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브르 박물관 2 >
“뭐야, 오늘은 왜 그렇게 대충 봐요?”
황수영이 황당한 눈으로 강하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요. 뭐······ 신중히 볼 만한 유물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서, 설마 나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죠?”
“그럴 리가요.”
강하진이 빙긋 웃었다.
지금은 그저 완성된 아이템들이기에 엿보기를 통해 정보만 확인하고 넘어가고 있어서 그랬다.
혹시나 감정서가 잘못 적힌 부분을 발견하면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잠깐 분석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니 영국에서와 달리 시간이 많이 단축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억울해요.”
“오해입니다.”
황수영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강하진을 살짝 흘겨봤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미소 지으며 강하진에게 살짝 가까이 붙었다.
어쨌든 이러고 있으니 둘이서만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일행은 지금 저 뒤쪽에서 엔조에게 붙들려 열심히 가디언스의 공방에 대한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다 얘기해도 되요?”
“어차피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 아닙니까.”
“알 만한 사람들이라는 게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호들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A-마켓에서도 아는 사람이 제법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번 더 경매가 진행되면, 엔조쯤 되는 사람은 알기 싫어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고요. 어쩌면 그의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긴, 그렇겠네요.”
두 사람이 그렇게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을 때, 드디어 완성된 아이템이 진열된 공간이 끝났다.
거기까지도 제법 길었는데, 그 뒤는 지금까지 지나온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거대했다.
이제부터는 완성되지 않은, 하지만 완성되기를 기대하면 갖다 놓은 진짜 유물들이 전시된 공간이 시작된다.
강하진은 첫 번째 유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모든 감각을 동원해 그걸 살펴봤다.
처음에는 지금까지와 다를 게 없을 거라고 여겼던 황수영의 표정이 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드디어 시작했어!”
황수영이 화들짝 놀라 강하진에게서 두 걸음정도 물러났다.
“그거 감상하는 데 시간 얼마나 걸리실 거 같아요?”
“글쎄요.”
강하진의 대답은 그걸로 끝이었다.
황수영은 즉시 엔조를 향해 반쯤 뛰는 것처럼 다가갔다.
“아무 때나 나갈 수 있게 해준다는 거, 진짜죠? 농담 아니죠? 농담이 아니길 빌어요. 그래야 당신이 살 수 있을 테니까.”
“어······.”
엔조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걸 본 황수영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그녀의 오해였다.
황수영을 비롯한 가디언스 길드원들은 그 뒤로 몇 시간 정도 구경을 하고 감상을 하다가 다들 돌아갔으니까.
다만, 안내 때문에 남은 엔조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이해했다. 대체 왜 황수영이 그런 반응을 수시로 보여줬는지.
엔조는 절규했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 * *
강하진이 세운 루브르에서의 목표는 유물의 힘을 갈취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기회가 닿으면 분명히 하겠지만, 진짜 목표는 그게 아니라 그 근원에 있었다.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내고자 했다.
영국에서는 시간에 쫓겨서 그게 불가능했지만, 여기서는 이미 시간에 대한 제약이 없다는 확답을 받았다.
다만 이 안에서는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다는 제한 조건이 붙었지만, 그건 별로 상관없었다.
회귀 전에는 사냥 중에 발을 빼지 못해서 일주일 정도 먹지도 자지도 않고 전투만 했던 경험도 있었다.
물론 그때는 죽을 뻔했지만, 그에 버금가는 경험도 수두룩하게 했다.
그러니 목표를 이룰 때까지 여기서 버티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전투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열흘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그러니 중요한 건 오래 버티는 게 아니라, 원하는 걸 정확히 얻어가는 거였다.
그래서 유물 하나하나를 영국에서보다 훨씬 세심하고 철저하게 확인했다.
침식 중인 유물의 비율이 영국 박물관 보다 루브르 쪽이 훨씬 높았다.
어쩌면 영국에서 미리 유물들을 다수 빼돌려 놔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강하진이 느끼기에는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다.
루브르 자체가 시스템과 더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유물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동시에 박물관 자체에 깃든 힘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 와중에 침식이 거의 끝나가는 유물을 발견하면 아이템으로 완성되는 순간이 될 때까지 그 앞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침식 중인 유물이 많으니 끝이 임박한 것도 당연히 많았다.
아마 영국에서보다 훨씬 많은 성과를 얻어서 갈 수 있을 듯했다.
첫 번째 갈취부터 대박이 터졌다.
[용린갑]
[청룡의 비늘로 만든 갑옷. 착용자의 성장을 돕는다. 민첩+100, 체력+100, 마력+100, 스킬 ‘성장가속’을 쓸 수 있다. 칭호 ‘용린의 단단함을 얻은 자’를 부여한다.]
확실히 아까 봤던 완성된 아이템과는 차원이 달랐다.
겉모습은 녹이 잔뜩 슨 청동 흉갑이었는데, 척 보기에도 굉장히 오래 된 갑옷이었다.
[성장가속(P)]
[용의 힘이 성장을 가속시킨다. 레벨업 속도가 빨라진다.]
놀라운 스킬이었다. 레벨업 속도를 높여준다니. 경험치 추가 같은 옵션이 붙은 셈이었다.
[용린의 단단함을 얻은 자]
[용의 비늘에 깃든 힘을 피부에 부여한다. 방어력+20%]
방어력을 20%나 올려주는 칭호였다.
이 정도면 영국에서 얻은 아이템들 못지않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뛰어나다,
‘좀 더 확인을 해봐야 알겠지만······ 실제로 유물에 부여되는 힘이 완성된 아이템에 깃든 힘과 다른 것 같아.’
어쨌든 박물관에서 침식이 진행되는 아이템이 강하진에게는 가장 탁월한 효과를 전해주는 건 분명하다.
이런 대단한 스킬과 칭호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얻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이걸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줄 수 있으면 정말 끝내줄 텐데.’
스킬이나 칭호가 중복되는 경우, 그걸 타인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가디언스의 전체적인 전력을 순식간에 뻥튀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강하진은 그렇게 유물을 하나씩 하나씩 신중하게 확인하며 박물관의 중심부로 조금씩 이동했다.
루브르에는 오래 된 유물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그걸 하나하나 확인하다보니 조금씩 침식의 요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침식이라는 건 지구의 물건이 시스템과 연결되는 과정, 즉 시스템의 정보가 지구의 물건에 깃드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시스템의 힘이 개입되는데, 강하진이 계속 염두에 두고 살피는 건 바로 그 시스템의 힘이었다.
유물에만 깃드는 건, 애초에 그 유물에 뭔가 기대할 만한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강하진은 처음에는 침식이라는 것이 시스템이 유물에 힘을 주는 과정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랫동안 침식의 과정을 지켜보니 힘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빼앗아가는 것에 더 가까웠다.
유물의 힘을 시스템이 먼저 흡수하고 거기에 시스템의 정보를 덧씌워 다시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하진이 중간에 그것을 갈취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유물 하나의 갈취 순간을 놓쳐 버렸다.
유물의 힘 하나를 놓친 대가로 침식의 과정을 파악했으니 적절한 대가를 지불했다고 여기기로 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더 확인할 수 있기도 했고.
원래 시스템이 부여하려던 정보보다 실제로 유물에 깃드는 정보의 격이 더 낮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머지 잉여의 격은 그대로 주위에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힘은 이 박물관 안을 맴돌았다.
루브르에 특별한 능력이 깃든 이유가 혹시 저것 때문일까?
‘저것도 알아내야지.’
이번 루브르 박물관에서의 일정은 굳이 이 박물관과 영국 박물관에서만 침식이 이뤄지는 이유를 밝혀낼 때까지였다.
강하진이 다음 유물로 자리를 옮기자, 그때까지 옆에서 기다리던 엔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세 시간 동안 유물 하나를 감상하다니······!’
강하진이 다음 유물로 자리를 이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물관의 관리자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엔조는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들을 바라봤다.
“무슨 일입니까? 침입자라도 있었습니까?”
관리자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방금 새로운 아이템이 등장했다는 신호를 확인했습니다.”
“예? 정말입니까? 그거 잘됐군요! 어떤 유물입니까?”
관리자가 씨익 웃었다.
“바로 앞에 서 계시지 않습니까.”
순간 엔조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 물병 모양의 유물이 아이템으로 변한 겁니까?”
“예. 맞습니다. 그럼 감정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박물관에는 실력이 뛰어난 감정사가 항상 대기 중이었다. 언제 아이템이 등장할지 모르니까.
감정사가 유물을 조심스럽게 꺼내 감정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물병의 모양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아이템으로 변했다고 모양까지 단숨에 변하지는 않았다. 모양의 변화는 서서히 이뤄지는데 보통 하루 정도 지나면 완벽하게 모양이 잡힌다.
물론 모양에 따라 능력이 변하는 건 아니기에 감정은 바로 해도 상관없었다.
엔조는 감정사가 아이템을 감정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강하진을 바라봤다.
강하진은 유물을 아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방금 저런 일이 있어서 그런지 그저 단순히 감상하는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우연일까?’
엔조의 머릿속이 아주 복잡해졌다.
* * *
강하진은 유물에 흐르는 힘의 패턴을 확인하고는 집중을 풀었다.
침식이 진행 중인 유물마다 힘의 패턴이 다 달랐고, 그걸 확인하다보면 조금씩 무언가가 쌓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유물 하나 허투루 넘어갈 수가 없었다.
침식이 진행 중인 유물은 이곳에 있는 전체 유물의 5% 정도라고 보면 된다. 그래도 워낙 유물이 많으니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그나마 비율이 그 정도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한 달 동안 밤을 지새워도 여기 있는 유물을 다 확인하지 못할 것이다.
집중을 풀고 나니 옆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지금 감정 중이었다.
‘유물이 아이템으로 변하면 알아차릴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놨나보네.’
강하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유물이 전시된 진열장을 확인했다.
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천장부분에 작은 마석이 박혀 있었다.
그 마석은 넓적한 판처럼 생긴 전자장비 한가운데 박혀 있었는데, 보아하니 그 전자장비가 마석을 이용해 마력을 감지하는 시스템인 듯했다.
‘저런 식으로 이용할 수도 있구나.’
현대의 전자장비였기에 엿보기 스킬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또 아예 안 먹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석회로]
[마석을 이용해 작동시키는 전자회로.]
여기서 아무리 집중을 해도 더 이상의 정보를 뽑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좀 신기하긴 했다. 시스템이 저것도 감지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강하진은 엿보기 스킬의 숙련도가 더 오르거나, 아니면 당당하게 엿보기로 진화한 것처럼 기술발전이 이뤄지면 그 다음 단계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예상했다.
명인수가 스킬을 이용해 일반인의 정보를 뽑아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강하진의 시선이 다시 감정 중인 아이템으로 향했다.
저건 최하급 포션을 제조하는 병이었다.
포션에도 종류가 많은데, 저건 정신을 명료하게 해주는 포션이었다. 그러니까 숙취해소에 쓰면 아주 훌륭한 포션이었다.
‘아깝긴 하네.’
사실 저 병은 저보다 훨씬 뛰어난 포션을 제조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등급도 최하급이 아니라 하급이었고, 포션의 종류도 정신을 명료하게 하는 게 아니라, 상태이상에 저항하는 포션이었다.
잘 이용하기만 하면 나중에 정말 제대로 쓰일 수 있는 포션이었다.
강하진이 그걸 보고 있자, 엔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마침 방금 유물 하나가 아이템으로 변했습니다. 이런 장면을 보는 게 쉽지 않은데 정말 운이 좋으시군요. 지금 박물관의 감정사들이 감정 중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엔조가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속삭이듯 설명을 덧붙였다.
“옆에서 들어보니 포션을 제조할 수 있는 아이템인 모양입니다. 대단하죠? 박물관에서 나오는 아이템이 전부 저런 식입니다. 아주 유용하고 뛰어나죠.”
엔조는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강하진은 그걸 보니 더욱 안타까웠다.
원래는 저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난 아이템인데, 고작 저거만 남은 거라고 알려줄 수도 없어서 더 안타까웠다.
강하진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다음 유물로 향했다.
아직 봐야 할 유물이 많이 남았다. 여기서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