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레벨업-175화 (175/200)
  • < 벌거벗은 아쉬 1 >

    아쉬는 자신의 분노를 힘으로 풀어냈다.

    콰아아아아아아!

    아쉬를 중심으로 거대한 마력의 폭풍이 일어났다. 그 폭풍은 주위를 모조리 휩쓸어 버렸다.

    그 마력의 폭풍에는 근원의 힘도 약간 포함되어 있었다.

    아쉬는 근원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최상위 전사였으니까.

    파삭!

    그 힘의 폭풍에 뭔가가 깨졌다.

    하지만 아쉬는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뒤로도 한참동안이나 마력 폭풍이 이어졌다.

    “후우우우.”

    분노를 담아 힘을 쏟아내고 나자, 그나마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냉정을 약간 되찾은 아쉬는 그제야 주변에서 느껴지는 묘한 감각에 눈가를 꿈틀거렸다.

    감각을 건드리는 걸 찾아보니 그곳에 정말 희미한 구멍 하나가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구멍이었다. 균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고 미약했으니까.

    “이거였군.”

    아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렇게 찾기 쉬운 곳에 있었는데 왜 그걸 못 찾았을까?

    “하긴, 마르바스가 이런 걸 대충 던져뒀을 리가 없지. 생각할수록 용의주도한 놈이야.”

    아쉬는 자신이 이걸 찾지 못한 것이 마르바스가 작정하고 감췄기 때문이라 여겼다.

    또한 자신이 방출한 분노의 힘 때문에 가림막이 사라진 것이고 말이다.

    “역시 사람은 화를 참고 살면 안 된다니까.”

    아쉬는 씨익 웃으며 구멍에 다가갔다.

    구멍에서는 마계에서 흘러오는 것이 분명한 힘이 느껴졌다. 물론 정말로 약하긴 했지만.

    아쉬는 품에서 제법 커다란 물건 하나를 꺼냈다.

    새까만 반구형의 물체였는데, 속이 비어 있었다.

    아쉬는 그걸로 구멍을 덮었다.

    구멍에서 나온 힘이 검은 물체에 스며들더니 이내 다른 힘으로 변해서 주위로 쫙 퍼져 나갔다.

    이건 아쉬와 제이슨, 윌리엄이 머리를 맞대고 제작한 통신 장비였다.

    양방향 소통이 되긴 하지만, 말 그대로 되기만 할 뿐이고 효율은 극도로 낮았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보내는 신호는 강한데, 이쪽에서 저쪽으로 보내는 신호는 거의 닿지 않는다.

    그래서 아주 간단한 정보만 보낼 수 있었다. 그나마도 저쪽에서 그 신호를 받았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도 없고.

    그렇기에 같은 신호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내야 한다.

    물론 그건 별 거 아니었다. 이 중계기를 이용할 수 있는 장비를 컴퓨터에 연결해 뒀으니까.

    “전자장비라는 거, 정말 편리하긴 하네.”

    아쉬는 씨익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이제 남은 건 제이슨에게 맡기면 된다.

    “그나저나 이걸 건드리는 놈이 있으면 안 되는데······.”

    지나가던 괴물이 멋모르고 건드리면 애써 만들어 놓은 통신 장비가 망가질 수도 있었다.

    아쉬는 그런 걸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왼쪽 새끼손가락을 쥐었다.

    그리고 그걸 망설임 없이 꺾었다.

    뚜둑!

    꺾은 다음에는 그대로 잡아 뜯어 버렸다.

    그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하는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참은 것이다. 물론 실제로 손가락을 뜯어내는 것보다는 훨씬 고통이 덜하기도 했고.

    “더럽게 아프군.”

    아쉬는 피가 줄줄 쏟아지는 상처에 손가락을 툭 갖다 댔다.

    치이익!

    그대로 상처가 익어버렸다.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않았다.

    “자, 이제 자라나라!”

    아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새끼손가락이 급격히 커졌다.

    그것은 자라나면서 사람의 몸통처럼 변했고, 머리가 쑥 튀어나오더니 팔다리까지 불쑥불쑥 솟아났다.

    그것은 이내 벌거벗은 아쉬와 똑같은 생김새가 되었다.

    아쉬는 그걸 보고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공간이 있었으면 옷이라도 맞춰줬을 텐데, 뭐······ 나중에 갖다 주면 되지.”

    아쉬는 분신에게 자신의 검을 건넸다. 옷은 없어도 무기는 하나 있어야 괴물과 싸울 것 아닌가.

    물론 무기가 없어도 충분히 강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잘 지켜.”

    아쉬의 명령에 분신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벌거벗은 아쉬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말을 할 힘까지 모두 전투에 쓰도록 만들어진 분신이었으니까.

    아쉬와는 심령으로 약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

    아쉬는 그렇게 분신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 * *

    강하진은 멀리서 그걸 지켜보며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분신을 저렇게 과격하게 만들어?”

    손가락을 뽑아 분신을 만들다니.

    하지만 그래서 더 무시무시했다. 저렇게 자신의 신체를 대가로 쓰는 스킬의 위력이 약할 리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분신이 아쉬보다 약한 건 확실했다.

    물론 더 정확한 건 가까이 가봐야 알겠지만.

    강하진은 아쉬가 멀어질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아쉬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백호를 데려오지 않길 잘했다. 백호가 여기 있었다면 아쉬가 관심을 갖고 여기로 왔을 수도 있다.

    벽을 두 번이나 넘은 괴물은 아직 지구에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으니까.

    강하진은 이제 가도 안전하다는 확신이 선 다음에야 움직였다.

    천천히 아쉬의 분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확실히 분신의 힘이 느껴졌다.

    벌거벗은 아쉬는 자신의 힘을 감추지 않았다. 목적이 이곳으로 다가오는 괴물을 막는 것이었으니까.

    이렇게 힘을 발산하면 약한 놈들은 알아서 도망친다. 여기에 오는 놈은 이 힘의 발산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놈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놈들은 일본 내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아쉬가 자신의 분신을 남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사항은 인간의 접근이었다.

    접근한 인간은 모두 죽인 후, 흔적을 없애도록 설정했다.

    인간들이 이곳을 발견해선 안 되니까.

    그렇게 막다보면 거대 던전이 우수수 열릴 것이고, 그 던전들이 터지면 결국 아무도 이 근처에 다가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쉬는 이 일을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하게 여겼다.

    덕분에 강하진이 이렇게 쉽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고.

    ‘원래의 아쉬보다는 약하지만······.’

    강하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당당하게 발산하는 힘을 통해 벌거벗은 아쉬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했더니, 정말 만만치 않았다.

    일단 엿보기를 통해 정보를 확인해봤지만 역시 예상대로 먹통이었다.

    언제쯤 이놈들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지 한숨이 나왔다.

    벌거벗은 아쉬는 백호보다도 강했다. 적어도 강하진이 느끼기엔 그랬다.

    어떤 스킬을 가졌는지 알 수가 없어서 좀 찜찜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저놈과 싸워야 한다.

    아쉬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저놈을 죽이고 여기에 아쉬의 힘으로도 망가뜨릴 수 없는 단단한 봉인을 설치해야 한다.

    강하진은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아쉬는 라파시드의 서를 통해 펼친 왜곡과 은폐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저 힘으로 부숴버렸을 뿐이다.

    만일 그 힘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신경 써서 패턴을 설치한다면 아쉬도 그렇게 쉽게 봉인을 부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저기 구멍을 덮고 있는 검은 반구가 신경 쓰였다.

    저걸 내버려 두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강하진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벌거벗은 아쉬는 언젠가부터 강하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강하진이 힘을 대부분 갈무리했음에도 그 존재를 알아차리고 계속 주시했다.

    어느새 강하진이 벌거벗은 아쉬 앞에 도착했다.

    벌거벗은 아쉬는 손에 든 검으로 강하진을 겨눴다.

    저렇게 당당하게 벌거벗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데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저놈을 상대로 방심하다간 당할 수도 있었다.

    강하진은 일단 버프부터 썼다. 각종 버프가 쏟아지자 훨씬 강력해졌다.

    여차하는 순간에는 [전뇌화]를 쓰면 되니 방심하다 당하지 않는 이상에야 벌거벗은 아쉬에게 질 일은 없을 것이다.

    강하진이 두 걸음 더 다가가자, 벌거벗은 아쉬가 그대로 돌진하며 검을 내리그었다.

    서걱!

    공간이 갈라지는 듯한 일격이었다.

    강하진은 그걸 보며 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저건 간단히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일종의 스킬임이 분명했다. 공간을 잘라내는 스킬 말이다.

    방금의 일격으로 생겨난 약간의 빈틈으로 강하진의 검이 파고들었다.

    꽝!

    벌거벗은 아쉬는 아주 간단히 강하진의 공격을 막아냈다.

    강렬한 충격이 손을 타고 올라왔지만, 강하진의 예상범위 내였기에 그 힘을 이용해 다시 공격했다.

    꽝! 꽝! 꽝! 꽝!

    벌거벗은 아쉬는 강하진의 공격을 막으면 그 힘을 반드시 이용했다.

    힘을 흘려내 다른 방향으로 끌어당겨 균형을 무너뜨리기도 했고, 힘을 이용해 더 강력한 공격에 써먹기도 했다.

    강하진은 벌거벗은 아쉬와 싸우면서 확신했다.

    ‘저놈의 실력이 더 위야.’

    물론 기술적인 실력을 얘기한다. 가진 바 힘 자체는 강하진이 훨씬 위에 있었다.

    아무래도 벌거벗은 아쉬는 아쉬가 원래 갖고 있던 전투기술을 고스란히 받은 모양이었다.

    고작 분신을 상대로도 이 모양인데, 정작 본체와 싸우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형편없이 당할 것이다.

    강하진은 이를 악물고 싸움에 집중했다.

    무리하면 더 빨리 이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 싸움을 하나의 기회로 여겼다.

    자신보다 월등한 싸움 기술을 가진 상대와 이렇게 치열하게 싸울 수 있는 경험을 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기회를 어떻게 버리겠는가.

    강하진은 눈을 번득이며 하나라도 더 얻어가기 위해 애쓰고 또 애썼다.

    그렇게 싸움이 계속 이어졌다.

    * * *

    아쉬는 영국 기지로 돌아와 제이슨을 만났다.

    영국 기지의 분위기는 아까와는 딴판이었다.

    제이슨이 잘 처리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이런 건 제이슨이 잘하지.”

    아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지구로 오기 전에도 제이슨이 리더나 다름없는 역할을 했다. 아쉬가 훨씬 더 강한데도 말이다.

    아쉬는 그 부분에 대해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 그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역할이었으니까.

    자신에게 어울리는 건 적과 싸우고 상대를 찢고 피를 뒤집어쓰는 일이었다.

    “어떻게 됐지?”

    제이슨은 아쉬를 보자마자 그것부터 물었다. 아쉬도 그런 제이슨의 태도에 딱히 불만이 없었다.

    “잘 끝났지.”

    “그렇군.”

    제이슨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가 갔으니 일이 잘 끝나는 건 너무나 당연했으니까.

    “설치하고 분신 하나 남겨서 지키게 했으니까 당분간 신경 꺼도 돼.”

    “잘했다. 그럼 슬슬 이 근처를 정리하고 스페인 쪽 기지에 가서 청소도 좀 하고 애들 절반을 넘기면 되겠군.”

    “그런 자잘한 건 네가 알아서 해.”

    아쉬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제이슨은 그런 아쉬의 태도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 정도만 해도 어디인가.

    솔직히 아쉬가 이렇게 협조를 잘 해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채워 나가면 된다.

    제이슨은 이제야 좀 일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한데 그 순간, 아쉬의 표정이 확 굳었다.

    아쉬는 막 막사 밖으로 나가려고 했었다. 한데 걸음을 옮기던 자세 그대롤 멈춰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쉬의 시선이 향한 방향은 방금 자신의 분신을 남겨두고 온 곳이었다.

    “왜 그러고 있어?”

    제이슨이 의아한 눈으로 아쉬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쉬가 정말 기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 분신이 싸우고 있어.”

    “그게 뭐 이상한 일인가? 여긴 괴물이 득실거리는 곳이야.”

    제이슨의 심드렁한 반응에 아쉬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일이지. 확실히 이상한 일이야.”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싸움이 너무 팽팽해.”

    아쉬의 대답에 제이슨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고작해야 분신일 뿐이잖아.”

    그 말에 아쉬가 입가에 비웃음을 달고 제이슨을 바라봤다.

    “내가 분신을 대충 만들어서 거기 뒀을 거 같아? 그 중요한 걸 지키는데?”

    그제야 제이슨의 표정이 굳었다.

    아쉬가 왼손을 들어서 쫙 펼쳤다. 거기에는 원래 없어야 할 새끼손가락이 멀쩡히 달려 있었다.

    아쉬는 그 멀쩡한 새끼손가락을 집으며 말했다.

    “이걸 잘라서 만들었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제이슨의 표정이 더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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