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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레벨업-155화 (155/200)
  • < 혈백호 1 >

    혈백호가 마구 발톱을 휘둘렀다.

    강하진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크워어어어!

    혈백호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포효를 내질렀다. 목표를 이뤘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그건 혈백호의 착각이었다.

    찢어졌던 강하진의 몸이 마치 안개처럼 스르르 흩어졌다.

    왜곡의 장이 불러온 효과였다.

    혈백호가 이 함정에 달려든 이유는 은폐의 장이 함정의 존재를 완벽하게 감췄기 때문이다.

    혈백호는 혈광이 번득이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아까 자신에게 덤비던 인간들도 전부 사라졌다.

    혈백호의 시력은 이 평원의 끝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한데 아무리 봐도 지금 서 있는 평원에는 그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이 평원 자체가 문제였다. 이건 혈백호의 기억 속에 없는 장소였으니까.

    라파시드의 서, 은폐와 왜곡의 장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광경이었다.

    혈백호는 레벨이 2000에 근접한 괴물이었다.

    그 정도 격을 갖췄다는 건 오직 본능만을 가지고 움직이는 다른 괴물들과는 다르다는 뜻이었다.

    우선 상황을 파악했다.

    명백하게 함정에 빠졌다. 그리고 이 함정은 아까 자신이 찢어버린 줄 알았던 그놈이 가진 어떤 특별한 스킬이리라.

    -크르르르.

    혈백호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고작 이 정도로 자신을 잡아둘 수 있으리라 여겼다면 오산이다.

    혈백호의 발톱에 막대한 마력이 모여들었다.

    어서 이 같잖은 함정을 박살 내고, 먹잇감들을 몽땅 포식한 후, 계약자에게 돌아가리라.

    혈백호는 이 함정을 박살 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함정 자체가 가지는 힘을 낮춰볼 생각은 없었다.

    이 함정은 굉장히 뛰어나다. 혈백호를 가둘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격에 맞는 대응을 해줘야 한다.

    혈백호가 준비한 것은 [혈뢰]였다. 그것은 구름 호랑이와 피의 거인, 둘의 힘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생성된 스킬로, 혈백호가 가진 가장 강력한 공격이었다.

    앞발톱에 맺힌 마력이 붉게 물들었다. 피의 힘이 깃든 것이다.

    그리고 핏빛 번개가 뿜어져나갔다.

    꽈르르르릉!

    세상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주변 공간을 찢고 부수고 뭉갰다.

    놀라운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그 강력한 [혈뢰]를 주변의 공간이 그대로 흡수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와 섞여 하나가 되더니 다시 튕겨서 혈백호에게 되돌아왔다.

    꽈르르릉!

    -크워어어어어!

    불의의 일격에 당한 혈백호가 고통스러운 괴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라파시드의 서에 있는 흡수, 융합, 반사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광경이었다.

    혈백호는 자신이 쏘아낸 [혈뢰]에 이자를 덧붙여서 되돌려 받은 것이다.

    혈백호의 몸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방금 공격에 깃든 라파시드의 서, 관통의 장에 담긴 힘에 당했기 때문이다.

    주변에 들끓던 힘과 마력이 순식간에 고요히 가라앉았다.

    평온의 장이 작동한 것이다.

    스킬, [고속회복]을 가진 혈백호였기에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일을 몇 번 겪으면 아무리 혈백호라고 해도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걸 깨달은 혈백호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서 벗어날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 * *

    강하진은 자신이 직접 만든 함정 바깥쪽에 있었다.

    지금 혈백호가 있는 곳에는 은폐와 왜곡이 작동하고 있기에 밖에서도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강하진은 이 함정의 주인이었기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충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영리한 놈이네.”

    강하진의 말에 옆에 있던 황수영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영리하기까지 해요? 보니까 무지막지하게 강한 놈이던데. 그런데 고작 함정으로 그놈을 잡을 수 있을까요?”

    황수영의 표정이 어두운 걸 보니 혈백호에게 어지간히 당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혈백호가 제대로 공격한 것도 아닌데, 그걸 막느라 온몸이 터져 나갈 정도로 다쳤으니 무서울 만도 했다.

    “이대로는 안 되죠. 새로운 시도를 해볼 겁니다.”

    황수영의 안색이 확 변했다.

    “설마 그 새로운 시도가 저 안에 들어가는 건 아니죠?”

    “글쎄요. 아무튼 여긴 제가 맡을 테니, 나머지 분들은 조심해서 던전 내부를 탐색하십시오. 던전을 닫으려면 일단 코어를 찾아야 할 테니까요.”

    강하진의 말에 김지혜가 대답했다.

    “네. 일단 가디언스는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김지혜는 황수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가디언스는 몰라도 던전 브레이커와 디펜더스는 황수영이 아니면 움직일 수 없으니까.

    “알았어요, 알았어. 하면 되잖아요, 하면.”

    황수영은 강하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절대 안에 들어가면 안 돼요. 아셨죠? 꼭 약속해 주세요. 저놈 진짜 장난 아니란 말이에요.”

    “무리한 일은 절대 안 할 겁니다. 걱정 마시고 던전 코어, 꼭 찾아주십시오. 황수영 씨만 믿고 있겠습니다.”

    믿겠다는 말에 황수영이 환하게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여줬다.

    “맡겨 주세요. 제가 얼른 찾아드릴 테니까요.”

    다들 우르르 그곳을 떠났다.

    어쨌든 던전 내에 괴물이 모두 사라졌으니 던전을 탐색하는 데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제니퍼였는데, 그것 역시 여럿이 조를 짜서 움직이고 서로서로 자주 연락을 하면 아무리 제니퍼라도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굳이 괴물을 움직이려고 했던 이유도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서일 테니까.

    혼자 남자, 강하진은 황수영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함정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황수영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위험하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다.

    어쨌든 강하진은 이 함정을 만든 함정의 주인이었다.

    함정의 구조나 위력, 능력을 완벽하게 꿰고 있었다.

    강하진은 함정을 잘 이용해 볼 생각이었다.

    함정에 들어가자, 저 멀리 혈백호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혈백호는 강하진이 들어온 순간 앞발에 대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고 강하진이 있는 쪽을 노려봤다.

    하지만 강하진이 보여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강하진은 은폐와 왜곡 사이에 있었다. 혈백호가 그쪽을 본 건 뭔가 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하진의 진입으로 인한 변화를 느꼈을 뿐이었다.

    이 안에 작용하는 평온의 힘에 의해 그 느낌 자체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강하진은 자신의 예상이 정확히 맞아 떨어지자, 좀 더 자신감을 가졌다. 원하던 걸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혈백호의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레벨이나 능력치, 스킬을 본 게 아니라 더 깊은 정보가 궁금했다.

    [서큐버스 퀸, 제니퍼에게 속해 있다. 제니퍼가 계약한 존재는 피의 거인이었지만, 피의 거인이 혈백호의 일부가 되면서 계약 일부가 이전되었다.]

    강하진은 계약 일부가 이전되었다는 부분에 주목했다. 계약 전부가 아니라 일부였다.

    그 얘기는 피의 거인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피의 거인도 계약하긴 했지만 시키는 일을 하게 만들기 위해 매혹까지 썼다.

    아마 아무리 계약 관계라고 해도 죽음에 대한 것까지 정해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계약 관계이기 때문에 매혹을 더 쉽게 걸 수는 있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피의 거인을 투자해서 혈백호를 얻었다면 정말 남는 장사이긴 했다.

    계약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거기까지는 볼 수 없었으니까.

    ‘자, 그게 뭔지는 이제 상관없지.’

    강하진은 자신이 설치한 라파시드의 서 중에서 절단의 장을 움직였다.

    절단의 장, 무엇이든 잘라낼 수 있는 힘이었다.

    근원의 힘까지 잘라낼 수 있다고 하는 걸 보면, 계약의 끈도 잘라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계약의 끈을 강하진이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열 가지 힘이 통합되어 펼쳐진 라파시드의 패턴은 정말 대단했다.

    사실 아직 완벽하지는 않다.

    만일 더 완벽했다면 아까 혈백호가 자신의 힘이 반사되었을 때, 저렇게 쉽게 회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라파시드의 관통은 그냥 평범한 관통이 아니라, 근원을 꿰뚫는 관통이니까.

    강하진은 심호흡을 했다. 평온의 장을 발동시키자, 몸과 마음이 명경지수처럼 고요해졌다.

    절단의 힘이 강하진의 손에 맺혔다.

    그냥 무작정 잘라내면 안 된다. 정확히 계약을 절단해야 한다.

    강하진은 이미 그와 비슷한 일을 해본 적이 있었다.

    시스템을 절단하는 힘을 갖고 있지 않은가. 시스템은 어디에도 없고, 또 어디에도 있는 모호한 힘이다.

    그걸 명확히 인지해 잘라낼 수 있는데, 고작 계약의 끈 하나 못 찾겠는가.

    고요한 강하진의 마음에 선 하나가 그어졌다.

    강하진은 그 선에 혈백호와 제니퍼의 계약을 담았다.

    그리고 절단했다.

    서걱!

    분명히 뭔가가 잘렸다. 강하진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들여다봤다.

    확실한 손맛이 있었다.

    기분이 끝없이 고양되었다. 이런 끝내주는 기분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강하진은 고개를 들어 혈백호를 살폈다.

    혈백호도 자신에게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닫고 벌떡 일어나 날뛰고 있었다.

    계약이 끊어지면서 뭔가 강렬한 상실감을 맛본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로써, 제니퍼와의 계약은 끊어졌다.

    아마 어딘가에 있을 제니퍼도 이 사실을 분명히 느꼈으리라.

    * * *

    제니퍼는 던전에서 가장 은밀하고 안전한 곳에 누워 있었다.

    일단 피의 거인과 계약을 하고 매혹을 쓰느라 힘을 너무 많이 소진했다.

    계약에도 매혹을 써야 했기에 이중으로 힘을 쓰는 바람에 소모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 소모된 힘을 채우려면 시간을 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쉬면서 힘을 채우는 동안 모든 일이 끝날 테니까.

    피의 거인은 확실하게 임무를 완수할 것이고, 그 임무가 끝나면 피의 거인을 먹은 구름 호랑이는 새로운 괴물로 진화해 자신의 소유가 되리라.

    완벽한 계약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정도면 써먹기 충분했다.

    계약이 이전된 순간, 새 계약의 주체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혈백호. 좋은 이름이야.’

    능력은 또 얼마나 대단한가. 아마 저 정도 괴물이라면 지구에서 혈백호를 당해낼 수 있는 존재는 없으리라.

    아니, 혈백호 혼자서 웬만한 나라 하나를 상대하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또한 혈백호 정도라면 이 던전 안에 들어온 강하진을 참살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으리라.

    모두를 죽일 필요는 없다. 적당히 살려 보내서 소문을 퍼트려야 하니까.

    또한 자신이 던전을 닫고 혈백호를 차지하게 된다면 디펜더스의 이름이 우뚝 서리라.

    제니퍼는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 지었다.

    한데 그 순간, 갑자기 계약이 끊어졌다.

    “커억!”

    제니퍼는 그 충격으로 피를 토했다.

    안 그래도 힘든 상황인데 계약이 역류해 몸이 극심하게 상해 버렸다.

    마력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나머지 권속들과의 계약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걸 안정 시켜야 한다. 안 그러면 정말 난리가 날 테니까.

    제니퍼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속에서 계속 올라오는 핏물을 모조리 토해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강하진이 혈백호를 잡았나? 그건 말이 안 되는데?’

    강하진이 아무리 강해졌어도 레벨이 2000에 근접하는 괴물을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그것도 혈백호로 진화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제니퍼는 잡 생각을 버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 안에 있으면 안 될 듯싶었다.

    푸드득!

    수천 마리 박쥐로 변한 제니퍼는 높이 날아올라 사방으로 흩어져 던전 입구를 향해 이동했다.

    힘없는 날갯짓이었다.

    * * *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강하진은 함정 한가운데 웅크리고 있는 혈백호를 가만히 쳐다봤다.

    일단 계약을 끊어내는 것까지는 성공을 했는데, 이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아직 계획한 바가 없었다.

    사실 여기까지 온 것도 굉장히 즉흥적인 계획에 의해서였다.

    일이 잘 풀렸기에 망정이지, 만일 뭐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지금쯤 처참한 결과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즉흥적인 계획의 끝이 지금 이 자리였다.

    저기 웅크리고 있는 혈백호와 제니퍼와의 계약을 끊은 건 다행이지만, 이제 저놈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아까 혈백호가 보여줬던 힘을 생각하면 당장 사냥하는 게 불가능했다.

    강하진은 고민 끝에 일단 라파시드의 서를 가지고 뭔가 시도라도 해보기로 했다.

    이대로 던전이 터지면 저 괴물이 밖으로 나가게 된다.

    혈백호를 가둬놓은 함정도 그 순간 사라질 가능성이 컸다.

    저 조그만 놈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심지어 본능을 억제하고 머리까지 쓴다.

    아마 저놈이 나간다면 정말 골치 아플 것이다. 또한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강하진은 라파시드의 패턴에 담긴 모든 힘을 끌어왔다.

    이걸 다 써도 혈백호를 죽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시도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혈백호를 쳐다보는 강하진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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