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엿 먹일 준비 >
첫 번째 재앙은 사실 돌이켜 보면 얼마든지 그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당시 피해가 컸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방심이었다.
그때까지 던전이 직접적으로 현실에 악 영향을 미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두 번째 이유는 방치였다.
대기업이나 거대 길드는 비공개 던전을 다수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태산이나 거성처럼 음지의 조직들이 관리하는 던전도 제법 많았다.
심지어 암시장이 확보한 던전도 있었으니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던전의 수가 얼마나 많겠는가.
첫 번째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는 각성자 관리청도 좀 느슨하게 관리를 했다.
관리청의 인적 자원이나 예산은 한정되어 있으니 던전의 수가 관리 한계를 넘어서면 그건 그냥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던전을 정복해서 아예 없애버려야 하는데, 각성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 관리청으로서도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대기업이나 거대 길드 쪽에 적당히 이권을 보장해 주면서 던전의 수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아무리 아무 문제없다고 해도 던전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지면 불안해지는 사람이 늘어날 테니, 그런 식의 운영이 지금 당장으로서는 합리적이었다.
적어도 각성자 관리청의 입장은 그랬다.
하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첫 번째 재앙의 규모를 크게 키우는 데 일조했다.
첫 번째 재앙은 갑자기 많은 던전이 일시에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그 던전들에 신경이 분산되고 대책을 마련하는 사이, 그동안 방치했던 던전들이 순차적으로 터지면서 무수한 괴물들이 세상을 휩쓴 것이다.
그걸 막느라 새로 나타난 던전에 대한 대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그 던전들 역시 터져 나가면서 문제가 커졌다.
그것이 첫 번째 재앙이었다.
몇몇 나라는 아예 망해 버렸고, 한국 역시 굉장히 큰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첫 번째 재앙이 일어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각성자의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아마 그게 아니었다면 세계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고 멸망의 길로 치달았을 것이다.
강하진은 회귀 후에 복수를 꿈꿨지만, 단순히 그것만을 목표로 달리지는 않았다.
복수를 하면 뭐하겠는가. 세계가 무너지면 복수고 뭐고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데.
회귀하기 전의 세상은 반쯤 무너져서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고, 빈부격차도 어마어마했다.
당시 강하진은 세상의 그런 모습을 외면했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섰으니까.
하지만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그런 현실을 볼 때마다 눈에 밟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회귀 후, 자신이 알던 미래와는 세상이 많이 달라질 수 있기를 원했다.
계획을 세울 때 복수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를 고려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 이 던전 앞에 선 이유이기도 했다.
말이 길었지만, 이 던전은 첫 번째 재앙이 왔을 때, 큰 위협이 되는 던전일뿐더러 지금 당장 강하진에게 필요한 아이템을 구할 수 있는 던전이기도 했다.
낙동강 가에 있는 습지에 위치한 던전이었는데, 등장하는 괴물이 상당히 까다로운 반면 얻는 건 없어서 별로 인기가 없없다.
그러니 방치될 수밖에 없는 던전이었고.
관리 주체는 각성자 관리청이었다. 던전 바로 옆에 간이 검문소가 있었고, 그 안에 관리청에서 파견한 직원이 머물렀다.
직원은 검문소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감시나 관리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검문소에 카메라가 달려 있어서 포탈을 24시간 감시하고 있었다.
그것만 조심하면 이 던전에 몰래 들어가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하진은 카메라 뒤쪽으로 접근해서 카메라에 미리 준비한 장비를 붙였다.
카메라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장비였는데, 지금 찍고 있는 화면이 딱 멈추면서 감시자로 하여금 한동안 이상함을 못 알아차리도록 만드는 장비였다.
가격은 굉장히 비쌌지만, 충분히 돈값을 하는 장비였다. 특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강하진은 카메라에 장비를 붙이고는 유유히 던전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검문소 안의 직원은 여전히 졸고 있었다.
* * *
던전에 들어간 강하진은 일단 괴물의 분포부터 확인했다.
포탈 근처에는 괴물이 없었지만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 괴물 한 마리가 꾸물거리고 있었다.
과장 좀 보태서 작은 산이 움직인다고 할 정도로 거대했다. 온몸이 진흙으로 이루어진 애벌레처럼 생긴 괴물이었다.
이 던전이 인기 없는 이유가 바로 저 괴물 때문이었다.
[진흙벌레]
[레벨 : 21]
[생명력 : 32000, 마력 : 0]
[신호방출(P), 신호감지(P)]
레벨은 21밖에 안 되는데 생명력은 32000이나 된다.
게다가 아무리 죽여도 마석을 구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온몸이 진흙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쓸 만한 부산물을 얻을 수도 없었다.
죽이기는 힘들고 레벨업에도 별 도움이 안 되고, 얻는 것도 없으니 누가 저걸 잡겠다고 나서겠는가.
게다가 저놈들이 가진 스킬도 문제였다. 공격을 받으면 자신의 상황을 자동으로 동료들에게 전달한다.
싸움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머지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것이다.
저들의 공격은 아주 단순하다. 그냥 몸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다.
일단 저놈에게 제대로 걸리면 진흙에 파묻혀서 질식사한다. 움직임도 크기에 비해 제법 빠르기 때문에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
이 던전이 발견된 초기에 각성자들은 정말 고생도 많이 하고 피해도 많이 입었다.
저런 괴물이 사방에서 수십 마리가 몰려오는 바람에 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물며 저런 놈들이 백 마리 넘게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이 던전은 부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이 던전이 터졌을 때, 백 마리 넘는 진흙벌레가 일제히 부산 쪽으로 이동했다.
밖으로 나간 진흙벌레들은 전멸할 때까지 무지막지한 물적, 인적 피해를 남겼다.
“약점만 알면 정말 상대하기 쉬운 놈들인데.”
강하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진흙벌레를 향해 달려갔다.
진흙벌레도 강하진을 감지하고는 몸을 꿈틀거리며 빠르게 돌진했다.
촤아아악!
바닥에 길게 진흙길이 생겨났다.
강하진은 진흙벌레와 충돌하기 직전에 몸을 띄웠다.
노리는 곳은 진흙벌레의 머리로 보이는 상단부, 아주 정확히 그곳에 손을 푹 박았다.
애초에 몸이 진흙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저항하는 느낌도 없이 팔뚝까지 쑥 들어갔다.
‘정확했어!’
강하진은 손에 잡히는 단단한 줄기를 꽉 움켜쥐고 그대로 뽑아냈다.
촤아악!
진흙벌레가 그대로 무너졌다.
강하진은 진흙으로 이루어진 웅덩이 위에 서서 손에는 황토색 줄기를 들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진흙벌레의 더듬이였다.
진흙벌레가 가진 두 가지 패시브 스킬, 신호방출과 신호감지를 쓸 수 있게 해주는 기관이자, 진흙벌레의 몸체를 유지시켜주는 코어이기도 한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그냥 체력을 깎아 죽이면 절대 얻을 수 없는 부산물이기도 했다.
이 더듬이 자체가 바로 진흙벌레의 생명력이나 다름없으니까.
“이걸로는 아무리 잡아도 레벨업은 무리겠네. 뭐······ 여기서는 코어를 기대하기로 할까?”
강하진은 더듬이에 슬그머니 마력을 흘려 넣었다.
이렇게 하면 거칠긴 하지만 신호를 방출한다. 아마 이제 곧 다른 진흙벌레들이 미친 듯이 몰려올 것이다.
이내 진흙벌레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하진은 더듬이를 아공간에 넣고는 진흙벌레들을 향해 달려갔다.
사냥의 시작이었다.
* * *
진흙벌레 던전은 코어도 그냥 그랬다. 그래도 던전을 혼자서 없앴으니 레벨이 하나라도 오르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기대를 여지없이 배신했다.
강하진은 던전을 박살 내자마자 바로 유동훈을 찾아갔다.
유동훈은 천안 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당연히 김지혜 일행도 함께 있었다.
그는 제법 큰 건물에 그럴듯한 작업실을 꾸며서 운영 중이었다.
물론 작업이라는 것이 대부분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수련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양질의 장비들이 제법 많이 나왔다.
장비는 일차적으로 김지혜 일행에게 지급되었고, 남는 건 암시장을 통해 판매했다.
그 모든 일을 김지혜가 총괄하고 있었다.
김지혜는 자신과 함께 하는 각성자들과 함께 간간이 던전에 방문하기도 했다.
공식적인 사냥은 아니었다. 암시장을 통해 던전을 조달해서 사냥을 했다.
원래는 인원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절대 시도하지 않던 일이었지만, 강하진과 사냥을 함께 한 이후부터 조금씩 도전 중이었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 강하진이 방문했으니 다들 살짝 들떴다. 어쩌면 또 함께 짜릿한 사냥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강하진은 유동훈과 마주앉아 테이블 위에 진흙벌레의 더듬이 하나를 올려놨다.
“이게 뭡니까?”
“부탁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유동훈이 강하진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지금까지 도움만 받았는데 이제야 뭔가 하나 도울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원하는 건 위치추적기입니다.”
“위치추적기요? 그건 제 전문 분야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전자기기 전문가를 찾아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강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들킬 위험이 있어서 안 됩니다. 이걸 이용하면 아마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과연 제가 그런 걸 만들 수 있을까요?”
유동훈이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진흙벌레의 더듬이를 집어 이리저리 살펴봤다.
“뭔가······ 묘한 느낌이 들긴 하네요.”
“진흙벌레의 더듬이라는 겁니다.”
강하진은 진흙벌레의 습성이자 스킬인 신호를 보내고 받는 것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유동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집중해서 설명을 들었다. 머릿속에 다양한 생각이 교차되었다.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유동훈이 무겁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일단 해보겠습니다. 될지 안 될지는 해보지 않고는 모르겠군요.”
유동훈은 더듬이를 들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아마 금방은 안 될 것이다. 시행착오도 좀 겪어야 할 테고, 원하는 성능을 뽑아내려면 몇 차례의 개선 작업도 덧붙여야 할 테니까.
강하진은 적당한 양의 더듬이를 유동훈의 작업실에 추가로 넣어주고는 김지혜 일행을 찾아갔다.
그냥 무작정 여기서 기다릴 수 없으니 김지혜 일행과 함께 던전에 갈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니 200레벨이 넘은 뒤로 김지혜를 처음 본다. 강하진은 반사적으로 엿보기 스킬을 썼다.
[이름 : 김지혜]
[레벨 : 148]
[힘 : 38, 민첩 : 52, 체력 : 43, 정신력 : 98, 마력 : 240]
[상처치료(A)]
그 사이 레벨업을 몇 번 더 한 모양이었다. 예전 강하진을 처음 만났을 때 129레벨이었다.
그러던 것이 벌써 148이라니. 그것도 힐러가 말이다.
김지혜가 얼마나 치열하게 사냥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뿐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도 레벨이 잔뜩 올랐다.
아직 100레벨은 안 되지만 거의 그에 근접할 정도였다. 그들 역시 치열하게 싸운 것이다.
“다들 레벨이 많이 올랐군요.”
“사냥을 열심히 했거든요. 우리끼리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걸 이제 아니까요. 좀 위험하긴 하지만.”
김지혜는 오직 레벨업만을 목표로 달렸다. 마석이나 가치 높은 괴물의 부산물이 나오지 않아 상대적으로 인기가 떨어지는 던전 위주로 사냥을 다닌 것이다.
던전은 암시장을 통해 조달했으니, 그 특성 상, 정말 조심조심 움직여야만 했다.
“그래도 우리가 없앤 던전이 세 개나 돼요. 뭐······ 도저히 엄두가 안 나는 던전이 더 많았지만요.”
던전을 없앴다는 말에 강하진이 눈을 빛냈다.
물론 어려운 던전은 아니었겠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고작 저 정도 레벨의 각성자 몇 명이 하기에는 난이도가 상당한 일이었다.
저들은 강하진이 아니었으니까.
“같이 던전 몇 개 돌까 하는데, 어때요? 생각 있습니까?”
김지혜의 고개가 정신없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저러다 목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격렬하게.
“할게요! 무조건 할게요! 다들 좋아할 거예요!”
김지혜와 강하진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일시에 환해졌다.
그녀들은 이번에야말로 100레벨을 넘기겠다고 다짐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강하진은 그 모습을 보면서 슬슬 길드를 하나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저들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 어떤 마음가짐인지도 알아야 하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충분히 파악해야 한다.
‘조만간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눠봐야겠군.’
아직 100%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다들 충분한 신뢰를 쌓았다.
강하진은 저들과 함께 재앙이 될 던전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몇몇 던전은 방법만 알면 굳이 강하진이 없어도 되는 쉬운 던전이었다.
김지혜 일행에게 그 던전들을 맡기고 자신은 좀 더 어려운 던전을 처리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뭐······ 아직 시간이 제법 남긴 했지만 서둘러서 나쁠 건 없으니까.’