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르난 >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줄 수 있나?”
강하진의 물음에 카르난이 피식 웃었다.
“아니. 그러기 싫다. 귀찮아.”
카르난은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강하진은 문득 자신이 카르난의 정보조차 확인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카르난이 갑자기 말을 꺼내는 바람에 좀 당황했던 모양이다.
[카르난]
[레벨 : 0]
[몸을 잃어 모든 힘과 스킬이 사라지고 영혼과 머리만 남은 상태다. 권능은 없지만 권능의 발현과 조절 능력을 갖고 있다. 봉인의 궤로 인해 두뇌에 접속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강하진은 설명을 확인하고 살짝 놀랐다.
‘두뇌에 접속이 가능하다는 게 대체 뭐지?’
봉인의 궤가 내부에 있는 카르난의 머리를 통해 그의 권능을 컨트롤 하려면 필연적으로 그의 두뇌와 영혼에 접촉해야 했으리라.
‘아마 두뇌에 접촉한 상태로 봉인의 궤가 부서져서 다시 안 닫혔다는 말인가?’
강하진은 일단 뭐든 시도해보기로 했다.
과연 카르난의 두뇌에 접속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로서는 선택지가 유일했다.
‘시스템을 통하는 수밖에 없지.’
그리고 강하진은 그 시스템의 뒷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다.
일단 카르난의 머리에 양 손을 올린 강하진이 엿보기 스킬을 쓰며 집중을 시작했다.
카르난의 정보가 또 떠올랐지만 신경 쓰지 않고 오직 그의 두뇌에 접속한다는 생각에만 집중했다.
순간 카르난이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짓이야!”
카르난이 다급하게 외쳤다.
강하진은 대꾸도 하지 않고 두뇌 접속에 집중했다.
“알았어! 다 얘기해 줄 테니까 그만 해!”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여기까지 끌어냈는데 집중을 멈추면 다시 이 상태로 오기가 훨씬 힘들어진다.
“내가 마왕 자리에 도전하려다가 실패했어!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그러니까 그만 해!”
그 순간 강하진이 접속에 성공했다.
“끄어어어!”
카르난의 눈이 뒤집혔다. 그리고 괴이한 신음을 흘렸다.
“끄흐으으. 이 더러운 기분을 또 겪어야 하다니. 으흐흑.”
강하진은 두뇌에 접속했지만 딱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동안 이것저것 시도해보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건 시간 낭비였다.
그리고 한 번 해봤으니 앞으로는 더 쉽게 접속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집중을 풀고 머리에서 손을 떼자, 카르난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허어어억!”
카르난은 한동안 숨을 헐떡이다가 강하진을 노려봤다.
그러자 강하진이 다시 카르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카르난은 급히 눈을 아래로 깔았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해.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강하진은 문득 카르난이 왜 이렇게 경기를 하나 궁금했다.
“그렇게 이상한가?”
“누군가 내 머릿속에 손을 집어넣고 마구 휘젓는 느낌이야. 아픈 건 둘째 치고 그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 줄 알아?”
자신의 머릿속을 보호하려는 건 아마 본능에 속한 영역이다. 누군가 자신의 생각을 읽는다는 건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니까.
카르난은 본능적인 거부감과 두려움 때문에 두뇌 접속을 싫어하는 것인 듯했다.
“마왕 자리에 도전하려다가 실패했다고? 마왕은 마르바스겠지?”
“그럼 마르바스 말고 누가 이따위 짓을 하겠어? 당연히 마르바스지.”
“충성 서약의 대가로 몸이 그렇게 된 건가?”
카르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또 어떻게 알지? 설마 그 잠깐 동안 내 머릿속에서 그런 정보까지 뽑아간 거야? 너 진짜 무서운 놈이었구나. 정말로 인간 맞아?”
“인간 맞다. 마르바스가 이 던전을 만들어서 뭘 하려는 건지는 알고?”
“그건 모르지. 이건 내가 죽은 다음에 만들어진 던전이니까.”
“투영이라고 했으니······ 이 던전의 본체는 마르바스의 세상에 있는 건가?”
“그런 셈이지.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거기에 있는 건 던전이 아니야. 던전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힘이 담긴 거대한 아티팩트지.”
“그럼 여기서 네 권능을 회수해도 그쪽에서 알아내지 못할 수도 있는 건가?”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모르지. 이 던전이 어떻게 되는지까지 알아낼 수는 없어. 뭔가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는 한.”
“특별한 조치?”
“안 했을 거야. 대가가 엄청나게 필요하거든. 기껏해야 통신망 정도 뚫는 게 전부일 걸? 그나마도 대가가 많이 필요하지만, 여긴 내가 있으니까.”
“널 대가로 통신을 뚫는다는 건가?”
“맞아. 아마 분명히 그렇게 했을 거야.”
“권능을 회수할 수 있나?”
카르난이 눈동자를 빙글 돌렸다.
“이대로는 불가능해. 난 권능을 다 잃었거든.”
“그래도 컨트롤은 가능할 텐데?”
카르난은 머뭇거렸다. 강하진은 다시 머리에 손을 얹으려다가 이번에는 그냥 좀 더 기다려줬다.
“이대로는 너무 불안정해서 조절이 어려워. 봉인의 궤 같은 물건이 있다면 모를까.”
강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난 몇 번 연습하면 될 거 같던데? 그럼 그냥 내가 알아서 하는 걸로 하지.”
그 말에 카르난이 기겁을 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해. 무슨 성질이 그렇게 급해? 내가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좀 기다려 봐.”
“얼른 찾아야 할 거야.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세밀한 조절을 위해서는 그 권능을 내가 갖고 있어야 돼.”
“그럼 네 몸을 찾아주면 되는 건가?”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지. 내 머리만으로는 권능의 출력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빙빙 돌리지 말고 결론을 말해.”
“내 권능의 출력을 감당할 몸이 필요해. 예를 들면 완벽한 상태의 내 육체를 복원한다거나.”
강하진은 피식 웃었다.
카르난의 몸은 머리를 빼고 여섯 조각으로 나뉘어 있다.
그 각각의 레벨이 무려 376이었다.
그 얘기는 하나로 모였을 때의 레벨이 그보다 훨씬 높다는 뜻이다.
예상컨대, 최소 1000이 넘어갈 것이다.
그런 놈의 육체를 완벽하게 복원해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세상에 재앙이 내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몸을 되찾아서 뭐하게? 마르바스한테 또 도전하게? 어차피 졌잖아. 또 싸운다고 되겠어?”
“웃기지 마라! 난 비겁하게 당했다! 정정당당하게 붙었으면 틀림없이 내가 이겼어!”
“그럼 또 정정당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지겠네. 그냥 포기해. 괜한 수작 부리지 말고.”
카르난이 강하진을 노려봤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눈을 깔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서 넌 뭘 원하는 건가? 내가 권능을 회수해서 이 던전을 닫으면 너희 세상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가?”
강하진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난 마르바스와 싸워 이길 거다.”
“고작 너 따위가? 마르바스는 너보다 수십 배는 더 강하다.”
“나도 알아. 하지만 당장 여기 나타날 수는 없지. 나한테는 시간이 있어. 마르바스가 내 앞에 설 때쯤이면 분명히 그놈을 죽일 수 있게 될 거야.”
카르난이 피식 웃었다.
“자신감만은 높이 사주지. 좋아. 다른 방법을 알려주마. 내 권능의 출력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꼭 내 육체일 필요는 없어.”
카르난은 그렇게 말하며 강하진을 바라봤다.
마치 네가 그걸 감당할 수 있느냐고 묻는 듯했다.
강하진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카르난의 머리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지금 뭐 하는 거냐? 어디로 가는 거야? 이 던전 안 닫을 건가? 뭐 하느냐니까?”
강하진은 대답하지 않고 카르난의 나머지 육체를 묻은 장소로 향했다.
중심부에서 가까운 곳은 아니었지만 약간 서두르니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카르난은 조각난 자신의 몸, 아니, 다시 배양해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들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내 몸에 이따위 장난질을 쳐? 이 찢어 죽일 마르바스 놈 같으니.”
“자, 이제 슬슬 던전을 닫아보자고.”
카르난의 표정이 확 굳었다.
“설마······ 이것들을 쓰려는 건가? 턱없이 모자란다. 이것들만으로는 내 권능을 감당할 수 없어.”
“그건 나도 알아.”
강하진은 카르난을 바닥에 내려놓기 전에 살짝 들어 눈을 마주쳤다.
“수작 부리지 마라. 네 머리는 항상 열려 있다는 거 명심해.”
“알았으니까 그만 내려놔라.”
강하진은 카르난의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모든 감각을 동원해 카르난이 하려는 짓을 세세히 살폈다.
일단 여섯 구의 육체를 나란히 놓았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카르난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강하진의 집중력이 카르난의 머리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파악했다.
카르난의 머리에서 뭔가가 스멀스멀 흘러나와 여섯 육체에 담긴 권능에 닿았다.
그 순간 세상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현실감 넘치는 진짜 세상이었는데, 마치 짙은 환영 같은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던전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퍽!
육체 하나가 터져 가루가 되었다.
하지만 육체는 아직 다섯이나 더 남아 있었다.
세상이 더 흐려졌다.
퍽! 퍽! 퍽!
육체가 하나씩 터질 때마다 세상이 점점 더 흐려졌다.
강하진은 그때까지 카르난의 머리에서 벌어지는 일을 계속 관찰했다.
그리고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터진 육체에 남아 있던 힘과 권능이 카르난의 머리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것을 말이다.
애초에 강하진이 예상했던 범위 내의 일이었다.
강하진은 마지막 육체가 남았을 때, 카르난의 머리에 접속했다.
아까 해본 것도 있고,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러려고 준비했기 때문에 바로 접속이 가능했다.
카르난이 눈을 부릅떴다.
“너······!”
“집중해. 거의 끝났잖아.”
“이 미친 새끼가!”
욕을 하긴 했지만 하던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퍽!
마지막 육체가 터졌고, 세상이 거의 사라질 것처럼 희미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히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었다.
카르난의 머리에서 몸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카르난이 원한 건 자신의 완벽한 육체와 힘을 되찾는 것이었다.
이대로 멈추면 모든 걸 잃게 되니 강하진이 두뇌에 접속해 있는데도 그냥 계속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목 아래에 작은 도마뱀 몸통 같은 육체가 불쑥 솟아나더니 이내 그것이 쑥쑥 자라나 카르난의 원래 모습처럼 변했다.
“으하하! 된다! 된다!”
“던전 마저 닫아야지.”
강하진의 말에 카르난이 소리쳤다.
“하고 있잖아! 권능의 출력을 받아줄 힘이 모자란단 말이다! 그냥 기다려! 내 몸으로 직접 출력을 받아서 해결할 테니까!”
“원래 내 몸을 쓰려고 했던 거 아니었나?”
“내 몸을 이렇게 간단히 되찾을 수 있을 줄 몰랐지.”
“왜 그렇게 간단히 되찾았을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그럼 원래는 설마 내 몸을 빼앗으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카르난이 순간 눈에 보일 정도로 움찔했다.
그걸 본 강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회귀 전에 마족을 얼마나 많이 상대해 봤는데 카르난의 말을 믿었겠는가.
“그래도 던전은 많이 닫았네. 더 닫을 건지는 모르겠지만.”
“완벽하게 처리해 줄 테니까 잠자코 기다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카르난은 그렇게 말하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긴. 하던 일 마무리 하는 짓이지.”
안 그래도 흐려져서 굉장히 희미한 상태이던 세상이 급격히 흐려지더니 이내 퍽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강하진은 어느새 다시 거대 던전이 있던 자리에 서 있었다.
카르난은 사라졌다.
아마 던전과 함께 소멸했을 것이다.
아니면 투영이 만들어낸 허상에 갇혔거나.
강하진은 마지막에 카르난의 두뇌에 접속해서 자신이 벌인 일을 차근차근 되새겨봤다.
충분히 준비를 했어도 남의 두뇌에 접속해 권능을 다룬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르난이 진행하던 일이었기에 그걸 이어서 진행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사실 던전을 닫으면 카르난도 밖으로 튕겨 나올 줄 알았다. 한데 그 안에 남았다니 좀 의외였다.
어쨌든 마르바스의 음모 하나를 막았다.
더불어 카르난의 두뇌를 통해 권능을 주무른 덕에 얻은 것도 있었고.
[환영살포(A)]
[카르난의 권능 ‘투영’에서 비롯된 스킬. 제물을 사용해 주변에 환상을 펼친다. 환상이 펼쳐지는 반경과 현실감은 제물과 숙련도에 따른다.]
환상을 통해 세상을 구현하는 스킬이었다.
투영과 달리 현실감이 있어도 실재하는 건 아니다.
제물이 필요한데, 제물에 따라 현실에 거의 흡사할 정도의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도 가능한 스킬이었다.
강하진은 과연 이걸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슬슬 한국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