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앙을 맞이할 준비 1 >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던전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확실히 덜 적극적이었다.
다른 나라에 있는 가이아의 선택을 받은 각성자들에 비해 황수영이 가진 영향력이 많이 낮았다.
또한 한국의 거대 길드들이나 대기업들은 던전 정복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들이 관리하는 수익이 많이 나오는 던전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이익을 뽑아내면서 여력을 돌려 방치된 던전을 돌아야 하니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수익을 무시하고 오직 던전을 닫기 위해 움직이는 길드는 딱 두 군데, 던전 브레이커와 가디언스뿐이었다.
나머지 길드는 어떤 식으로든 수익을 우선했다.
각성자 관리청이 내건 세금 감면의 대상이 되려면 길드의 규모에 따라 닫아야 하는 던전의 수가 있기에 딱 그것까지만 채우고 나머지는 오직 수익을 위한 사냥에만 열중했다.
사실상 수익성이 좋은 던전은 거대 길드나 대기업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다.
거대 길드와 대기업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던전에서 사냥을 하도록 허가해주는 조건으로 자신들에게 떨어진 할당량은 중소 길드에 넘겨 버렸다.
강하진은 가디언스의 길드원들을 황수영에게 보내서 던전 브레이커와 함께 사냥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각 팀에 따라 적당한 수준의 던전을 지정해 주었다.
팀을 구성하는 각성자의 레벨과 능력치, 스킬을 기준으로 빠르고 안전하게 사냥을 할 수 있으면서 레벨업에도 도움이 되는 던전을 찾아 주었다.
황수영은 적당한 던전을 찾아내는 강하진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던전을 찾아내는 걸 열심히 지켜봤는데도 어떻게 하는지, 또 어디에서 정보를 구하는지 전혀 알아내지 못했다.
사실 황수영의 목표는 퀘스트를 클리어 하는 거였다.
그녀에게 주어진 퀘스트는 위험 던전 30개를 닫는 거였다.
문제는 어떤 던전이 위험 던전인지 전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냥 무작정 던전을 닫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성공률이 낮았다. 강하진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한데 강하진이 매칭해주는 던전은 위험 던전일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분명히 뭔가 비밀이 있는데, 도저히 모르겠네.”
황수영은 던전 하나를 더 닫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쉬면서 함께 사냥을 한 동료들을 힐끗 둘러봤다.
가디언스에서 온 두 명의 여자와 던전 브레이커 소속 각성자 여섯 명이 방금 던전이 있던 자리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가디언스 소속 각성자들은 정말 대단했다. 아마 저 둘이 없었다면 이 던전을 정복하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레벨도 레벨이지만 전투 실력이 끝내줬다. 상당히 경험이 많은 듯했다.
다른 팀에 섞인 가디언스 소속 각성자들도 다들 활약이 대단하다고 하니, 왠지 강하진에게 각성자를 키우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만 같았다.
‘딱 맞는 던전을 골라내는 것도 그렇고.’
한동안 쉬면서 강하진을 떠올리던 황수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쉴 만큼 쉬었으니 다음 던전으로 갑시다. 두 군데만 더 돌고 밥 먹으면 되겠네.”
그녀의 말에 다들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속으로 동시에 외쳤다.
‘싸움에 미친년.’
황수영은 허리춤에 찬 가죽 백에 마력 포션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다.
“충분하네.”
마력 포션을 보니 또 강하진이 떠올랐다.
예전에 조만간 좋은 일이 있을 거라더니 얼마 안 있어 이 마력 포션이 나왔다.
이제 이 마력 포션이 없이는 아예 던전에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건 황수영에게 있어서 전투 마약이나 다름없었다.
한데 이 마력 포션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 강하진이라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진짜 정체가 뭐야?’
황수영의 마음속에서 강하진과 가디언스에 대한 욕심이 계속 자라났다.
원래는 간단히 흡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돌아가는 꼴을 보니 흡수하는 건 고사하고 오히려 이쪽이 먹히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 비리비리 약골!’
강하진도 강하진인데 가디언스의 전체적인 운영을 맡고 있는 윤경민이라는 놈도 문제였다.
한 대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몸으로 어찌나 강단 있게 일을 처리하는지 가끔 소름이 끼칠 때가 있었다.
아무튼 가디언스를 흡수하는 건, 지금으로선 불가능에 가까웠다. 윤경민이라도 꼬셔오지 않는 한.
황수영이 조금 힘 빠진 걸음으로 다음 던전을 향해 이동했다.
* * *
강하진은 던전 사냥 팀에게 던전을 배정할 때, 여러 요소를 고려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재앙이 일어났을 때, 그러니까 던전이 터졌을 경우 세상에 끼치는 위험도였다.
던전에 사는 괴물 중에는 사냥은 어렵지만 정작 밖에 나왔을 때는 좀 덜 위험한 종류가 있었다.
반대로 던전 안에서의 사냥은 간단한데, 막상 세상에 나오면 굉장히 위험한 괴물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강하진이 노리는 던전은 사냥은 편하고 사냥했을 때 얻는 부산물의 가치가 높지만, 던전이 터져서 세상에 나오면 막대한 피해를 주는 괴물이 서식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이 던전은 이번 재앙에 더 큰 위협이 되는데, 이유는 이곳이 이중 던전이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재앙이 일어남과 동시에 이중 던전으로 변하는 던전이었다.
던전이 겹쳐 생성되는 경우인데, 재앙이 아니라면 일어날 확률이 한없이 0에 수렴하는 케이스였다.
심지어 재앙이라 하더라도 일어날 확률이 천만분의일 정도였다.
천만 개의 던전이 생기면 하나 그런 경우가 나오는 셈이니 거의 발생할 일이 없다.
한데 정말 재수 없게도 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던전이 겹쳐 생기는 바람에 기존 던전이 제법 관리가 잘 되었는데도 그냥 터져 버렸고, 그 여파로 겹쳐 생겨난 던전도 터져 버렸다.
따로 생겼으면 둘 다 안 터졌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위험한 던전인데 아직까지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 둔 이유는 던전을 관리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거대 길드인 용사냥꾼 길드가 관리하는 던전이었다.
용사냥꾼 길드가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 바로 이 던전 때문이었다.
이 던전에서는 용이 등장한다.
물론 진짜 용이 아니라 유사 용종에 불과한 괴물이었지만,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용과 비슷하게 생겼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개체였지만, 일단 잡으면 버릴 게 하나도 없는 값비싼 괴물이었다.
심장은 커다란 마석이었고, 피는 힐링포션의 재료가 된다. 뼈와 비늘은 마력을 다루는 장비를 만들 때 유용하게 쓰이며, 살은 마력이 가득 담긴 식재료로 쓸 수 있었다.
한 마리 잡으면 작게는 수억에서 많게는 수십억에 달하는 가치를 지닌 괴물이었다.
그러니 용사냥꾼 길드에서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는 귀중한 던전이었다.
강하진은 멀찍이 떨어져서 던전을 살펴봤다.
중요한 던전답게 지키는 자들이 많았다.
일단 던전을 감싸는 커다란 건물을 지어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또한 전문 경비업체가 건물 주위를 촘촘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각성자까지 끼어 있었다. 용사냥꾼 길드 소속 각성자인 듯했다.
저기에 들어가는 것도 문제지만, 던전 안에서 용사냥꾼 길드의 각성자들 눈을 피해 괴물을 소탕하고 던전 코어를 부수는 것도 문제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던전이 사라졌을 때, 들키지 않고 다시 빠져나오는 일이었다.
강하진이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을 용사냥꾼 길드에서 알게 되면 말 그대로 길드 사이의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일단 강하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특별한 재료로 만든 가면을 썼고, 체형이 드러나지 않게 두께가 일정하지 않은 장비를 몸에 걸쳤다.
그리고 최근 자주 써서 숙련도가 많이 늘어난 [숨바꼭질] 스킬을 써서 접근할 계획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코어를 부수면 던전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튕겨 나오니까.
‘그래도 해야지.’
해야 한다. 저 던전에 있던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면 정말 큰 혼란이 벌어질 테니까.
이번 침입에서 가장 큰 난관은 굳게 닫힌 철문이었다. 쇠사슬이 칭칭 감겨 있고, 두꺼운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강하진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타이밍이었다.
던전 사냥 팀이 한 차례 사냥을 끝내고 교대하는 시점을 노린 것이다.
잠시 지켜보고 있을 때,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경비대원 한 명이 자물쇠를 열고 칭칭 감긴 쇠사슬을 풀었다.
강하진이 움직인 건 바로 그 때였다.
빠르게 접근해 철조망을 두른 담장을 훌쩍 넘었다. [숨바꼭질]을 이용해 감시자들의 사각으로 절묘하게 지나갔기에 들키지 않았다.
철문이 끼이익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각성자들이 우르르 나왔다.
그 순간 강하진은 바닥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한 자세로 각성자들 다리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응?”
각성자 중 한 명이 이상한 낌새를 느껴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강하진이 포탈에 들어간 뒤였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각성자는 이내 관심을 끊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용사냥은 굉장히 힘들다. 여럿이서 사냥을 하니 위험하진 않은데 한 마리를 사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사냥 한 번 하고 나면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다들 푹신한 침대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대기하던 교대팀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철문은 다시 닫혔고, 쇠사슬과 자물쇠로 봉인되었다.
그곳은 평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 * *
던전에 들어간 강하진은 일단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교대팀이 바로 들어온다는 걸 알기에 눈에 띄지 않으려면 서둘러야만 했다.
안으로 조금 들어갔는데, 괴물이 보였다.
[충룡의 유충]
[레벨 : 159]
[체력 : 99432, 마력 : 12000]
[맹독(A), 바람의 숨결(A)]
생긴 건 꼭 용인데, 그냥 용도 아니고 충룡, 그러니까 벌레 용이었다.
‘레벨에 비해서 체력이나 마력이 굉장히 높네.’
스킬은 예상했던 거라서 별로 놀랍지 않았다. 저 두 가지 스킬 때문에 회귀 전에 일어났던 재앙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던전에서 사냥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안에 있는 충룡의 유충은 한 번 전투가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오로지 싸움에만 몰두하니까.
사방에 자리를 잡고 어그로를 여럿이서 감당하면서 꾸준한 원거리 공격으로 체력을 깎아내면 비교적 안전한 사냥이 가능했다.
‘그나저나 괴물이 너무 가까이 있는 거 아닌가?’
강하진은 일단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서 주위를 좀 더 둘러봤다.
‘너무 많아.’
괴물이 너무 많았다. 도저히 꾸준히 사냥해서 관리를 하는 던전 같지가 않았다.
어쩐지 아무리 던전이 겹쳐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쉽게 터진 것 같더니 이런 상태일 줄이야.
이 던전이 비교적 도시에서 먼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도시 근처에 있었다면 모든 던전 중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맹독에 의해 대량살상이 발생했을 테니까.
아무래도 사냥 방식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한 팀이 한 마리나 두 마리씩 상대하는데, 너무 조심스럽게 해서 시간을 엄청나게 잡아먹는다.
던전 발생 초기에는 유지가 가능했겠지만, 결국 새로 발생하는 괴물이 사냥 당하는 괴물의 수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괴물이 늘어날 테고.
지금이 바로 그 상태였다.
아마 용사냥꾼 길드에서도 어느 정도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예전 이 던전이 터졌을 때, 근처에 용사냥꾼 길드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거대 길드와 대기업 소속 길드도 함께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심지어 거기에는 제영 그룹 관계자도 있었다.
‘어쨌든 이번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강하진은 팔뚝에 감아 놓은 보호대와 허리띠 버클을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번에 새로 제작한 아공간이었다. 이것들을 만들기 위해 하루 작정하고 광산을 파고들어서 제법 큰 공간의 마석을 캐냈다.
이 모든 것이 오늘 사냥을 위해서였다.
충룡의 유충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보물이다. 아무리 던전을 닫는 것이 최우선 목표라고 하지만, 이런 보물을 다 버려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예상보다 괴물이 많아서 몇 마리 정도는 버려두고 가야 할 것 같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것들만 뽑아서 가져가는 수밖에.
강하진은 머릿속으로 사냥계획을 점검하며 좀 더 던전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이제 사냥과 수확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