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성을 원하는 이유 2 >
강하진은 자신을 방문한 최대길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봤다.
최대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암시장을 장악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강하진이 그렇게 말하며 최대길을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최대길은 당치 않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엄살을 부렸다.
“어이구,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하수인 두 놈만 제거했지 정작 원흉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앞으로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A-마켓을 잘 이용해서 DM만 어떻게든 막아내면 암시장이야 뭐 어려울 일 있겠습니까?”
강하진의 말에 최대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 A-마켓만 믿고 있다가 이번에 뒤통수 제대로 맞았습니다만······.”
“에이, 그럴 리가요. A-마켓은 맡은 일을 충실히 했죠.”
최대길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외국인 용병들 잠깐 막아준 게 전부 아닙니까. 그 정도는 솔직히 돈만 좀 들이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강하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A-마켓이 맡은 일이 고작 외국인 용병을 막는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최대길이 움찔 했다.
솔직히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A-마켓의 진짜 역할은 DM을 견제하는 것이다. 여력이 되면 제영 그룹과 화신 그룹도 견제하고 말이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솔직히 A-마켓이 조금만 더 신경을 써 줬으면 우리가 몸을 빼기 전에 그놈들이 도착할 일도 없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결국 SE 용병대의 남은 각성자들이 최대길이 그곳을 떠나기 전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상처 입은 맹수였다.
최대길은 그 때문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물론 SE 용병대도 멀쩡히 돌아가진 못했지만.
더불어 그곳에 있던 암흑가 놈들 역시 싹 정리했다.
암흑가에서 온 놈들은 양쪽에 끼인 꼴이 되어서 그야말로 처참하게 뭉개졌다.
“그래도 결과는 좋았죠? 원하던 건 전부 얻지 않았습니까.”
표면적으로 최대길이 원하는 건 최선호, 최선우를 잡아 암시장을 장악하는 것과 A-마켓의 힘을 이용해 DM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 두 가지 모두 훌륭하게 마무리 되었다. 그러니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끄응. 그야 그렇지요. 이번에 강하진 씨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참, 선호랑 선우는 대체 어떻게 찾으신 겁니까?”
“우연히 발견했죠. 뭐, 그 두 사람 찾는 것 정도는 최대길 씨도 별로 어렵지 않잖아요?”
“뭐, 그야······.”
최대길은 말을 얼버무렸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보다 먼저 찾았다는 게 중요한데, 그냥 운이라고 해버리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약속은 지키실 거라 믿습니다.”
최대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지켜야지요. 계약서까지 작성했는데. 일단 내부 정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니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다음에 차근차근 진행하겠습니다.”
“그러시죠.”
강하진은 흔쾌히 허락했다. 사실 시간을 끌면서 딴 주머니를 차려는 것이 분명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참, 제가 좀 알아보니 그놈들이 준비한 함정 말입니다.”
“예?”
최대길이 함정이라는 말에 흠칫 놀라 강하진을 바라봤다.
강하진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함정이 각성 던전이라고 하던데,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최대길은 순간적으로 망설였지만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다고 우겨 봐야 소용이 없을 테니까.
“맞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그럼 혹시 각성 던전에 들어가셨습니까?”
최대길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원래라면 표정 관리를 했어야 하지만, 당시의 충격이 워낙 커서 순간적으로 표정이 드러났다.
“구경도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거기에 있던 암흑가 놈들 중 하나가 얻어간 것 같은데······.”
강하진이 살짝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왜요? 아깝습니까?”
“하하.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각성을 하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요. 그래도 암시장을 지배하는 분이니 각성 따위 안 하면 좀 어떻습니까? 진짜 강함은 육체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최대길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 말은 각성을 해서 강인한 육체를 얻었으니 할 수 있는 소리다. 아무리 큰돈과 권력을 얻으면 뭐하겠는가. 몸이 망가지면 끝인 것을.
‘젠장! 생각할수록 아깝네.’
강하진은 최대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아예 농담은 아닌 듯하군요. 정말 각성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하하. 관심이야 아주 많습니다. 왜요? 알고 계신 각성 던전이라도 하나 있습니까?”
“각성 던전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것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 적은 있죠.”
최대길의 표정이 확 변했다.
“비슷한······ 것?”
“일반인을 각성시키는 아이템이 있더라고요.”
최대길은 하마터면 벌떡 일어나 정말이냐고 소리칠 뻔했다. 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안 그래도 오늘 실수를 너무 많이 했다. 확실히 이번 일에 타격을 많이 받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더 이상 흔들려선 안 된다. 최대길은 마음을 다잡고 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대단하군요. 그런 아이템이 있다니.”
“재미있지요? 뭐, 각성자들에게는 별 필요가 없으니 굳이 구하려고 애쓸 사람은 없겠지만요.”
최대길은 속으로 안달이 났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를 안 냈다.
“재미있군요. 그리고 저 같은 보통 사람 입장에서는 제법 대가를 많이 지불하더라도 구할 수 있으면 구하는 게 좋지요.”
“그건 또 그렇겠군요.”
“아무튼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내부 정리가 끝나면 다시 찾아뵙지요.”
최대길은 서둘러 돌아갔다.
아마 돌아가면 각성 아이템을 구하려고 발버둥을 칠 것이다. 그리고 강하진이 그 아이템을 갖고 있지 않을까 의심할 테고.
강하진은 밖으로 나가는 최대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제 최대길이 대체 왜 저렇게 각성에 집착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낼 차례였다.
* * *
회의실 원탁에 다섯 사람이 빙 둘러 앉아있었다.
분위기는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일로 인해서 그동안 공들였던 모든 것이 싹 무너져 버렸다.
일단 A-마켓을 견제할 방법 하나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암시장도 손에서 떠나 버렸다.
마지막으로 암흑가에 펼치던 작업도 모두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고작 암흑가의 싸움에 숟가락 한 번 얹은 결과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다들 침울했는데, 그 중 가장 표정이 안 좋은 사람은 제이크였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철수하게 될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아직 시작도 제대로 안 했잖습니까!”
“우리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투자와 협조를 했는데 이제 와서 이러시면 안 되죠!”
조원영과 화신 그룹에서 나온 책임자가 거의 동시에 말을 쏟아냈다.
반면 신라 길드와 ATG 길드에서 나온 자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자자, 일단 진정하시죠.”
“지금 진정하게 됐습니까? 이번 일이 잘못되면 내가 얼굴이나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몇 번만 비끗하면 후계자 자리도 위태로울 텐데!”
“죄송합니다. 한국 쪽은 진척이 너무 느려서 제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일본은 어떻습니까?”
“일본이요?”
뜬금없는 말에 다들 날카로운 눈으로 제이크를 바라봤다.
“위에 계신 분들 인내심이 바닥난 모양입니다. 한국 쪽은 포기하고 그걸 다 모아서 일본을 공략하라고 하시네요.”
그래서 그냥 손가락이나 빨고 있으란 말이냐고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다들 꾹 참았다. 아직 중요한 얘기가 안 나왔으니까.
“그래서 여기 계신 분들께 일본에 투자할 기회를 드리고자 합니다.”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저희가 투자한 돈과 인력도 만만치 않은데 그걸 또 해달라는 겁니까?”
“지금 손 떼면 그 돈을 그냥 잃는 거지만, 저희와 손잡으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거죠.”
하지만 다들 망설였다. 이번에 잃은 것이 너무 컸으니까.
“일본을 시작으로 아시아 시장을 장악할 겁니다. 원래는 한국에서 하려고 했는데, 결과가 보다시피 안 좋아서요.”
“한국에서조차 자리를 못 잡았는데 과연 일본에서는 가능하겠습니까?”
“일본은 지금 크고 작은 세력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분탕질 치기가 훨씬 쉽죠. 대신 투자규모가 커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릴 끌어들이는 겁니까? 투자규모 때문에?”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일본 쪽에서도 몇몇 조직과 접촉 중입니다. 규모 때문에 말이죠.”
“그렇게 잔뜩 모아놓으면 우리한테 떨어지는 몫이 별로 없을 텐데요? 안 그래도 일본은 던전도 몇 개 없지 않습니까. 이번에 던전 사태때도 일본은 굉장히 안전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한국에서 일 벌이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아무래도 규모가 다르니까요. 게다가 일본에 던전이 몇 개 없긴 하지만 하나하나 규모가 굉장하죠.”
제이크는 그렇게 말하며 사람들에게 서류를 나눠주었다.
이번 일본 투자에 대한 사업계획서였다.
그걸 확인한 네 사람의 눈이 번득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확실히 이 정도라면 우리만으로는 좀 힘들겠군요. 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굳이 무리해서 리스크를 높일 필요도 없으니까요.”
“어떻게······ 생각 있으십니까?”
“그럼 정말 한국에서는 아예 손 떼시는 겁니까?”
조원영의 물음에 제이크가 눈을 빛냈다. 무슨 생각으로 한 말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원래는 일본을 먹은 다음 나중에 다시 한국을 공략할 예정이었습니다만······ 그 사이에 여기 있는 분들이 뭔가 성과를 이룬다면 그걸 건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이건 본사에서 내려온 지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한국을 다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DM과 연계해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겠지요. 그렇게 하신다면 전폭적으로 밀어드리겠습니다. 서로 도움이 되는 일일 테니까요.”
정확히 듣고 싶었던 말을 확인한 조원영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DM은 역시 훌륭한 기업입니다. 그럼 이제 일본 투자에 대한 얘기를 마무리 지어 볼까요?”
그 뒤로 굉장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논의가 이어져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 * *
강하진은 길드에서 자신이 처리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한 다음 느긋하게 밖으로 나갔다.
최대길이 각성 던전을 찾아 함정에 제 발로 들어갔을 때, 그에게 진흙벌레의 더듬이로 만들어 놓은 위치추적기를 붙여뒀다.
아마 최대길은 자신이 그런 걸 갖고 다닌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유동훈이 만든 진흙벌레 더듬이 위치추적기의 성능은 아주 확실했다.
예전 제영 그룹 정보실 산하에 있는 무수한 흥신소들을 하나하나 가려내 박살 낸 것도 이 위치추적기를 이용해서였으니까.
그때 흥신소들을 박살 내지 않았다면 아마 제영 그룹을 상대하는 게 지금보다 조금 더 까다로웠을 것이다. 제영 그룹 정보실의 힘은 회귀 전에도 굉장했으니까.
또한 그 뒤로 유동훈은 위치추적기의 성능을 몇 차례 더 개선했다.
크기는 훨씬 작아졌고, 내뿜는 신호는 더욱 강해졌으며, 사용하기도 굉장히 편해졌다.
강하진은 손에 든 커다란 구슬에 얽힌 복잡한 마력을 읽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최대길을 노리던 무수한 사람과 조직들이 실패를 경험한 건, 최대길이 자신의 위치를 감추는 실력이 아주 뛰어났기 때문이다.
일단 거의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분장을 잘한 가짜 최대길이 너무 많았다.
그 가짜들도 다들 진짜처럼 행동하고 위치 노출을 삼가고 있으니 누가 진짜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사실 강하진은 처음 최대길이 찾아왔을 때도 위치추적기를 붙였다.
한데 그 최대길은 가짜였다.
그래서 진짜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순간을 노렸다. 바로 각성 던전을 찾아 함정으로 들어가던 그 순간 말이다.
위치추적기는 최대훈의 머리에 붙어서 그의 머리카락 행세를 하고 있었다.
아마 힘껏 쥐어뜯지 않는 이상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 찾아온 최대길은 진짜였다.
강하진은 마력이 이끄는 대로 이동했다.
최대길의 은신처는 여러 군데였는데, 벌써 강하진이 파악한 곳만 다섯 군데였다.
오늘 최대길이 향하는 곳은 강하진이 있는 가디언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번화가였다.
유동인구가 엄청난 곳인데, 당당하게 거기에 거처를 마련해 놓은 모양이었다.
사람 속에 숨는 전략이었다.
다른 사람을 최대길로 변장시킬 수 있다는 건,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지금의 최대길도 어느새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어쨌든 오늘 최대길이 가는 곳은 강하진이 최대길을 감시하기 시작한 이후 처음 들르는 은신처였다.
강하진은 왠지 그곳이 진짜라는 느낌이 들었다.
최대길이 계속 감추고자 한 것을 바로 그 은신처에 보관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강하진의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