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앙의 끝에서 >
강하진은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새 던전 밖이었다. 각성 던전은 사라졌고, 강하진은 던전이 있던 자리에 서 있었다.
눈앞에 정보가 주르륵 흘러갔다.
[5레벨이 올랐습니다.]
[엿보기 스킬이 당당하게 엿보기 스킬로 진화합니다.]
[사신의 축복 스킬이 생성됩니다.]
[기술발전 스킬이 생성됩니다.]
[모든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사령전사 다섯을 처리해서 그런지 다섯 개의 정보가 떴다.
강하진이 저 중에서 가장 주목한 건 [당당하게 엿보기]였다.
[엿보기]가 진화해서 만들어진 스킬이라니. 강하진은 바로 그것부터 확인했다.
[당당하게 엿보기(A)]
[시스템의 뒷문으로 들어가서 정보를 확인한다.]
강하진은 순간적으로 저 설명이 과연 엿보기와는 뭐가 다를지 고민했다. 얼핏 봐서는 예전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가만, 들어가서?’
원래 [엿보기]는 시스템의 뒷문을 통해 정보를 엿보는 거였다.
‘시스템의 뒷문으로 들어가서 정보를 확인한다고?’
확실히 당당한 엿보기라고 부를 만한 설명이었다.
일단 그걸 확인하려면 다른 각성자를 만나서 스킬을 써봐야 할 듯했다.
강하진은 다음 스킬들을 확인했다.
[사신의 축복(A)]
[자신 혹은 타인의 공격에 저주와 죽음의 힘을 덧씌운다. 죽음의 힘은 사라질 때까지 체력을 지속적으로 깎는다. 공격 시 추가되는 저주는 출혈, 쇠약, [봉인],[봉인],[봉인]이다.]
놀랍게도 남에게 걸어줄 수 있는 일종의 버프 스킬이었다. 회귀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봉인된 세 가지 저주가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내친김에 다음 스킬도 확인했다.
[기술발전]
[특정한 조건을 만족시켜 스킬을 진화시킨다.]
정말로 간단한 설명이었다. 그래서 이것만으로는 얼른 스킬의 사용법이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굉장히 궁금했다. 스킬을 진화시킨다니, 정말 멋진 일 아닌가.
모든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해 추가로 속성부여 스킬의 봉인이 몇 개 풀렸다.
숙련도가 그냥 상승한 게 아니라 상당히 많이 오른 모양이었다.
강하진은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던전이 한창 터지고 있을 테니, 그 정보가 각성자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건 레벨을 올릴 기회였다. 더불어 재앙도 해결하고 말이다.
강하진은 가까운 재앙 지역을 확인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새로 얻은 스킬들에 대한 건 직접 싸우면서 차츰 알아보면 되니까.
* * *
던전 브레이커와 가디언스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번 재앙의 가장 큰 특징은 던전이 각성자가 있는 곳을 위주로 생성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각성자가 많이 모여 있는 곳일수록 생성된 던전의 수가 많았다.
시너지 효과라도 있는 건지 각성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각성자 한 명당 생성되는 던전의 비율이 늘어났다.
그래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거대 길드였다.
이번에 나타난 던전들은 기존의 던전과 달리 일찍 터져 버렸기에 피해가 정말로 컸다.
마치 터지기 위해 나타난 던전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거대 길드들은 자신들에게 떨어진 재앙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수많은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괴물들과 치열하게 싸워야만 했다.
그런 상황이니 던전에 들어가서 괴물이 나오기 전에 그걸 닫는다는 선택지는 초반 몇 개의 던전을 제외하면 불가능했다.
그 와중에 던전 브레이커와 가디언스는 주변에 나타난 던전을 빠르게 정리하고 다른 곳에 나타난 괴물들을 사냥했다.
어찌나 지독하게 싸우는지 곁에서 함께 싸우던 각성자들이 질려서 말도 제대로 못 붙였을 정도였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지독하고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은 단연 황수영이었다.
그 뒤를 김지혜와 이지영이 따랐고.
셋이 붙어서 요란하게 괴물을 휩쓸고 다녔는데, 일단 그녀들이 나타나면 다들 찔끔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만큼 과격하게 싸웠고, 온통 괴물의 피와 체액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반면, 강하진은 정말 조용히 다녔다.
괴물들과 싸우고 있는 각성자 무리가 있으면 스며들 듯 개입해서 적당한 수의 괴물을 처리해 각성자들이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을 정도만 남기고 자리를 옮겼다.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의도적으로 거대 길드와 대기업, 그리고 각성자 관리청은 방치했다.
물론 아예 방치한 건 아니고, 거기서 밖으로 튀어나간 괴물들은 정리했다.
하지만 괴물들은 일반인보다는 각성자를 공격할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에 외부로 튀어나간 괴물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았다.
강하진이 워낙 빠르게 움직였는지라 보통 사람들은 강하진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괴물을 처리하고 사라졌는데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영문을 모르는 사람도 수두룩했다.
강하진 덕분에 살아난 자들은 안도하고 기뻐하고 감사했다. 하지만 정작 강하진은 그러지 못했다.
그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레벨이 너무 안 오르는데?’
벌써 죽인 괴물이 몇이나 되는지 모른다. 그 중에서 쓸 만한 사체를 아공간에 챙기기도 했지만, 되도록 이동과 전투에만 모든 시간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도 레벨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아마 몇 무리의 괴물을 더 처리하면 1정도 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강하진이 원하는 건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최소 수십의 레벨을 올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한데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문제가 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답이 없었다.
‘괴물이 너무 약해.’
괴물이 너무 약해서 치열한 전투를 할 수가 없었다. 위협이 될 만한 괴물이 없었다.
괴물의 레벨이라도 높으면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 쏟아지는 괴물들은 대부분 레벨도 낮은 편이었다.
이래저래 레벨업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일단 이 상황부터 어느 정도 정리하고 보자.’
강하진의 목표는 재앙의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이었다.
아예 아무 피해도 없이 재앙을 해결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러니 피해를 최소화 하고, 얻을 수 있는 건 얻는 식으로 이용해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괴물을 처리하고 다녔을까. 슬슬 체력이 바닥나서 숨이 차오르기 시작할 무렵, 강하진이 판단하기에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다.
이제 거대 길드 쪽과 대기업 쪽, 그리고 각성자 관리청 쪽만 정리하면 끝난다.
적어도 서울에서는 그렇다.
강하진은 문자를 확인했다.
각성자 관리청에서 빗발치듯 보내는 문자가 아니라 명인혁이 보내주는 문자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뭘 어떻게 했는지 벌써 어느 정도의 정보망을 가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위험지역과 괴물이 많은 지역, 그리고 토벌이 마무리 된 지역에 대한 정보를 끊임없이 업데이트해주고 있었다.
명인혁의 문자에도 이제 더 이상 위험한 곳은 없는 듯했다. 나머지는 다른 각성자들이 정리하면 된다.
‘그럼 난······ 이 재앙에서 꼭 먹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걸 가지러 가야겠군.’
첫 번째 재앙은 끝난 것 같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레벨은 달랑 하나 올랐지만, 아마 남은 진짜 재앙을 처리하면 몇 레벨은 더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강하진은 각성자 관리청으로 향했다.
각성자 관리청에는 상주하는 각성자들이 제법 많았다. 관리청에서도 각성자를 동원해 처리할 일이 많기에 관리청 소속 각성자를 뽑기 때문이다.
물론 수준이 높은 각성자들은 다들 거대 길드나 대기업으로 빠진다.
어중간한 각성자들이 관리청 소속이 된다. 아무리 관리청이라고 해도 수준이 낮은 각성자에게는 관심이 없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관리청에도 던전이 잔뜩 열렸고, 그것들이 일제히 터지면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강하진은 관리청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보이는 괴물들을 착착 정리해 나갔다.
별로 대단한 괴물들이 있는 게 아니라서 정리 자체는 별 거 아니었다.
다만 여기도 모든 괴물을 싹 정리하진 않을 것이다.
관리청 소속 각성자들이 남은 괴물을 처리하는 동안 꼭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강하진은 대충 괴물들을 정리하고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건물 곳곳이 부서지고 무너져서 정상적으로 시설을 이용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아마 여길 재정비하려면 돈과 시간이 제법 들어갈 것이다.
‘그래도 관리청은 돈이 많으니까.’
그동안 각성자들을 등쳐서 벌어온 돈이 상당할 테니, 세금을 쏟아 부어서라도 빠르게 원래 모습을 되찾게 만들 것이다.
부서진 건물 안으로 쭉쭉 들어간 강하진은 이내 목적한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포탈 하나가 서 있었다.
다른 던전은 다 터졌는데, 이 던전만 안 터지고 여기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게 터졌는지 안 터졌는지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던전이 터지기 시작할 때, 다들 도망치느라 바빴으니까.
강하진이 회귀하기 전에 그래서 문제가 커졌다.
이 포탈이 터지는 바람에 각성자 관리청도 완벽하게 무너져 버렸고.
그나마 데이터는 백업해 뒀기에 건질 수 있었지만, 디지털이 아닌 모든 자료가 싹 날아가 버렸다.
회귀 전에는 이 던전에서 튀어나온 괴물을 지창기와 조원영이 처리했다. 강하진의 뒤통수를 때렸던 바로 그놈들 말이다.
물론 그 둘이서만 싸운 게 아니라 두 사람이 각각 이끄는 각성자 무리와 함께 싸웠지만, 어쨌든 가장 큰 공헌도를 가져간 사람이 바로 그 둘이었다.
지창기와 조원영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계기가 바로 이 던전에서 나온 괴물과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강하진이 그 괴물을 처리할 테니까. 그것도 던전에서 나오기 전에.
그 괴물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릴 것이다.
강하진은 심호흡을 하고는 던전으로 들어갔다.
이제 보스를 잡을 시간이다.
* * *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거대한 평야가 쫙 펼쳐져 있었다.
포탈은 그 평야의 한가운데 서 있었고.
그리고 저 멀리 거대한 산 같은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게 바로 이 던전의 괴물이자, 첫 번째 재앙의 보스였다.
일단 엿보기부터 썼다.
[혼돈의 마물]
[레벨 : 350]
[속성 : 어둠]
[체력 : 1204522, 마력 : 150000]
[죽음의 안개, 흡혈, 침식]
[마르바스가 지구와의 통로를 뚫기 위해 보낸 마물. 마르바스의 힘이 미약하게 깃들어 있다. 통로 개설 작업이 모두 끝나면 자폭을 통해 지구에 마르바스의 영역을 구축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강하진은 그걸 확인하고는 그대로 멈췄다.
“이건······ 또 뭐지?”
아래에 붙은 설명이 아마 당당하게 엿보기 스킬의 효과인 듯했다.
한데 그 효과가 문제가 아니었다. 내용이 문제였다.
“마르바스?”
마르바스는 회귀 직전 강하진을 죽였던 바로 그놈이다. 마지막 던전의 왕, 그리고 뒤통수를 때린 놈들과 계약을 했다던 바로 그놈.
‘저게 마르바스가 보낸 마물이라고?’
지구의 모든 던전은 자신의 소유라고 마르바스가 직접 말했다. 물론 그게 진실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굳이 죽기 직전의 강하진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시욕으로 과장은 했을지언정.
그러니 그건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한데 그 이후에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지금 저놈은 지구와의 통로를 뚫고 있었다. 그리고 통로를 모두 뚫으면 자폭을 통해 마르바스의 영역을 구축한다고 했다. 그것도 지구에.
여긴 던전이다. 엄밀히 따지면 지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강하진은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려봤다. 그때 저놈이 자폭을 했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때 저놈은 그냥 날뛰다가 각성자들에게 몰매를 맞고 죽었다.
물론 극심한 피해를 남기긴 했지만 마르바스의 영역을 구축하진 못했다.
‘회귀 전에도 실패했다는 뜻이지.’
그리고 이번에도 실패할 거라는 뜻이고.
강하진은 처음으로 첫 번째 재앙을 일으킨 것이 마르바스가 아니라 어쩌면 지구를 지키려는 쪽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가이아라는 존재가 떠올랐다.
어느새 멈췄던 강하진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지금은 저 마물을 없애야 한다. 지구에 통로를 뚫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