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이아의 선택을 받은 자 >
강하진과 황수영은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처음 마주치자마자 인사를 하고는 아직까지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강하진은 황수영의 상태창을 살펴보느라 바빴고, 황수영은 강하진이 걸친 장비라든가 풍기는 분위기나 마력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수영의 레벨은 무려 302였다. 이 정도면 한국에서 손꼽히는 강자임이 분명했다. 한국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각성자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 만했다.
능력치도 훌륭했다. 레벨업 한 번에 평균적으로 3의 능력치가 분배되는데, 황수영은 그보다 더 많은 능력치가 올라간 듯했다.
이 정도면 강하진이 받는 능력치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스킬과 칭호였다.
[일점폭파(A)]
[창 전용 스킬. 창날 끝에 마력을 집중해서 폭발을 일으킨다. 폭발의 범위를 조절할 수 있다. 폭발력은 공격력의 10배에서 20배 사이로 정해진다. 폭발력이 정해질 때 숙련도의 영향을 받는다.]
말도 안 되는 무지막지한 스킬이었다. 그리고 회귀 전에는 황수영에게 없던 스킬이었다.
나머지 하나가 바로 황수영이 원래 갖고 있던 스킬이다.
[괴력(A)]
[순간적으로 근력을 증폭한다. 증가하는 근력 수치는 레벨×3이며, 숙련도에 따라 비율이 늘어난다.]
예전 저 괴력 하나로 던전에 들어가면 얼마나 날뛰었는지 모른다.
레벨이 낮을 때는 별 효용 가치가 없지만, 100만 넘어가도 순간적으로 근력을 300이나 올릴 수 있다.
지금은 300레벨이니 900의 근력이 올라가는 셈이었다.
그것만 보면 사기 스킬이었지만, 약점이 있었다. 스킬에 들어가는 마력의 양이 숙련도가 오를수록, 또 레벨이 오를수록 엄청나게 늘어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마력 포션만 충분히 갖추면 굉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회귀 전에는 윤경민 덕분에 돈 모자랄 일이 없어서 사냥 때마다 마력 포션을 엄청나게 챙겨 다녔기에 그렇게 급격히 길드를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고.
‘게다가 이 칭호는 대체 뭐야?’
[가이아의 선택을 받은 자]
[가이아의 선택을 받아 이레귤러가 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가이아로부터 약간의 정보와 퀘스트를 받을 수 있다.]
‘가이아가 대체 뭐지?’
강하진은 왠지 저 가이아라는 존재가 자신의 회귀와 관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들었다.
‘만나보길 잘했어.’
이제 저번에 전 세계 커뮤니티에서 확인한 특이한 각성자들이 왜 생겼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 역시 가이아의 선택을 받은 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이레귤러라는 것은 미래의 운명에서 어떤 식으로든 비틀려 있는 존재일 가능성이 높았고.
“언제까지 눈싸움만 할 건가요? 먼저 보자고 한 건 그쪽 아니었나요?”
황수영이 기다리다 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 확인할 만큼 다 확인한 것이다.
그녀가 판단하기에 강하진은 썩 대단치 않았다.
강하진이 걸치고 있는 장비는 정말 별 거 없었다. 각성자가 평소에 장비를 많이 하고 다니지 않는다는 걸 감안해도 눈에 띄는 건 손에 끼고 있는 반지 정도가 다였다.
A-마켓이 후원하는 길드의 마스터라는 말이 과연 진짜인지 의심이 들었다.
A-마켓은 각성자 관련 물품 판매에 관한 한 세계 제일이었다. 한데 아무리 봐도 강하진은 그런 곳이 후원해줄 만한 인재가 아니었다.
강하진은 황수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흔들림 없는 고집스러운 눈동자가 보였다.
“얼마 전에 외국의 어떤 각성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황수영이 한숨을 훅 내쉬고는 그래서 뭘 어쩌냐는 시선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한데 그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자신은 가이아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고.”
그 말에 황수영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확 변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잠깐 표정 관리에 실패한 것이다.
그 정도로 방금 강하진이 한 얘기는 그녀의 허를 제대로 찔렀다.
“그 사람도 던전을 빨리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더군요.”
거기까지 말하고 황수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황수영은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 사람이 누군가요?”
강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말씀해드릴 수 없습니다.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을 해서요.”
황수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 사람의 입장이었으면 비밀을 지켜달라고 했을 테니까.
“어쨌든 강하진 씨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겠군요. 그런 비밀을 다 얘기해줄 정도면.”
강하진은 입을 다문 채 황수영을 쳐다봤다.
황수영은 근육질의 여자였다. 그렇다고 덩치가 커다랗고 우락부락한 건 아니었다. 보면 볼수록 매끈하고 탄탄했다. 아마 윤경민이 황수영에게 호감을 느낀 부분이 바로 저 탁월한 건강미일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성격도 괄괄하고 호탕했다. 전투 스타일도 단순무식하게 돌격 일변도였다. 하지만 그건 황수영이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만든 성격이었다.
실제로는 정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머리도 상당히 좋았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던전을 계속 정복하실 거라면 우리 길드와 연계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황수영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가디언스라고 했나요? 좀 알아보니 길드원이 아직 스무 명이 안 되는 것 같던데. 우리랑 같이 하기에는 격이 좀 안 맞지 않을까요?”
“실제로 그 중에 전투가 가능한 사람은 더 적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들 레벨은 100이 넘었고, 한 명은 곧 200이 되니 같이 하기에 괜찮을 겁니다. 던전을 정복하는 것도 좋지만 안전도 중요하니까요.”
“그건 좀 놀랍군요.”
던전 브레이커에는 70명이 넘는 길드원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레벨 100을 넘기는 각성자는 고작 일곱 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황수영을 포함한 수였다.
“하지만 우리도 곧 다들 레벨이 높아질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쉽지 않을 텐데요?”
강하진의 시선을 받은 황수영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꼭······ 레벨을 빨리 올리는 법이라도 알고 계시는 것 같네요?”
황수영의 시선에는 혹시 너도 가이아의 선택을 받은 자가 아니냐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강하진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황수영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저었다.
“쳇, 재미없어.”
그녀는 다시 사무적인 표정으로 돌아갔다.
“연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사실 저희 길드의 힘을 좀 더 키워야 할 필요가 있어서요. 레벨 빨리 올리는 방법은 공유해 주실 거죠?”
“방법을 공유할 수는 없지만 도움을 줄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요?”
황수영이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강하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가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이며 강하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강하진은 그녀의 말투나 표정, 행동에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적인 표정과 태도를 유지했다.
황수영은 속으로 정말 질려 버렸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냥 함께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될 겁니다.”
강하진은 거기까지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만간 좋은 소식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황수영은 그 좋은 소식이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강하진은 이미 밖으로 나간 뒤였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만난 이후 단 한 번도 페이스를 가져오지 못했다. 오랫동안 대화한 것도 아닌데 피곤했다. 그냥 계속 끌려 다닌 기분이었다.
하지만 황수영은 기분이 좋아졌다. 상대 길드의 규모가 작으니 잘하면 이번 기회에 흡수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보아하니 규모는 작아도 인재가 넘치는 길드 같은데, 잘 흡수한 다음, 던전 브레이커를 키워 나가면 조만간 거대 길드로 성장할 발판이 되지 않겠는가.
더불어 A-마켓이라는 후원자도 얻고 말이다.
황수영은 그렇게 장밋빛 환상에 젖었다.
‘가이아의 선택을 받은 뒤로 모든 일이 잘 풀리네.’
그녀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맺혔다.
* * *
“헉. 마석 광산을 또 구입하시는 겁니까?”
윤경민이 서류 몇 장을 확인하고는 기겁하며 강하진을 바라봤다.
“앞으로도 마석 광산 매물이 나오면 전부 매입하세요.”
“정말 괜찮겠습니까? 마석 광산 운영은 일반적으로는 적자를 면할 수 없습니다.”
마석 광산에서 나오는 마석은 아직까지는 전혀 쓸모가 없는 부스러기 마석뿐이니 적자는커녕 운영하면 할수록 돈만 계속 들어가는 밑 빠진 독이었다.
“광산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보안 업체랑 계약을 하긴 했습니다. 믿을 만한 곳이니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광산이 있어도 거기서 일할 만한 사람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나중에 자연스럽게 해결될 겁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요. 뭐······ 어차피 모든 자금이 마스터로부터 나오는 거니까 전 시키는 대로 해야죠, 뭐.”
윤경민의 살짝 자조적인 말에 강하진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확실히 이런 건 윤경민 씨의 스타일과는 좀 안 맞긴 하죠.”
“아니, 아닙니다. 제 스타일 문제가 아니라 그냥 좀 답답해서 그랬습니다. 괜찮습니다. 이유 없이 일을 벌이는 분이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으니까요.”
강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런 문제는 나중에 꼭 곪아서 터집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은 해봐야죠.”
윤경민이 눈을 크게 뜨고 강하진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일렁이는 걸 보면 방금 강하진이 한 말이 마음을 크게 움직인 모양이었다.
“현재 활동하는 각성자들 중에는 특별한 정보를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한 정보? 마스터께서도 그런 겁니까?”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대부분은 던전에 관한 겁니다.”
“그럼 최근 던전이 터질 거라는 소문을 퍼트린 것도 그냥 단순한 추측이나 예측이 아니라 확실한 정보로군요?”
“맞습니다. 그리고 던전 브레이커의 마스터인 황수영 씨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아, 그래서······!”
“조만간 던전의 수가 급격히 늘어날 겁니다. 그리고 각성자도 지금이 몇 배, 아니, 수십 배 더 많이 생겨날 거고요.”
“그렇게 되면······ 난리가 나겠군요.”
“그 중 상당한 비율로 버려진 각성자가 생길 겁니다.”
“버려진······ 각성자요?”
“각성은 했지만, 스킬도 없고 성장 잠재력이 너무 낮아서 사실상 던전 사냥이 불가능한 각성자입니다.”
그 말에 윤경민이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그렇게 되면 일꾼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겠군요!”
“그리고 마석 부스러기도 지금은 쓸모가 없지만 곧 쓸모가 많아질 겁니다.”
윤경민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이어진 강하진의 말은 놀라웠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즉시 광산 찾아보겠습니다. 아, 우리나라가 아니라 외국에 있는 광산도 괜찮겠죠?”
“물론입니다.”
강하진이 씨익 웃었다. 아마 윤경민은 지금의 몇 배나 되는 에너지를 쏟아낼 것이다.
움직일 이유를 획득했으니까.
윤경민이 신 나서 밖으로 나가려는데, 강하진에게 전화가 왔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정아연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말이 쏟아져 나왔다.
-대체 당신 정체가 뭐예요!
강하진은 대답하지 않고 차분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성공했다고요! 당신이 준 그 시료, 성공했어요!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죠?
강하진은 정아연의 호들갑에 담담히 대꾸했다.
“성공했으니 다행이군요. 그럼 앞으로 우리 길드 재정이 좀 풍족해지겠군요.”
-어······ 그런데 생각보다 마력 포션의 수요가 많지는 않아요. 아마······ 그렇게까지 큰돈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정아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강하진은 그 말에 빙긋 웃었다.
“나중에 시료 모자라다고 우는 소리나 하지 마시죠.”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반드시 그렇게 된다. 첫 번째 재앙 이후로 무지막지한 마력이 필요한 스킬들이 대거 등장하니까.
그런 각성자들에게 현재 유통되는 마력 포션은 너무 효율이 떨어졌다.
하지만 강하진이 회귀하기 직전에는 마력 포션의 효율이 지금의 백 배가 넘었다.
그리고 그 정도는 되어야 위험한 던전의 괴물에게 스킬을 퍼부으면서 싸울 수 있었다.
강하진이 제공한 시료는 사실 몇 단계를 건너뛴 물건이었다.
“그럼 나중에 새 계약서 들고 만나죠.”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강하진은 뺨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힐끗 옆을 쳐다봤다.
윤경민이 기대와 존경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강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어찌나 뜨거운지 저러다 불똥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강하진은 슬그머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얼른 자리를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