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돈의 마물 >
혼돈의 마물은 과장 좀 보태서 작은 산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거대했다.
마치 무수한 살덩어리를 쌓아 뭉쳐서 만들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끊임없이 꿈틀대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마력이 요동치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아마 저것이 통로를 뚫는 작업인 모양이었다.
강하진이 바로 옆까지 다가갔는데도 혼돈의 마물은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강하진을 공격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아니, 아마 생각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
그냥 입력된 설정대로만 움직이는 괴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마르바스에 의해 만들어지고 설정이 프로그래밍 된 괴물 말이다.
강하진은 일단 공격부터 하려고 한 발 더 다가갔다.
그 순간 혼돈의 마물이 부르르 떨더니 새까만 안개를 울컥 뿜어냈다.
세 가지 보유 스킬 중 하나, 죽음의 안개였다.
강하진은 혹시 몰라 얼른 뒤로 물러났다.
검은 안개가 혼돈의 마물을 중심으로 쫙 퍼져 나갔다.
그러자 땅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바닥을 뚫고 스켈레톤들이 덜그럭거리며 일어났다.
‘예전에도 저런 스킬을 썼던가?’
썼는지 안 썼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마 썼더라도 저렇게 스켈레톤을 뽑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저 스킬이 땅속 어디까지 미치는지 모르지만 서울 한복판에 시체가 몇 구나 묻혀 있겠는가.
어쨌든 지금은 스켈레톤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혼돈의 마물을 처리하기 전에 저 스켈레톤부터 해결하는 게 순서이긴 했다.
그런데 스켈레톤이 정말 끝없이 일어났다.
이 아래에 시체가 대체 얼마나 많이 묻혔는지 스켈레톤이 너무 많아서 잘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혼돈의 마물 주위를 꽉 둘러쌌다.
강하진은 아공간에서 거대한 해머를 꺼냈다.
유동훈이 가장 최근에 만든 무기 중 하나였다.
속성의 힘을 싣기 편하게 중심에 마력의 통로가 새겨진 해머였는데, 오직 강하진만을 위해 설계해서 만든 장비였다.
강하진은 이것 말고도 여러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상황에 맞게 쓰려고 미리 준비해뒀다. 아공간이 많으니 그런 건 편했다.
어쨌든 스켈레톤 종류의 괴물은 이런 특별한 둔기를 써야 효과적이다.
그리고 속성은 당연히 빛이나 전격이 효과적이고.
이렇게 때려 부숴야 할 적이 많을 때는 전격이 더 유리했다. 아무래도 빛 속성은 좀 다른 방식으로 써먹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그래서 [속성 부여]로 전격 속성을 담았다.
파지지직!
해머가 환하게 빛났다. 전격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주변을 장악했다.
“자, 일단 부숴볼까?”
강하진은 해머를 들고 달려갔다. 적당한 순간 높이 점프해서 스켈레톤들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렸다.
꽈르르릉!
빠지지지지지직!
바닥에서 시작된 무수한 벼락 줄기들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갔다.
수십 구의 스켈레톤들이 부서졌다.
강하진은 곧장 앞으로 달려들며 해머를 휘둘렀다.
꽈득! 꽈득! 꽈득!
해머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스켈레톤의 머리가 박살 났다. 그러면서 동시에 주변으로 벼락 몇 줄기가 뻗어 나가 근처의 스켈레톤들을 쓰러뜨렸다.
강하진의 해머가 신들린 듯 춤을 췄다. 동시에 벼락을 쏟아냈다.
강하진을 중심으로 거대한 공간이 생겨났다. 원래 꽉 메우고 있던 스켈레톤들이 부서지면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전격으로 휩싸인 공간이 주변을 휩쓸면서 이동했다. 강하진은 혼돈의 마물 주위를 돌면서 스켈레톤들을 말 그대로 갈아 버렸다.
주변을 자욱하게 메우고 있던 죽음의 안개도 전격 속성이 담긴 공격이 계속 스치니 점점 농도가 옅어지고 있었다.
강하진은 스켈레톤을 어느 정도 정리한 다음, 속성을 바꿨다.
이번엔 빛 속성이었다.
해머의 머리 부분에서 밝은 빛이 확 터져 나왔다.
그 빛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고, 당연히 마력이 담겨 있었다.
뿜어져 나간 빛에 닿은 검은 안개가 화르륵 녹아 사라졌다.
주변에 퍼진 죽음의 안개를 빛으로 녹여버린 강하진은 혼돈의 마물을 향해 달려갔다.
회귀 전에 이놈을 상대한 각성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온갖 스킬을 퍼부었다고 했다.
물론 강하진은 그때 거기 없었기에 정확히 어떻게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얘기는 정말 많이 들었다.
각성자 관리청에 나타난 거대한 괴물에 대한 얘기는 너무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나중에 또 그런 괴물이 나타날지 몰라서 그 이후에 분석도 많이 했다.
이 괴물은 촉수를 뻗어 주변 각성자를 붙잡아 마력과 피를 빨아먹는다.
생명체를 감지해내는 특수한 감각 기관이 있는지 벽이나 기둥 뒤에 숨어 있어도 정확히 위치를 찾아내 촉수를 내뻗는다.
그 과정에서 벽이나 기둥을 모조리 부숴 버렸기 때문에 각성자 관리청이 대부분 박살 났던 것이다.
그걸 제외하면 사실 별 볼일 없는 괴물이었다.
나중에 아주 멀리서 원거리 저격을 비처럼 쏟아 부어서 괴물을 처리했다고 들었다.
몸놀림이 빠른 각성자 한 명이 어그로를 끌고 말이다.
촉수는 생명체 하나당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몰랐을 때는 굉장히 상대하기 난감한 괴물이지만, 일단 상대하는 법을 알게 되면 손쉬운 괴물이기도 했다.
물론 저 강대한 체력을 깎아내기 위해 강력한 공격을 무수히 성공시켜야 한다.
혼돈의 마물은 딱히 약점이 없는 괴물이었다.
하지만 해머 보다는 날붙이로 공격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일단 상처를 내도 순식간에 회복해 버리긴 하지만, 회복이나 재생에도 마력과 체력이 소모되니까.
‘속성도 잘 선택하면 좋고.’
혼돈의 마물 역시 어둠 속성을 갖고 있다. 그러니 아까와 마찬가지로 반대되는 빛 속성이나 전격 속성으로 공격하면 된다.
강하진이 선택한 건 이번에도 전격 속성이었다.
칼로 깊이 찌른 다음 전격을 쏟아 넣으면 괴물의 내부를 타격할 수 있으니 훨씬 효과적일 테니까.
‘그걸 시험해 보기 좋은 기회야.’
강하진은 검을 들고 혼돈의 마물에게 다가갔다.
촤륵!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촉수 하나가 쭉 뻗어 나왔다.
강하진은 고개를 옆으로 슬쩍 젖혀 그걸 피해냈다.
뻗어 나갔던 촉수가 휘어지며 강하진의 목을 감으려 했다.
강하진은 아슬아슬하게 자세를 낮춰 그걸 피해냈다.
그리고 앞으로 쭉 달려들어 검을 내질렀다.
푹!
꽈르르릉!
혼돈의 마물 속으로 강렬한 전격이 쏟아져 들어갔다.
체력이 뭉텅 깎여 나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마물의 크기가 살짝 줄어든 것이다.
강하진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촤륵!
촉수가 또 뻗어 나왔다. 이번엔 복잡하게 이리저리 움직여서 피하기가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강하진은 끝까지 촉수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걸 피해냈다.
그리고 그대로 돌진해서 검을 휘둘렀다.
촤악! 꽈르르릉!
마물의 살이 쩍 벌어졌다. 그냥 검으로 벤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상처가 난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로 거대한 전격이 파고들어 주변 살을 모조리 익히고 터트려 버렸다.
강하진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또다시 날아오는 촉수를 피했다.
‘역시 이거라면 할 수 있겠어.’
지금 강하진은 공격을 할 때마다 스킬, [공방전환]을 쓰고 있었다.
모든 방어력을 공격력에 몰아줄 수 있는 스킬인데, 현재 강하진의 능력이 워낙 대단해서 공격력이 크게 뻥튀기 되고 있었다.
물론 공격의 순간에만 써야 하고, 혹시 모르니 피할 때는 방어력 쪽으로 바로 전환해야만 한다.
강하진은 지금 혼돈의 마물과 싸우면서 [공방전환]을 전투에 응용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강인한 육체] 덕분에 공격력과 방어력이 크게 오른 상태였는데, 그걸 고스란히 공방전환을 통해 공격력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얼마나 효과가 크겠는가.
거기에 전격 속성까지 퍼부으니 아무리 혼돈의 마물이 가진 체력이 높다 해도 차근차근 체력을 깎아 나갈 수 있었다.
혼돈의 마물이 쏘아대는 촉수 공격이 점점 더 빠르고 복잡해졌다. 하지만 강하진은 능숙하게 그 모든 공격을 피해내고 빈틈을 파고들어 강력한 일격을 계속해서 먹이고 있었다.
강하진은 내심 황수영이 가진 [일점폭파]나 [괴력] 스킬이 있었다면 이 마물을 훨씬 빨리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혼돈의 마물은 꾸준히 피해가 누적되고 체력과 마력이 깎여 나갔다. 그러면서 크기도 점점 작아졌다.
무려 다섯 시간이 넘는 전투가 이어졌다.
슬슬 바깥 쪽 상황도 끝나갈 시점이었다.
그리고 혼돈의 마물은 강하진과 비슷한 크기가 되어 있었다. 신기하게도 더 이상 살덩이가 아니라 사람 형체를 갖춘 전혀 다른 괴물이 되었다.
그때부터 싸움의 양상이 또 달라졌다.
혼돈의 마물은 살덩이를 압축해서 만든 창을 들고 싸웠다.
레벨이 350이나 되는 강력한 괴물이었지만, 강하진의 상대는 아니었다.
강하진은 오히려 혼돈의 괴물이 인간 모습으로 바뀐 뒤부터 압도적으로 싸움을 이어갔다.
새하얀 전격이 코팅된 검이 혼돈의 마물을 연달아 파고들었다.
콰직! 콰직! 콰직!
전격이 내부로 스며들며 마물의 움직임이 경직되었다. 그 뒤로 강하진의 공격이 훨씬 빠르게 쏟아졌다.
콰콰콰콰콰!
넝마가 되어 찢어진 혼돈의 마물이 바닥에 후두둑 쏟아졌다.
드디어 싸움이 끝난 것이다.
혼돈의 마물이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마석이 놓여 있었다. 그것이 바로 회귀 전에 그렇게 유명세를 떨쳤던 9단계 마석이다.
강하진이 여기 들어온 목표이기도 했고.
한데 마석 옆에 아이 주먹만 한 검은 구슬도 하나 놓여 있었다.
강하진은 일단 마석을 챙기고 검은 구슬의 정보를 확인했다.
[마르바스의 마석조각]
[혼돈의 마물의 근원이 되는 힘. 마르마스의 미약한 힘이 담겨있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구슬을 한 번 확인하고는 아공간에 넣었다.
마석과 구슬을 아공간에 넣자, 혼돈의 마물이 쓰러진 자리가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르르르.
이내 바닥이 찢어지고 거기에서 던전 코어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코어보다 거대했다. 또한 그 안에 깃든 마력도 어마어마했다.
강하진은 [분쇄]의 힘으로 코어를 단숨에 부쉈다.
쩌엉!
부서진 코어에서 강력한 힘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강하진의 몸을 회오리치듯 휘감았다.
강하진은 눈앞에 연달아 툭툭 떠오르는 레벨업 메시지를 보며 온몸에 흘러들어오는 힘에 집중했다.
언제나 코어를 부수거나 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습관적으로 하던 일이었다.
그리고 던전이 사라졌다.
* * *
전 세계를 경악에 빠뜨렸던 커다란 재앙이 드디어 끝났다.
그것은 모두에게 경각심과 공포를 각인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많은 건물이 무너져 심각한 재산 피해를 냈다.
그리고 많은 영웅들이 나타났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운 자들, 우왕좌왕하는 각성자들을 이끌고 쏟아지는 괴물들을 물리친 자들, 괴물에 당할 뻔한 사람을 구한 자들······.
그들은 세상의 지배자들에 의해 크게 부각되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괴물 때문에 생긴 피해가 아니라 괴물로부터 세상을 구한 영웅 쪽으로 옮기기 위한 작업들이 체계적으로 착착 이뤄졌다.
한국의 영웅은 단연 황수영이었다.
그리고 황수영과 함께 싸운 김지혜, 이지영이었다.
다른 많은 영웅들이 있었지만, 그 세 사람의 인기를 넘을 수는 없었다.
세 사람은 관심이 집중될 만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일단 드러난 영웅들 중 가장 강력했다.
그녀들이 싸우는 영상이 여러 개 돌아다녔는데, 하나같이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대단했다.
특히 황수영이 거대한 괴물을 한 방에 짓눌러 버리는 영상은 아직까지 가파르게 조회수가 올라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던전 브레이커 길드의 가치도 급격히 상승했다.
하지만 가디언스가 부각되는 일은 없었다.
강하진이 의도적으로 그걸 막았기 때문이다.
아직 주목받을 때가 아니었다.
앞으로 할 일도 많고 싸워야 할 상대도 많은데 지나친 관심은 독이 될 뿐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시 활약했던 가디언스 길드원들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아니, 김지혜나 이지영에는 못 미쳐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대부분 뛰어난 외모의 여자들이었으니 자연스러운 수순이긴 했다.
그래도 갖은 방법을 동원해 일단 최대한 막고 있는 중이었다.
강하진은 오랜만에 소파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재앙 때 너무 열심히 해서 몸에 과부하가 걸렸다.
그래서 적절한 휴식이 필요했다.
물론 오랫동안 쉴 생각은 없었다. 지금도 그동안 얻은 무수한 칭호와 스킬들 덕분에 몸이 빠르게 회복되는 중이었다.
걸린 과부하가 마력기관에 관계된 것이 아니었다면 벌써 사냥하러 나갔을 것이다.
TV속에서는 황수영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황수영의 건강미 넘치는 몸매가 확연히 부각되는 구도였다. 아마 의도했을 것이다.
인터뷰의 20% 정도는 김지혜와 이지영에 대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황수영은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은 최대한 피했다. 강하진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관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아마 조만간 그놈들이 움직이겠군.’
가디언스 길드에 소속된 각성자들은 대부분 전 소속 길드와 척을 지고 나왔다.
이제 슬슬 그놈들을 상대할 준비를 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