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거벗은 아쉬 2 >
아쉬와 제이슨은 기지를 나섰다.
가기 전에 디펜더스의 각성자들에게 근처에 있는 괴물을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거대 던전은 다녀와서 아쉬와 함께 닫아야 한다.
저들만으로도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비효율적이다. 아쉬가 나서면 혼자서도 던전을 닫을 수 있는데, 굳이 저들을 던전에 투입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각성자들이 기지 주변으로 흩어지는 걸 보고서 출발했다.
처음에는 느긋했다.
“이야, 상대가 누군지 몰라도 정말 대단하네.”
아쉬의 감탄에 제이슨이 물었다.
“어느 정도인데 그러는 거지?”
“내 분신과 막상막하라니까? 뭐······ 돌아가는 꼴을 보니 조만간 결판이 날 거 같지만.”
“분신의 눈으로 상대를 볼 수 있는 건가?”
제이슨의 물음에 아쉬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분위기만 느끼는 거야. 연결이 그렇게 강하지 않거든. 연결이 너무 강하면 혹시 분신이 죽었을 때, 내가 받는 타격이 너무 커. 난 안전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거 알잖아.”
제이슨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안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놈이 검증도 안 된 균열에 뛰어들 생각을 했다는 게 너무 웃기지 않은가.
물론 아쉬는 철저히 계산한 거라고 우기지만, 동료 중에서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이슨이 보기에는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이곳 지구에 오게 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분위기가 어떤데?”
“팽팽하긴 한데, 기술적으로 빈틈이 너무 많아서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있어.”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는 건가?”
“분신은 나랑 똑같은 놈이야. 생각하는 것부터 습관, 싸우는 방식까지 전부. 그냥 힘만 좀 모자랄 뿐이지.”
그러니까 희미한 연결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를 토대로 상황을 유추해 냈다는 뜻이었다.
제이슨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아쉬를 바라봤다.
저런 건 머리가 나쁘면 절대 할 수 없는 분석이었다. 아쉬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따위 눈으로 볼 거면 눈 돌리지? 뽑아버리고 싶어지니까.”
“성질 하고는.”
제이슨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쉬 같은 미친놈은 건드리면 안 된다. 이런 놈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렇게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아쉬가 갑자기 걸음을 뚝 멈췄다.
“왜 그래?”
제이슨이 의아한 눈으로 아쉬를 바라봤다.
아쉬는 한껏 일그러진 표정으로 왼손을 감쌌다.
“크윽.”
“왜 그러냐니까?”
“조용해! 아파 죽겠으니까!”
아쉬의 뺨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로 아픈 모양이었다.
천천히 손을 떼자, 왼손 새끼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걸 본 제이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분신이 죽은 거야?”
저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 분신의 죽음뿐이었다. 아니, 그냥 죽어선 저러지 않는다. 소멸된 것이 분명했다.
“이 개자식을 내가 절대 그냥 안 둔다.”
아쉬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분신이 있던 방향을 노려봤다.
“나 먼저 갈 테니까 알아서 쫓아와.”
그 말을 남긴 아쉬가 그대로 돌진했다.
제이슨은 눈살을 찌푸린 채 멀어져가는 아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이슨은 아쉬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강하진은 가디언스 거점도시로 돌아왔다.
그리고 당분간 아무도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숙소로 들어가 잠에 빠졌다.
이번 싸움은 너무 힘들고 위험했다.
전뇌화는 물론이고 천사의 반지까지 써야 했다.
천사의 반지로 회복한 다음에도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넘나드는 싸움을 이어간 뒤에야 간신히 이길 수 있었다.
아니, 이겼다기보다는 거의 동귀어진에 가까웠다.
치료스킬이 아니었다면 거기서 벌거벗은 아쉬와 같이 죽었을 것이다.
강하진은 벌거벗은 아쉬를 죽이고 그것을 완벽하게 소멸시켰다.
그냥 소멸시킨 게 아니라 시스템을 이용해서 소멸시켰다.
시스템 침략자에 속한 [절단]스킬까지 썼다.
벌거벗은 아쉬를 저쪽 시스템에서 분리해낸 것이다.
싸움에서 이기고 죽이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분리해낸 순간 그걸 알 수 있었다.
아무튼 그 덕분에 레벨이 잔뜩 올랐다.
하지만 레벨업은 말 그대로 덤일 뿐이었다. 진짜는 벌거벗은 아쉬와 싸운 경험 그 자체였다.
강하진은 푹신한 침대에 누워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까의 싸움을 차근차근 복기했다.
이번 싸움 한 번으로 족히 두 배는 더 강해졌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 정도로 대단한 경험이었다.
서서히 잠에 빠져드는 강하진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강하진은 꿈에서 벌거벗은 아쉬와 수없이 반복해서 싸우고 또 싸웠다.
* * *
제이슨은 저 멀리 보이는 아쉬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도착해보니 아쉬가 이미 한바탕 난동을 부린 뒤였다.
주변 잔해들이 남아난 게 없었다.
근처에 분명히 무너진 건물이나 뒤집힌 도로 같은 것들이 있었을 텐데,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쉬를 중심으로 반경 1킬로미터 정도가 아무것도 없는 평지로 변해 버렸다.
“괜찮아?”
제이슨의 물음에 아쉬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지금 이게 괜찮아 보여?”
아쉬가 왼손을 들었다. 여전히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다시 만들면 되잖아.”
그동안 아쉬가 분신을 만들어 쓰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봤기에 신체 일부를 떼어내 분신을 만들더라도 그 신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도 그러고 싶어. 분신이 완벽하게 소멸하지 않았다면 다시 만들었겠지.”
제이슨이 흠칫 놀라 아쉬를 바라봤다.
“설마······ 다시 못 만드는 건가?”
아쉬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완벽하게 잃어버렸다.”
이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재생할 수 없었다. 설사 재생한다고 해도 진짜 새끼손가락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저 모양만 갖춘 가짜일 뿐.
제이슨은 그제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래서 여길 이렇게 만든 건가?”
“그래서가 아니라 찾은 게 사라져서 그런 거야.”
“찾은 게 사라졌다고? 그 구멍?”
“그래. 분명히 여기 있었어. 그래서 분신을 만든 것이기도 하고. 지켜야 하니까. 그런데 거짓말처럼 없어졌어.”
“정말 없어진 거 맞나? 누군가 스킬로 감춰놓은 게 아니라? 잘 찾아봤어?”
“그딴 소리 할 시간에 너도 찾아! 난 이제 모르겠으니까!”
아쉬가 버럭 소리치자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를 면밀히 탐색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쉬가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처음 그걸 찾을 때도 그냥 찾은 게 아니라 힘을 써서 찾았었지?’
원래는 없었다. 한데 근원의 힘이 섞인 마력의 폭풍을 확 쏟아내자 비로소 보였다.
‘아까는 분명히 그랬는데······ 왜 지금은 안 되는 거지?’
이 근처가 평지로 변한 건 근원의 힘을 잔뜩 섞은 마력을 방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감춰진 구멍이 다시 나타날 줄 알았다.
한데 아무리 해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쉬는 아까 구멍이 있던 자리로 갔다.
“분명히 여기였는데······.”
구멍이 있던 자리를 파보기도 하고 근원의 힘을 한계까지 쏟아내 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성과 없이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아쉬가 제이슨에게 물었다.
“그 통신기에 혹시 추적 장치는 안 달려있나?”
“달려있지.”
그냥 추적 장치가 아니라 순수한 전자장비로 만든 추적 장치와 마력과 전자장치를 섞은 마력공학을 통해 만든 장치, 그리고 순수한 마력을 이용한 장치까지 세 개를 달아 놨다.
“작동은?”
“안 돼.”
“추적 장치가 망가진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신호가 닿지 않는 어딘가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지.”
“신호가 닿지 않는 어딘가?”
“아공간.”
아공간은 공간이 비틀려 이곳과 아예 분리된 별개의 장소였다. 당연히 그 어떤 신호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럼 혹시 모르니까 계속 추적해. 언젠가 아공간에서 나올 날이 있겠지.”
“그래서 찾으면?”
아쉬가 섬뜩하게 웃었다.
“당연히 박살 내야지. 내 손가락을 가져간 놈을 내가 가만히 둘 거 같아?”
제이슨은 골치 아픈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발 사고 치지 마라. 우리 그렇게 좋은 상황 아니야. 대책 없이 날뛰다간 일 다 망칠 수도 있다고.”
“지구에서 날 당해낼 수 있는 놈이 있을 거 같아? 내가 다 부숴버리면 돼.”
“일대일로 널 이길 놈은 없겠지. 하지만 여럿이서 동시에 덤비면? 여기 넘어오기 전에 있었던 일, 잊은 건 아니겠지?”
아쉬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짜증나니까 닥쳐.”
“닥치게 만들어줘야 닥치지.”
“가만히 기다릴 테니까 닥치라고.”
“후우. 계획대로 가자, 계획대로. 다 끝나면 부수든 박살을 내든 마음대로 해.”
“오래는 못 기다린다.”
제이슨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하지만 굳이 얘기를 덧붙이지는 않았다.
‘이거 원 아슬아슬해서 살겠나.’
스트레스가 온몸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 * *
강하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잠을 푹 잤는데도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10시간이나 지났다.
10시간 동안 한 번도 안 깨고 잔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피곤한 이유는 전부 꿈 때문이다.
내내 싸우는 꿈을 꿨다.
상대는 벌거벗은 아쉬. 벗은 남자와 수없이 싸우는 꿈을 꿨는데 피곤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닐까?
아무튼 피곤하긴 해도 많은 걸 얻었다.
진짜 싸움만큼은 아니지만, 꿈에서 싸웠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보통 꿈은 잘 기억나지 않고 금방 잊기 마련인데, 이번 꿈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도 한 것 같은 효과를 봤다.
강하진은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벌거벗은 아쉬와 싸웠다.
아마 다시 벌거벗은 아쉬와 싸운다면 이번에는 훨씬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진짜 아쉬와 싸운다면 얘기가 많이 달라지겠지만.
침대에서 일어난 강하진은 대충 씻고 창가로 갔다.
숙소가 가디언스 지사 빌딩 꼭대기 층에 있었기에 창밖으로 도시 전체가 보였다.
활기찬 도시였다.
어젯밤에 생긴 건지 도시 바깥쪽에 거대 던전이 몇 개 있었다.
아마 조만간 누군가 나서서 닫을 것이다.
불안정한 일본은 각성자들에게는 성장의 발판이 되어줄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그건 강하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레벨을 더 올려야겠어.”
강하진은 서둘러 두 번째 벽을 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벌거벗은 아쉬와 싸우면서 힘에 대한 갈망이 훨씬 커졌다.
다음번에는 훨씬 더 강한 아쉬와 싸우게 될 것이다.
그때 제대로 하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져야 한다.
강하진은 결연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다시 레벨업을 할 시간이 돌아왔다.
* * *
거대 던전이 우수수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인 일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각국 정부들이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이 찾은 건 당연히 가디언스와 디펜더스였다.
그 둘을 찾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책이었다.
한동안 고자세로 가디언스와 디펜더스를 약간 멀리하던 나라들은 안절부절 못했다.
반면 가디언스에 협조적이던 나라들은 우선권을 얻어 빠르게 던전을 닫고 안정을 되찾았다.
비협조적이던 나라들 역시 후순위로 밀리긴 했지만 가디언스는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순서는 가디언스 마음대로이기에 각 나라에서 가디언스에 로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가디언스가 전 세계에 열린 거대 던전과 싸우고 있을 때, 일본에는 지옥문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