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의 악연들이 모이면 3 >
딱 한 번의 싸움이 암흑가에 가져온 파장은 적지 않았다.
태산은 서울과 경지 지역을 나눠먹은 나머지 세 조직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팽팽하게, 아니 오히려 유리하게 전쟁을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다들 태산의 역량을, 아니 태산을 이끄는 지창기의 역량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맞서 싸우는 조직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들 역시 오랫동안 서울과 경기의 밤을 지배하던 자들이었으니까.
그리고 경기도의 어느 창고지대에서 그 전쟁의 마지막 싸움이 벌어졌다.
그날 살아남은 사람이 고작 30명 남짓이었다. 실질적으로 네 조직의 핵심이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 충격적인 건 지창기가 그 와중에 죽었다는 점이었다.
지창기가 죽을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어쨌든 지창기가 죽으면서 태산은 무너진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냥 혼자 가서 죽었으면 모르겠는데, 조직의 정예를 싹 끌고 가서 다 죽여 버렸다.
태산은 회생이 거의 불가능했다.
명일을 비롯한 나머지 두 조직 역시 처지가 비슷했다. 그날 싸움을 너무 크게 벌였다.
그래도 태산처럼 올인하진 않았기에 조직을 유지할 힘은 남았지만, 이대로라면 승냥이 같은 놈들에게 뜯어 먹히고 말 것이다.
그 승냥이들이 슬슬 움직일 기미가 보였다.
그동안 힘이 없어서 숨죽이고 지내던 모든 조직들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로 인해 서울과 경기 지역에 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난장판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들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의 없다는 건 누군가는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강하진이었다.
강하진은 명인혁이 신 나서 말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게 오늘의 세력 분포도 입니다.”
현재 서울 경기 지역 암흑가 상황이 서류 한 장에 표와 도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게 최근 영입한 정보원입니다.”
몇 장의 서류를 추가로 넘긴 명인혁이 반짝이는 눈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았다.
“이 정보원은 그러니까 저 조직들에서 포섭한 거지?”
“네. 성장 가능성까지 다 따져서 포섭했습니다. 조직에서 나가더라도 굶어죽지는 않을 놈들이에요.”
“대단하네.”
진심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정보망을 쫙 깔아놓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솔직히 명인혁에게 기대한 것은 이런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나서서 뽑아내는 고급 정보들이었다.
한데 보아하니 명인혁을 너무 단편적으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명인혁은 정보를 다루는 능력 자체가 달랐다.
‘그래서 그런 스킬을 얻게 된 건가?’
어쩌면 랜덤하게 스킬을 배정하는 게 아니라 재능에 따라 내려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네가 보기에 암흑가 전쟁은 누가 이길 거 같아?”
“아무도 못 이깁니다.”
강하진이 흥미로운 눈으로 명인혁을 쳐다봤다.
“이대로 서로 피해를 누적하다가 적당한 시점에 각자 알아서 영역을 구축하고 자리를 잡게 될 겁니다. 누군가 개입하지만 않으면요.”
강하진이 눈을 빛냈다.
“그 얘기는 지금 누군가가 개입한다는 건가?”
“아직은 아닌데, 그럴 기미가 보입니다.”
“누가?”
명인혁이 씨익 웃었다.
“누구긴 누구겠어요. 뻔하죠.”
“제영?”
“제영도 그 중 하나고요. 거기에 화신, 신라, ATG까지 더하면 딱 맞아요.”
강하진이 피식 웃었다.
“뒤가 구린 놈들이 암흑가에 집착하는 법이지.”
“정말 구린 놈들이더라고요. 하나하나 뭔가 알아낼 때마다 악취가 코를 찔러요.”
“그래서, 그놈들이 이번엔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암흑가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개편하려는 모양이에요.”
“개편이라······.”
“통합하려면 오히려 더 힘이 드니까 적절히 묶어서 관리할 생각인 거죠.”
“중심이 될 조직을 선별해서 연합을 구성하려는 건가?”
“정확해요. 벌써 조직 선별과 분류는 끝난 모양이더라고요.”
“접촉 중이겠군.”
“그러니까 제가 파악했죠.”
명인혁이 빙긋 웃으며 또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각 조직을 담당하는 담당자 명단이랑 약속한 지원 내용입니다.”
강하진은 서류를 받아 확인하고는 또 한 번 감탄했다.
“대체 이런 건 어떻게 알아낸 거지?”
“정보원의 역할이 큽니다. 그리고 전자장비도 적절히 이용하고요. 장비제작팀에서 개발한 장비도 아주 유용하고요.”
그리고 명인혁이 직접 움직여서 알아낸 정보도 있고, 정보팀 요원 중에 특별한 스킬을 가진 각성자도 있고 말이다.
“아무튼 수고가 많았다. 앞으로도 계속 주시하고, 특이사항 발생하면 바로 연락하고.”
“네.”
강하진은 명인혁을 얻은 것이 더없이 든든했다.
“참, 인수는? 설마 아직도 레벨업 중이야?”
명인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네. 요즘 레벨업에 재미를 붙여서 아주 신 났더라고요. 마력이 이제 제법 많이 늘었다고 꼭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까지 받았습니다.”
“그래? 그럼 조만간 한 번 만나봐야겠군.”
마력이 많이 늘었다면 이제부터 조금씩 스킬과 마력 사용에 대한 데이터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언제 명인수의 스킬이 필요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 인수는 보기가 힘들긴 하네.”
명인수를 만나러 제법 자주 왔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요즘 아예 던전에서 살다시피 하거든요. 솔직히 저도 잘 못 보고 있습니다.”
“그래? 좀······ 걱정이 되는데? 어느 던전으로 갔는지는 알고?”
“네.”
명인혁은 동생의 위치를 꾸준히 확인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던전에 들어갔다.
메모지에 던전의 위치를 적어 넘기자, 강하진은 그걸 확인하고는 표정이 굳었다.
‘들어가서 확인해봐야 하지만······ 왠지 느낌이 안 좋은데?’
“왜 그러십니까?”
명인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하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은 걸 봤기 때문이다.
강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느낌이 좀 안 좋아. 내가 가서 확인을 해보는 게 낫겠다.”
강하진은 불안한 표정의 명인혁을 뒤로하고 얼른 길드 본부에서 나갔다.
* * *
재앙 이후로 던전을 빨리 닫아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형성되었다.
그 여론을 만드는 데 강하진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던전을 빨리빨리 닫지 않으면 나중에 어떤 참사가 벌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강하진은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패를 써서 여론을 형성했다.
A-마켓과 던전 브레이커가 큰 도움을 주었다.
어쨌든 그런 강력한 여론을 형성한 덕분에 각성자 관리청이나 거대 길드에서도 예전처럼 던전 하나를 잡고 편안하게 이익을 창출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그런 짓을 하다가 걸리면 대번에 여론의 뭇매를 맞을 테니까.
정치적 압박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아무리 거대 길드나 대기업이라 해도 버티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던전을 빨리 처리하고 다음 던전을 찾아다니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각성자 관리청은 던전을 발견하면 철저히 신고하게 하고, 그것을 각 길드를 비롯해 신청자에게 순차적으로 배분했다.
당연히 공정한 배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던전 브레이커는 던전을 할당 받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대기업이나 거대 길드보다는 못했지만.
명인수가 들어간 던전은 던전 브레이커에 할당 된 던전 중 하나였는데, 청계천 근처에 있었다.
강하진은 청계천이라는 위치만 듣고 떠오른 기억 때문에 살짝 불안했다.
회귀 전에 청계천에서 나타났던 던전 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시기가 좀 다르지만, 회귀 전과 지금 달라진 게 많으니 혹시 몰랐다.
청계천은 가디언스 본부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강하진은 서둘러 청계천으로 달려갔다.
던전의 위치는 정확히 청계천이 아니고, 그 근처였다. 하지만 찾는 데 문제는 없었다.
청계천이 보이는 곳에 있었으니까.
던전 입구에는 각성자 관리청 직원과 던전 브레이커의 직원이 있었다.
그리고 던전 브레이커와 계약한 경호업체에서 나온 경호원들이 있었다.
혹시 던전에서 사냥을 하고 있을 때, 아무나 난입해 방해하거나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이다.
강하진이 던전으로 다가가자, 가장 먼저 경호원들이 나섰다.
“던전 브레이커에서 사냥을 진행 중입니다.”
경호원들이 막아서자, 강하진은 직원을 쳐다봤다.
당연히 던전 브레이커의 직원이라면 강하진의 얼굴은 알고 있어야 한다.
“어? 가디언스의 마스터 아니십니까.”
직원 하나가 후다닥 달려와 강하진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박영호입니다. 전에 인사 드렸었는데······.”
“네. 기억합니다. 안녕하십니까.”
강하진이 알아주자 박영호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한데 여긴 어쩐 일로······ 아! 명인수 군 때문이군요.”
강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아우, 물론입니다.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다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박영호가 관리청 직원을 힐끗 쳐다보고는 그렇게 말하자, 강하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편의 봐주신 것 잊지 않겠습니다.”
박영호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아이구, 그래 주시면 저야 너무너무 감사하죠. 자자, 어서 들어가십시오.”
강하진은 서둘러 던전으로 들어갔다.
박영호는 강하진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바라봤다.
* * *
던전에 들어간 강하진은 일단 주위를 둘러봤다.
“이거 아무래도 예상이 맞는 것 같네.”
겉보기에는 황무지가 쫙 펼쳐진 아주 평범한 던전이었다.
재앙 이후 나타난 던전들은 그리 난이도가 높지 않았다.
일종의 휴식기였다.
나오는 괴물의 레벨도 낮고 사냥도 어렵지 않기에 명인수 같은 저레벨 각성자가 성장하기에는 환경이 제법 괜찮았다.
회귀 전에는 휴식기가 4개월 정도였다.
그리고 그 휴식기의 끝에 본격적인 던전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던전이 나타나는데, 한국에서는 그게 청계천 던전이었다.
그래서 좀 방심하긴 했다. 설마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이 던전이 등장할 줄은 몰랐다.
‘하긴, 모든 것이 빨라졌으니까.’
이 던전은 평범해 보이지만, 흐르는 마력이 다른 던전과 달랐다.
기존 던전에 흐르는 마력에 비해 훨씬 난폭하고 양도 많았다.
이런 던전에 사는 괴물이 평범할 리 없었다.
강하진은 서둘러 던전 안쪽으로 들어갔다.
일단 다른 곳보다 마력의 흐름이 훨씬 거친 곳을 향해 달렸다.
이내 거대한 돌무더기가 하나 보였다.
거의 작은 언덕만 한 돌무더기였다. 그건 평범한 돌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강하진이 다가가자 돌무더기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거대한 골렘이 되었다.
반사적으로 엿보기 스킬을 썼다.
[돌거인]
[레벨 : 358]
[체력 : 1350000, 마력 : 320000]
[땅 흔들기, 분쇄, 신체수복, 돌구슬탄]
[마르바스가 보낸 괴물 부대의 선봉장. 혼돈의 마물이 거점 확보에 실패하자, 두 번째 계획의 일환으로 보낸 괴물.]
“그나마 다행이네.”
이 던전에서 나타나는 진짜 괴물이 여기 있으니 아마 다른 곳에 있는 괴물은 평범할 테니까.
던전 전쟁이 시작되면서 던전에 생기는 가장 큰 변화는 던전이 유지되는 시간이었다.
청계천 던전은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터져 버렸다.
그리고 저 돌거인이 등장해 주변을 휩쓸어 버렸다.
걸을 때마다 땅을 흔드는 걸로도 모자라 몸에 닿는 것들을 [분쇄]로 부숴 버리는 놈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머지 두 스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신체수복]은 주변에 있는 돌이나 흙을 빨아들여 부서진 몸을 다시 쌓는 스킬이었다.
신체수복에는 마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저 마력을 다 쓰게 해야 간신히 죽일 수 있는 괴물이었다.
마지막으로 [돌구슬탄]은 손바닥에 돌구슬을 무수히 만들어 발사하는 스킬이었다.
기관총을 쏘는 거나 다름없을 정도의 파괴력이기 때문에 회귀 전에는 저 스킬에 정말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그나저나 두 번째 계획이 뭐지?’
마르바스와 관계된 키워드라서 그런지 엿보기 스킬을 썼는데도 정보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분명히 던전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던전을 이용해 지구와 이계의 통로를 만든다거나.’
구구구구구!
강하진이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돌거인이 강하진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 저놈부터 부수고 시작해야지.”
강하진이 손에 [분쇄]스킬을 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