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1 >
살짝 어둡지만 넓고 화려한 방, 창문 하나 없는 밀실에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은 조원영이었다.
사실 조원영보다 더 우위에 있는 사람은 함께 참석한 제이크였지만, 제이크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아무리 제이크가 DM에서 나왔다고는 해도 DM의 후계자도 아니었고, 그저 이번 임무의 담당자일 뿐이었으니까.
그 두 사람 앞에는 최선호와 최선우가 약간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자, 일단 한 잔 마시고 시작합시다. 서먹서먹한 분위기로 중요한 얘기를 할 수는 없잖습니까. 하하하.”
조원영이 기분 좋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가볍게 건배를 하고 술을 쭉 들이켜니 속이 화끈거렸다. 제법 도수가 높은 술이었다.
“두 분, 준비는 순조롭죠?”
아니라는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기에 질문을 하긴 했지만 어조는 단정적이었다.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최선호가 얼른 말했다.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았다.
조원영의 눈이 번득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 준비가 순조롭냐고 물었는데?”
“준비는 순조롭습니다. 하지만 걸림돌이 생겼습니다.”
“걸림돌?”
“아무래도 최대길이 눈치챈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조원영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래서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최대길을 먼저 처리하면 안 되겠습니까?”
조원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저랑 장난하십니까?”
“이러다가 우리 뒤가 털리게 생겼는데 그럼 어쩝니까?”
“그 정도 리스크는 감수해야죠. 설마 아무 일도 없이 순조롭게 일이 끝날 줄 알았습니까?”
최선호가 입을 꾹 다물고 조원영을 노려봤다.
하지만 조원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짜증나는군.’
전쟁을 먼저 마무리하겠다던 지창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왠지 이번 일이 그때와 오버랩되었다.
“당신들끼리 알아서 해결할 수 있습니까?”
최선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가능하면 왜 이들과 손을 잡았겠는가.
“그러니까, 우리 지원을 받아서 암시장을 꿀꺽 하시겠다? 그 다음에 입 씻어 버리면 난 지붕만 쳐다보는 개새끼가 되겠네?”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됐고. 최대길 위치 파악은 가능합니까?”
“함정을 파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대길 하나만 뽑아내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어차피 싸워야 하니 그건 상관없었다. 아무 피해 없이 암시장을 접수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제대로 함정에 빠뜨리면 그쪽에 피해를 강요한 뒤에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정도만 돼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조원영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최선호와 최선우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투 각성자를 최대한 지원해주셨으면 합니다.”
조원영이 어이없는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봤다.
“최대한? 최대한이라고 했습니까, 지금?”
“예. 피해를 줄이고 싶습니다.”
조원영은 당연히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물론 지원은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지원이 전투 각성자는 아니었다.
지금 공들이고 있는 암흑가에서 전력을 뽑아낼 계획이었다. 반쯤 작업이 완료되었고, 미끼도 던져뒀다.
아마 간단히 낚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역시 그들에게는 함정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겠지만.
그렇게 암흑가 자체의 힘을 약화시킨 다음 차근차근 먹어치울 계획이었다.
지창기가 사라졌으니 대안을 마련해야하지 않겠는가.
원래는 좀 다른 계획을 세웠었지만, 암시장을 끌어들이면서 새로 계획을 손봤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향후 암시장을 잘 컨트롤 하려면 어느 정도 피해를 입히는 것이 낫고 말이다.
당연히 각성자를 지원해줄 생각은 없었다.
‘안 그래도 지창기 때문에 죽은 각성자가 많아서 골치 아픈데 말이야.’
조원영이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않자, 최선호와 최선우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직전, 계속 침묵을 지키던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두 분께 새로운 제안이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새로운 제안?”
최선호와 최선우는 물론이고 조원영까지 놀란 눈으로 제이크를 바라봤다.
“우리 DM은 꼭 양지의 유통만 담당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없습니다. 사실 음지와 양지의 모든 유통을 장악하는 던전 유통 제국을 건설할 계획이지요.”
세 사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노골적으로 몽땅 먹어치우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내일 용병들이 도착합니다. 제가 본사에 요청했지요.”
“용병?”
“전원 각성자로 이루어진 용병입니다. PMC에서 각성한 용병들을 뽑아서 구성했습니다.” PMC는 민간 군사기업이다. 그러니 전투 경험이 풍부한 각성자들이 한국에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그 용병들을 암시장에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제이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암시장을 넘기시죠.”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다.
하지만 제이크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두 분, 암시장으로 만족할 생각은 아니시죠? 최소한 유통 제국 DM의 한국 지부장이나 아시아 본부장 정도 자리에는 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욕망을 사정없이 자극하는 말이었다.
* * *
강하진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어제 최대길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니, 연락이라고 하기에도 그렇다. 그저 문자만 하나 달랑 왔을 뿐이니까.
-전 3일 후에 함정으로 들어갈 겁니다.
딱 이 한 문장이었다.
“그러니까 함정으로 들어갈 거니까 구하든 말든 알아서 해라 이건가?”
이건 또 뭔 참신한 캐릭터란 말인가. 강하진이 손 놓으면 그냥 죽는 거 아닌가.
게다가 내일도 아니고 지금도 아니고 3일 후는 또 뭔가.
“이건 그냥 글피까지 준비 좀 해달라는 거랑 뭐가 달라?”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어쨌든 최대길을 살리고 암시장이 DM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건 막기로 결정을 내렸으니까.
아마 최대길 역시 함정이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최대한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걸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해서 강하진을 끌어들이려 하는 것일 테고.
그래서 어제 명인혁에게 그쪽에 대한 조사를 지시해뒀다.
원래라면 아무리 명인혁이라고 해도 경험이 많이 쌓이기 전이기 때문에 암시장을 감시하고 그쪽의 정보를 캐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최대길이 암시장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여러 투르를 제공해줬다.
명인혁은 그걸 이용하면서 자신만의 방법을 섞어서 최대길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질의 정보를 뽑아낼 수 있었다.
몇 번 시험 삼아 정보를 뽑아봤는데,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그때 최선호와 최선우에 대한 근황 정보를 잔뜩 얻어낼 수 있었다. 또한 암시장의 세력분포와 시장상황까지 싹싹 긁어냈다.
그와 동시에 정보 수집 루트를 훨씬 정교하고 은밀하게 보완할 수 있었다.
이번이 그렇게 보완한 이후 첫 실전이었기에 기대하는 바가 컸다.
그렇게 어제 일을 곱씹고 있을 때, 명인혁이 다급히 들어왔다.
“마스터, 어제 말씀하셨던 자료입니다.”
명인혁이 얼른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물론 요약 설명을 직접 할 생각이었다.
“최선호와 최선우가 최대길 씨를 없애려는 모양입니다.”
“그래?”
그거야 충분히 예상했다. 암시장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다는 건 암시장의 정보력도 반쯤은 갖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최대길보다는 못하겠지만.
최대길은 암시장의 중심을 쥐고 있었다. 그래서 최선호와 최선우가 외부 세력을 끌어들인 것이기도 하고.
“거기에 이상한 놈들이 끼어들어서 조사가 좀 늦어졌습니다.”
“이상한 놈들?”
“며칠 전에 한국에 입국한 외국인들인데 전원 각성자입니다.”
“각성자로 이루어진 외국인들?”
“네. 그래서 조사를 좀 해봤는데, 전원 PMC에 근무하던 용병들이었습니다.”
“용병?”
강하진은 그 순간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SE 용병대?’
회귀 전에 비슷한 걸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특수부대 출신의 용병들만으로 구성된 용병대였다. 그리고 DM의 타격부대이기도 했다.
DM에서 지저분한 일을 처리할 때마다 잘 써먹었던 용병대인데, 강하진은 그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거의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알았다.
그때는 오직 던전을 이 세상에서 없애는 일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DM에 실망을 하는 데 쓸 감정도 없었다.
아무튼 문제는 그놈들이 아주 지독하다는 것과 DM의 사냥개들이니 이번 일에 끼어들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점이었다.
아니, 무조건 끼어든다. 그게 아니면 굳이 한국에 올 일이 없을 테니까.
지난 번 지창기가 너무 허무하게 끝장나서 이번엔 칼을 갈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놈들 말고 다른 특이점은 없어?”
“들어온 외국인 각성자가 또 있습니다..”
“이놈들이랑은 다른 놈으로?”
“네. 알아보니 A-마켓에서 부른 각성자들이더라고요.”
강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A-마켓도 제대로 준비 중이었다.
한국에 있는 각성자들 만으로는 인원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좋아. 그건 A-마켓에 맡기고, 그럼 이제 끝인가?”
“아뇨.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제영 그룹을 비롯한 그놈들이 암흑가를 들쑤시고 다니는 중입니다.”
“암흑가?”
“이번 일에 암흑가까지 끌어들이려는 거죠.”
“그거, 막을 수 있나?”
명인혁은 강하진을 똑바로 바라보고 자신 있는 표정으로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습니다.”
강하진은 그런 명인혁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엿보기 스킬을 썼다.
전부 얼마 전에 확인한 그대로였다.
한데 왠지 예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훨씬 믿음직했다.
“그래. 믿는다.”
명인혁이 씨익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SE 용병대 얘기를 듣고 생겼던 불안감이 살짝 희석되었다.
“그럼······ A-마켓을 움직여 볼까?”
강하진은 전화기를 들었다.
* * *
정아연은 불안한 눈으로 30명의 각성자들을 바라봤다.
정말 고르고 골라서 뽑은 자들이었다.
한국에 있는 각성자 중에서는 뽑을 사람이 많지 않아서 결국 본사에 은밀히 연락까지 해서 각성자를 데려왔다.
현재 A-마켓은 DM과의 신경전 때문에 상부의 분위기가 굉장히 날카로운 상태였다.
하지만 그 상부에도 분명히 배신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쪽 상황을 함부로 공개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만한 인원을 모으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평소 같으면 전화 한 통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에 불과한데 말이다.
배신자 처리는 아직도 준비 중이었다. 단숨에 쳐내야 일이 깔끔하게 끝난다.
아마 이번 암시장과의 일이 시작되기 전에는 배신자 처단이 마무리 될 것이다.
“이번 일의 생명은 비밀유지입니다.”
정아연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30명의 각성자들을 한 번 둘러봤다.
그들은 당장에라도 칼을 휘두를 것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우리가 오늘 상대해야 할 적은 SE 용병대입니다.”
각성자들 사이에 살짝 동요가 일었다.
SE 용병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의미가 남달랐다.
DM과 얽히기 시작한 순간부터 끊임없이 싸워야만 했던 놈들이니까.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상대할 건 A팀이 아니라 D팀이니까요.”
D팀이라는 말에 다들 안도했다. SE 용병대의 A팀은 정말 괴물 같은 놈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 있는 이 수준의 전투 각성자들로는 아예 싸움 자체가 안 된다.
하지만 D팀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그리고 우리의 임무는 기습입니다. 이동 중인 D팀을 기습할 겁니다. 그들을 모두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시간을 끄는 거니까요.”
정아연은 불안한 속마음과는 달리 굉장히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에 펼치는 모든 작전은 가디언스가 세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A-마켓이 주도하면 비밀이 DM 쪽으로 새 나갈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A-마켓의 풍부한 인력풀을 쓸 수 있었다면 아마 훨씬 정교하고 확실한 작전을 세웠으리라.
DM의 마수가 A-마켓 내부 깊숙하게 뻗어 있다는 걸 확인한 이후부터 자체적인 정보망도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작전은 오직 가디언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스마트폰으로 지도 하나가 전송되었다. 아니, 지도가 아니라 어플이었다.
목표의 동선이 표시되는 지도 어플이었다. 발신자는 강하진이었다.
“자, 출발합니다.”
정아연과 30명의 각성자를 태운 승합차들이 일제히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