투방식도 많이 체득했다.
물론 그때처럼 싸워 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 이거 자존심 상하네. 그 눈빛은 뭐지? 설마 진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거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쉬가 강하진에게 달려들었다.
쩌어어어엉!
아쉬의 검격을 강하진이 막아냈다.
“크윽!”
강하진은 이를 악물었다. 압력이 너무 강했다.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내상을 입은 것이다.
화아악!
치료폭탄과 함께 내상이 사라졌고, 강하진의 위로 버프들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아쉬의 눈빛이 변했다.
“이놈 봐라?”
버프의 힘이 생각보다 대단했다. 이 정도면 확실히 새끼손가락이 당해내기 어려울 만했다.
“손목 정도는 되겠는데?”
아쉬가 다시 달려들었다.
꽝! 꽝! 꽝! 꽝! 꽝!
연이어 폭음이 울렸다. 불꽃이 튀었고, 마력이 요동쳤다.
그리고 싸우는 두 사람 주변으로 괴물들이 모여들었다.
괴물들은 마치 뭔가에 홀린 듯이 두 사람을 공격했다.
아쉬가 그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놈들.”
원래 강한 힘과 힘이 격돌하는 싸움터로는 웬만한 괴물은 다가오지 않는 법이다.
최소한 벽을 넘은 괴물이라야 빈틈을 노리고 다가오지 그 이하의 괴물들은 피하기 마련이었다.
괴물들이 이런 이상 반응을 보일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너냐?”
아쉬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강하진을 노려봤다.
이런 일이 벌어지려면 스킬을 써야만 한다. 아마 강력한 어그로를 끄는 스킬을 썼으리라.
촤아악! 촤아악!
아쉬는 강하진을 노려보면서도 달려드는 괴물을 향해 검을 휘둘러 괴물들을 갈라 버렸다.
주변이 괴물의 피와 체액으로 뒤덮였다.
강하진이 내뿜은 강력한 [매혹의 향]이 멀리 있는 괴물들까지 모조리 이쪽으로 모으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수의 괴물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그걸 본 아쉬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
“곱게 죽을 생각은 마라.”
아쉬의 검에 삼엄한 기운이 어렸다.
그리고 그걸 보는 강하진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